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에세이 / 샘터 (2009)

편협된 상상인지도 모른다. 그치만 나는 장영희 선생의 글을 접하면서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쪽빛으로 염색된 서걱거리는 긴 치마를 입은 한 소녀가 맨발로 풀밭을 거닌다. 한 손에는 양장본으로 된 예쁜 책 한 권을 들고, 사각사각 서걱서걱거리는 소리에까지 감탄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주에서 불어온 것 같은 속 깊은 바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게 하고 소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뗀다.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포카리 스웨트'류의 청순한 소녀 이미지를 확실하게 학습한 고정된 이미지이일 테지만, 어쨋든 지하철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책 공란에 연필로 유치하게 휘갈겨 스케치한 이미지였다. 
물론 글로...
 
# 와, 꽃 폭죽이 터졌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우리는 모두 오감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인 감각을 태어난다고 했다. 즉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동화하고, 감격하고,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 마음'은 불행하게도 살아가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 속 깊숙이 숨어 버리기 일쑤이지만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줄 알고, 불쌍한 것을 보고 동정할 줄 아는 여리고 예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때로 ...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부끄러워한다. 아니, 무섭게 덤벼드는 세파와 싸워 이기고 살아남는 길은 내 속의 어린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윽박지르고 숨기고, 딱딱하고 무감각한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짓눌러도 우리 마음속 어린 아이는 죽지 않는다. 아무리 숨겨도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작은 일에도 감동하는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아무리 무시해도 가끔씩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와! 되게 예쁘다" 감탄하고, 함께 행복해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렇게 잘 어울릴까?

'정일'이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들과 장영희 교수의 글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켜 그림과 글 모두 '순수함'의 극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인상이다. 그림이 글을 오히려 방해하도록 편집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여지껏 본 책중에서 글과 그림이 함께 호흡하며 천생연분마냥 딱 달라붙는 책은 이 책이 단연 으뜸이다. 어쩌면 그 그림 때문에 위의 '구태의연한' 순수한 소녀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게 했을런지도 ... 

# 나, 비가 되고 싶어
기적이 아닌, 정말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없는, 절대 기적일 수 없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런 그녀가 결국 평범한 삶을 다 누리지 못하고, 아니 평범한 삶 속에서 사람으로서 느끼는 뜨거운 감동을 더 이상 우리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갔다. 

'복잡하다' '요지경 같다'고 말들 많은 세상에서 모든 가식을 빼고 단백하게 뽑아낸 '삶의 아름다움'. 어쩌면 가식적으로 더 예쁘게 더 세련되게 치장할 수 없는 처지였던 그녀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녀의 어떤 외적인 이미지에 구애 받지 않고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지만, 장영희 교수가 장애를 갖고 삶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살아가지 않았다면 과연 그녀의 글이 이리 우리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떤 교수가 이런 류의 글을 썼다면
'당신은 그 편한 교수이니까 세상을, 삶을 그렇게 당신 상상속에서처럼 만만하게 바라보고 쉽사리 '행복'을 '아름다움'을 '감동'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웃기시는군! 정말~'하고 냉소를 머금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나 또한 장애에 대한 동정과 편견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못하다. 

#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아라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장영희 교수를 비롯해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께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난 이 '비장애인의 오만' 때문에 어쩌면 장교수의 글을 사심없이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감동했다고 고백한다.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많은 행복을 갖지 '못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비장애인으로서는 전혀 하등 불편할 게 없는 일상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난관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감동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장교수의 글을 보고, '사지 멀쩡한 내가 인생을 이리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되돌아보고 감동하는 거다. 지금 삶에도 감사해야 하고, 비록 지금 각자가 처한 상황이 힘들더라도 이겨내며 즐겨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그리고, 이 책은 장교수님의 생전에 마지막 글들을 모은 유고집이 되어 버려, 마치 한 순수하고 모든이들에게 따뜻했던 성직자를 떠나보내는 자의 심정으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하면서 애시당초 어떤 비판의 시선이란 자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 20년 늦은 편지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 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는 '잊히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지요.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장교수가 아버지인 장왕록 교수를 기리며 쓴 글이건만, 정작 이 글을 접할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읽으며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을 접한 순간, 그가 남긴 유서의 구절이 떠올라 가슴이 시큰 거렸다. 
괜히, 이 기억들을 꺼낸 것 같다. 글이 다시 써지질 않는다. 
한 달 전 때처럼 주저리 주저리 내뱉고 있는 내 이 글조차 다시 역겹게 느껴지며 글쓰기가 힘들어진다.  억지로 생각의 단락을 끊어본다. 

# 아름다운 빚
강원도 홍천군 희망리라는 곳에 용간난아라는 할머니가 산다. 1979년 어느 날, 할머니의 남편은 약초를 캐러 갔다가 담뱃불을 잘못 떨어뜨리는 바람에 국유림의 일부를 태웠다. 국유림 관리소는 할아버지에게 산불 피해를 입힌 죄로 벌금 130만 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살림이 극도로 어려운 정황을 참작해서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는 중풍을 앓다가 숨졌고, 간난이 할머니에게 "나 대신 벌금을 꼭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할머니는 넷이나 되는 자녀를 혼자 키우면서도 매년 형편에 따라 3만원에서 10만 원에 이르는 벌금을 꼬박꼬박 납부했다. 너무 늙어 농사를 지을 근력조차 없어지자 일당 7천 원의 허드렛일로 살아갔는데, 그래도 돈을 모아 단돈 몇만 원이라도 해마다 빚진 벌금을 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01년 가을에 드디어 벌금을 완납하고 나서 할머니는 말했다. "이제 빚을 다 갚았으니 20년 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하다. 저승에 간 넘편도 이젠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장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책 또한 정말 훌륭한 수필집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 중 내 기억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가슴 시큰해지는 일화가 바로 '우동 한 그릇' 이야기였다. 그에 버금가는 정도의 감동은 아니지만 가슴이 한 없이 따뜻해지고,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앙다물었던 아구의 힘이 순간 싹~ 풀리게 하는 일화가 바로 이 내용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절대 남한테 빚지고 살지 말아라!'라고... 성인이 되어서도 거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나머지 철저하게 학습되고 체화된 나는 '다들 은행에서 대출 얻어서 집장만 하는 거다. 그니깐 당신도 그렇게 해라'라고 하는 조언(?)에 고개를 자동적으로 저으면서 살아왔다. 구시대적인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어머님이 얘기했던 '물질적 차원의 빚'에서 더 나아가 삼십대 중반이 넘어버린 지금 나는 어떤 비물질적인 도움에도, 자연스러운 도움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변해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접하면서 저 할머니의 행적에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눈감아버리고, 배째라고 하면 될 수도 있을(실제로 장교수는 수천억 떼먹는 넘들과 비교한다) 상황에서 저버리지 못할 마음의 빚으로 남겨두고 오랜 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가신 게 남의 일 같지 않아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용간난이 할머니처럼 저리 살아왔고, 살아갈 거라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저런 성심과 성의가 있다면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 너는 누구냐?
어떤 여자가 중병에 걸려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서 있다고 확신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근엄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만 들렸다.
"너는 누구냐?"
"저는 쿠퍼 부인입니다. 시장의 안사람이지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목소리가 다시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어미입니다."
"네가 누구의 어미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
"너는 누구냐?"
다시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네 종교가 무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매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 물었다."
결국 여자는 시험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다음 그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학자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제기되어지는 문제이다. 간혹 일을 하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내일 출근을 위해 안오는 잠을 억지로 청하면서도, 무수한 군중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걸어갈 때도 튕겨져 나오는, 그러나 결코 시원스레 해결하지 못하는 질문이다. 
저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래전, 기억하기도 싫은 군생활 신참때 부대 주변 산에 메아리가 울려 퍼질만큼 큰 소리로 외쳐댔던 말이 있다. 
'잊.었.습.니.다!'  ('내가 널 때린 적이 있냐?'는 고참들의 말에 자동적으로 대답해야만 했던)
아마도 저 상황까지 가면 난 이렇게 답변하고 말 거다. 지금으로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신께 답변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 일화에 등장하는 여성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고, 마침내 신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대답을 찾았는지 더 이상 인용되어 있지 않다.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다시 돌이켜 보건데. 장영희 교수의 글의 매력은 바로 그 '선함'에 있었다. 그 '선함'은 우리가 어느 마음 깊은 곳에 지니고 있으나 쉽게 내보였다가는 이 험한 세상에서 물로 보일 것이고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그런 '선함'일게다. 그걸 장교수는 너무도 자연스레, 주저하지 않고 내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손해보는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준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결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장영희 교수는 우리에게 그 마음을 활짝 드러내고 떠났다.  
세상이 더욱 비참해지고 힘들어질수록 그녀가 생에 남긴 이 메세지는 힘겹게 자신을 감추며 살아가야 하는 가진 것 놓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오래오래 기억되고, 다시 그녀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겠지. 
그래, 그 '선함'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이리라.   

#스물과 쉰
나이가 들면 기억력은 쇠퇴하지만 연륜으로 인해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풍부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실감이 안 난다. 삶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에 익숙해질 뿐이다. 말도 안되게 부조리한 일이나 악을 많이 보고 살다 보니 내성이 생겨, 삶의 횡포에 좀 덜 놀라며 살 뿐이다.
......
세상의 중심이 나 지신에서 조금씩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드니까 자꾸 연로해지시는 어머니가 마음에 쓰이고, ...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남도 보인다. 한마디로 그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놓아 간다고 할까, 조금씩 마음이 착해지는 것을 느낀다.
......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패기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인간의 '선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 자신뿐 아니라 남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선함이 없다면, 그러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싸움터가 되고 무너질지 모른다.


함께 듣는 음악은 Renaissance의 『Camera Camera』(1981) 앨범 중 4번 곡 "Bonjour Swansong"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