저자 제레미 머서| 역자 조동섭 | 출판사 시공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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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책은? 글쎄.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읽은 게 없고, 싫어한다고 말하기에는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내 일상에서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늘고 있는 상황에서 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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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큰이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에게는 행복하게도, 아지트라 불릴만한 작은 음악 카페가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들렸으니 (물론, 이유는 불타오른 연애질 때문이었지만) 그 곳이 주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카페 주인아저씨가 디제이를 보면서 음악을 틀어준다는 거였다. 

그 카페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저 책의 고양이처럼) 그 날은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난 후 긴 꼬리의 여운을 남기며 어슬렁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밤이었다.   
아직 한창인 플라타너스 입들이 인도에 가득히 비에 젖어 쌓여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이층짜리 낡은 건물 계단 앞 스피커에서 가슴을 후벼파는 한 여인의 노래가 흐로고 있었다. 바로 Tuck&Patti의 패티 캐스카트가 부른 "High Heel Blues"였다. 아무 악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만 불러대는 그 노래에 우리는 잠시 넋이 나갔다. 태풍으로 자동차 이동도 현저히 줄었고, 불어대는 바람으로 한없이 투명해져 황량하기까지 했던 그 축축한 서울 밤거리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계단을 따라 걸어올라갔다. 허름한 문을 삐걱하고 열었을 때, 정면에는 빵떡 모자를 쓴 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손님이 온지도 모르고 맞은 편 벽에 가득 꽂혀 있는 시디장에서 음악을 고르고 있었고, 어두침침한 공간에는 세상에~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들어가서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한 병씩 시키고 홀짝이며 아저씨가 선곡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데, 음악이 한 두곡 끝나자 갑자기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폭풍이 몰아친 밤에 여기를 찾아주신 두 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잘들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놀랍기도 했지만, 전혀 생소한 이 분위기 때문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디제이라니~ 그것도 이 좁디좁은 이 공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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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음악을 통해 알게 되어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좋은 음반을 빌려드리기도 했고, 매월 한 번씩 아저씨는 자신이 직접 구운 음반을 카페이름으로 예쁘게 포장해서 우리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생일케익을 사들고 가 함께 축하하기도 하고... 지금은?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 많은 음반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그 분은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을 것만 같던 아저씨였다. 사모님은 돈 버는 족족 음반을 사서 걱정이라고 아저씨 몰래 은근히 우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 분이 저렇게 음반들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리다니. 
그 이후 그곳에는 임대라는 종이를 붙여놓고 이상한 아저씨가 자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디제이가 앉아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
결혼한다는 소식을 꼭 알리고 싶었지만, 아저씨의 핸드폰은 대답이 없었다.  


이 인연을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나 또한 그 때 우리를 사로잡았던 그런 음악 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싶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었다. (사실,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의 로망 아닐까? ^^)
나도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디제이는 아니지만, 작은 음악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싶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 기분에 맞는 음악을 틀어주고, 그들이 그 음악 속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음악 속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그냥 바램일 뿐이다. 이 바램이 실행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10%도 안된다. (그래도 꼭 밝히고 싶었다.^^)

이 책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세익스피어 & 컴퍼니』는 한 서점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꿈꿔온 이상사회를 그 공간에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애쓰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억지스럽게 들릴 지 모르지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 소박한 바람에 대해 생각했다. 실현가능성을 제로로 산정한 기대 때문인지 어떤 내적 동요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생각할 때마다 기분 좋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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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비 오는 밤
파리에 온다면
셰익스피어 서점을 찾아요
반가운 곳이죠

그 서점 모토는
다정하고 따뜻하죠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


어찌어찌하여 미국에서 기자생활을 접고 파리로 날라온 저자는 값싸게 묵을 수 있는 방을 찾던 중 이곳 세익스피어 서점에서 예술가들을 상대로 무료 숙박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받고 그곳에 기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서점의 오랜 투숙객이 되어 이 서점의 역사와 이 서점을 세우고 운영해 온 조지의 일대기,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기숙하면서 예술을 꿈꾸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글로 구성하기까지 이른다.  
그 서점을 들락날락거리는 여러 군상들의 이야기들도 상당부분 들어있지만 이 책의 이야기의 가운데에는 이 서점의 창시자 조지가 있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으로서의 삶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그 이상을 이곳 서점에서나마 구현시켜 나가려고 한다. 물론, 그 또한 이 자본주의 체제가 언제 무너지고 그가 원하는 세상이 올 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돈을 함부로 다루면서도, 진저리처질 정도의 검소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서점에 머무는 자에게도 적용하는 방식으로 서점을 운영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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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야 하므로, 최소한의 해만 끼치는 방식으로 경제에 참여하는 것이 그가 택한 해결책이었다. 조지의 견해로 보자면, 이윤 추구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쳐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식품 회사는 제품에 설탕과 소금을 넣어서 판매량을 높인다. 제조 공장은 노조가 있는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의 혜택을 줄여서 원가를 낮춘다. 화학회사는 환경 보호 규제를 막아달라고 로비스트에게 돈을 주어 주가를 올린다.
"내 도서관에서는 책을 무료로 빌려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수익사업을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하지막 적어도 책을 파는 일은 그 누구도 해치는 일이 아니지."

이 책은 '세상에는 다양한 욕구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자유, 평등, 신뢰 등을 가지고 공동체를 꾸려나가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는 제법 거창한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최소한의 글쓰기와 서점을 열고, 청소하고, 닫는 과정에서의 공동의 참여를 의무로 하는 이 서점에서는  각 사람마다 일정 정도의 사연으로 인해 매번 이러한 의무들이 이행하지 못하기도 한다.
내가 만일 이 서점의 주인이라면 당장 그런 사람은 퇴출 명령을 내리겠지만 조지는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의무 불이행자에게 명령이 아닌 자극을 주면서 오히려 그 해결 과정을 즐기기까지 한다.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이 책은 99%가 사실이다'라고 쓴 작가의 첫 페이지 말을 요즘 세상에 누가 믿겠는가?)  책을 읽어가면서는 작가가 이 서점을 오고갔던 많은 유명인사들을 거들먹거릴 때마다 '아휴. 어차피 소설인데 그만 좀 읊어대지'하면서 지루하게 생각했었는데, 인터넷으로 이곳을 검색하고 실제 이 서점이 이 책에서 기술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명소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이 조지라는 서점 주인에 대해서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어떻게든 수익을 올려야만 유지될 수 있는 이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런 전통이 유지될 수 있을까?
아무리 요즘 들어 '시스템 경영'이다 뭐다 강조하지만, 이 서점은 조지라는 이사람이 없었다면 결코 운영될 수 없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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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가 공산주의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대공황의 맹위를 본 뒤였다. 세상의 부가 극소수의 손에 집중되지 않는 체제, 사람들이 그저 톱니바퀴의 톱니 같은 존재가 되어 일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경제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가 있어야 한다고 조지는 생각했다. ... 제2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정치게임으로 인해 '공산주의'가 나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을 때 조지는 치를 떨었다. 조지의 생각으로는 공산주의란 이제 곧 다가올 거대한 사회적인 실험이며 '사회를 더 강하게,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드는 정책일 뿐이었다. 조지는 사회 특권층의 성공만을 측정하는 자본주의가 아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로 체제를 판단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을 봐. 미혼모를 봐. 죄수를 봐. 이런 사람들이 문명의 척도야."
......
그래서 어느날 명확한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좋다면 그 체제에서 왜 그리 나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나요?"
......
조지는 세상에 진짜 공산주의가 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탈린은 폭력적인 협잡꾼이었고, 한때 아름다웠던 카스트로의 이상주의는 권력욕 때문에 부패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시험해볼 정부가 더 필요할 뿐이다. 자본과 자원이, 다중 칼날 면도기를 또 새로 디자인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지 않고, 교육과 가족에게 곧장 돌아가는 체제를 시험할 정부가 더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현대 지도자들 가운데 이런 시도를 해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국제 자본 공동체가 그 나라의 국가 부채 이율을 올릴 것이며, 그 경제에 해머를 휘둘러 결국 나라 문을 닫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석유회사, 부시 일가 같은 돈 많은 가문, 빌 게이츠 같은 카우보이 기업가들을 생각해보게. 이 사람들이 왜 게임의 규칙을 바꾸겠나? 이 사람들은 승자야. 다른 사람들이 잃고 있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공산주의는 굳어진 권력에 대항하는 사상인 만큼 그 사상에 악명을 씌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
"쿠바의 예를 봐.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쿠바는 중남미 중 문맹률이 가장 낮아. 인구 1천 명당 박사학위 소지자의 수가 미국에 비해 두 배나 많지. 또 미국과 달리 산모는 육아 휴가를 유급으로 받고 모든 사람들이 무료 건강 보험 혜택을 누린다네."
조지는 엄지로 책상을 단호하게 누르며 덧붙였다.
"쿠바인의 평균 수명은 미국인의 평균 수명보다 길어."
......
"둘러보게. 이 지구가 얼마나 부유한지. 그러나 유럽과 북미, 일본의 몇몇 사람들만 그 혜택을 즐기고 있고 나머지는 가난하고 배고픈 삶을 살고 있네. 하물며 깨끗한 물조차도 구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잖은가. 맞는 말이지? 사람들 대부분은 의문을 제기하려 들지도 않아. 그러나 최소한 나는 더 공평한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네."

이러한 신념만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은 차갑고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운 사람으로 조지를 바라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완벽한 사람이기 보다는 결점 투성이다. 몇 백 달러나 되는 돈을 서점에 있는 책들 속에 아무렇게나 끼워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고선 다시 찾아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를 않는 반면, 공동식사 자리에서 빵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는 것도 가만두질 않는다. 심지어 작가가 식료품 포장지를 쓰레기라고 생각하여 버릴려고 할 때는 노발대발하며 그 아까운 것을 왜 버리냐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책덮개를 만들기 위해 소중히 접어 보관하기까지  하니... 옆에서 조지를 지켜보고 같이 생활한다면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말 그대로 '돌아버릴' 지경이 될 것이다. ^^ 
그의 삶의 모토를 내가 짓는다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테야~ 단지 검소함을 추구할 뿐이지'일텐데... 자본주의 세상 한 복판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렇게 적어놓고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가 지금껏 가지고 있는 낭만적 꿈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체게바라 평전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진정한 사람의 힘은 어떤 철저한 논리가 아닌 바로 이 '인간적인 따뜻함'이 아닐까 한다.

"있잖은가. 내가 항상 이곳에 대해 꿈꾸는 게 있어. 저 건너 노트르담을 보면, 이 서점이 저 교회의 별관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 저곳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별관"


이 책의 마지막은 늙어가는 조지가 공산주의의 진정한 실험장이자 자신의 한 평생의 열정을 모두 쏟아 부은 이 서점의 운영을 과연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부인이, 그리고 어느 자식이 자신의 집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가며 함께 지내는 걸 쌍수들고 환영하겠는가? 이미 부인하고 딸과 헤어진 지 오래이지만 그 노인은 딸을 마음속으로만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네는 마음만 절실할 뿐 딸에게 절대로 메세지를 보내지 않는다. 보고 싶다고...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조지를 보면서 이 글의 작가이자 등장인물인 머서는  오랜동안 만나지 못한 이 둘을 만나게 해 주기로 결심을 하고 비밀리에 딸을 만나러 가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괴팍한 인물들을 보면서 나는 이 블로그를 처음 열면서 소개한 책 『와세다 1.5평 청춘기』가 떠올랐다.
사실, 이 책도 그렇고 『와세다~』도 그렇고 내게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자잘한 일상들에 대한 글 전개가 썩 재미있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조지라는 인물이 젊은 시절부터 평생을 바쳐서 이 작지만 위대한 실험을 해 왔다는 것은 이 책과 그리고 "세익스피어&컴퍼니"라는 서점을 오랜동안 기억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연이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은 이 책을 읽고 한참 전에 본 영화 'Before Sunset'의 도입부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에단호크가 프랑스의 한 오래된 서점에서 자신이 지은 책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다가 그곳에서 줄리델피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혹시 했더니 역시나 바로 이 서점이었다. 어쩌면 그 영화 장면 속에서 조지가 까메오로 잠깐 등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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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영혼을 감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열정과 신념이 차고 넘쳐야 한다. 아울러, 그 속에는 어린아이같은 순수함도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나이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까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거기에는 서두에 말한 저런 아담한 음악카페를 만드는 거창한(지금으로선 거의 실현가능성이 없기에) 꿈을 포함해 몇 가지가 있다. 언젠가 내 바램들이 차고 넘쳐 그 꿈 중 하나를 꼭 실현시킬 수 있을 때까지 내 자신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근데 조지! 이것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될까요? 

함께 듣는 음악은 Lluis Llach의 『Testimo』(1992) 앨범 중 1번 곡 'Amor Particular'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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