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 휴머니스트 (2003)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순전히 학문적 갈망 때문이었다. 회사 옆에 큰 미술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짜가 아니면 돈 내고 미술관에 가지 않는 나의 평소 생활에 비추어볼 때 예술부분, 특히 회화와 조형예술과 관련된 나의 관심은 저 밑바닥에 맴돌고 있는 수준일 뿐이다. 
단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Simmel이라는 학자가 인류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을 섭렵하고 죽어갈 때쯤에는 이 '미학'이라는 것에 천착을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했을까? 우리의 인식과 삶의 패턴이 객관성과 주관성, 보편성과 특수성,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을 때 예술이라는 것이 그 속에서 어떤 구원의 메세지를 닮고 있을까? 
책을 펼친 이유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조금은 무겁게 책을 들었지만,  얼마 안있어 진중권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화'라는 방식을 통해 말장난처럼 내뱉는 말들은 미학, 예술이라는 장르가 나에게 주는 버거움을 많이 덜어주었다. 작가가 밝히듯이 이 책은 노동자들을 위한 미학강의가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책이다.  나도 노동자니까... ^^;

# 별밭을 우러르며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태도로 자연과 세계를 대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고, 그 생명들과 언제든지 교감할 수 있었다. ... 언제부턴가 우리는 불행하게도 세계를 이렇게 느끼길 그만두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을까? 물론 그럴 순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삶의 한구석엔 고대인들의 심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선 아직도 그들처럼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바로 예술의 세계다.

잠시 떠올려 본다.
하늘에 떠 있는 무궁무궁한 별밭을 본 적이 언제인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풀밭에 드러누워 그 별밭에 흠뻑 빠져 들고 감격에 겨워 눈이 시렸던, 그 때의 나는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다. 늘상 가방속에는 시집이 들어있었고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찬미를 했던 시절이 있다. 그랬구나. 나도 그런 적이 있었구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오랜 인류사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온 예술의 세계가 내 반평생(너무 오래 살지 않았으면...)과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그래도 변하지 않은 건 '음악'에 대한 나의 지극한 애정. ^^ 

동서남북 
이 세상 그 어디서
나, 치우쳐 
비록 흐릴지라도 
결코 음악을 잊어본 적은 없다

                     - 박용하, '다시, 序詩' 중에서 -   
 
그러나, 이렇게 감상에 젖을 수만은 없다. 난 '미학'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봐야 한다. 그러나 '미학은 ~이다!'라고 속 시원히 1편에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단지 인류사에서 사람들이 '美'를 어떻게 정의내려갔는지, 그 속에서 '예술'을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 그 과정을 많은 그림들과 학자들의 설명을 인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마치 채근하는 나에게 '서두루지 마! 예술이 장난이니?'라고 말하 듯...

# 벌거벗은 눈
유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1909-2001)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추상적, 기하학적 사유는 곧 자연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므로, 그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그럴수록 그들은 저 구석기인들이 가졌던 '벌거벗은 눈'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눈은 점점 더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럴수록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아는 대로' 묘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점점 더 사물의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특징을 사상(捨象)하고 불변적이고 일반적인 특징만을 추상(抽象)한 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한다.

지금은 그런 일이 적지만, 간혹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일 어떻게든 출근하기 위해서 억지로 억지로 잠을 청해도 정신이 오히려 더욱 맑아져오는 때 말이다.
'자자! 그래야지 내일 하루 버틸 수 있다' 이렇게 아무리 '의식적으로'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잠을 쉽게 자는 방법을 터득했다. 두눈을 편안히 감고 아무 생각 없이 감은 눈 속에서 펼쳐지는 정의내릴 수 없는 영상들을 따라가다보면 금방 잠이 든다.
주의할 것은 그 영상에 어떠한 이름도 붙이지 말것. '어! 저건 수평선이다' 하는 순간 내 의식이 다시 나를 지배하고 철렁이는 바다를 그려넣는다. 그럼 다시 의식의 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온전한 상상력의 세계,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는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체험이다. 깨어있는 시간 우리는 '컴퓨터', '단추', '가방', '경찰', '볼펜', '수첩', '숟가락', '시간', '자전거' 등등 쉴 새 없이 머리속에 추상화된 개념의 지배 속에서 지내며 그 것이 때로는, 아니 자주 우리가 '벌거벗은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 피그말리온
주술은 서서히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상징 형식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시대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발휘한다. 가령 신까지도 예술적 형상을 빌려 나타나던 고대 그리스와, 예술을 종교의 필요에 종속시키고 과학을 교회의 시녀로 만들었던 중세, 그리고 과학의 오만함이 극성을 부리는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시대가 변하면 이렇게 그 시대의 지배적 상징 형식도 달라진다. 예술에서, 종교로, 다시 철학으로.

참 신선했다. 각각이 정의내리기 어려운 '예술', '종교', '철학'을 고대 원시시대의 주술을 통해 하나로 명쾌하게 맥락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럴 땐, 저절로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오만한 '이성'의 시대는 언제 종을 칠 것인가? 아마도 '정신차려!' '이성을 찾아'라는 강박관념의 시대 이후는 나의 생에서는 오지 않겠지? 모든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극악무도한 이기심이 밑바탕을 이루는 이 시대는 아마 먼 훗날, 수백년이 지나 '지독한 광기의 시대'로 그려질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원한 것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니체는 그리스 예술의 이런 특징에 '아폴론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그리스의 조형예술은 이 밝고 명랑한 아폴론 정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비극은? 비극의 우울한 그림자까지도 이 명랑한 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없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 예술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힘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저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광포한 힘, 바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
아폴론은 극 속의 마야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생에 취하듯이, 우리는 극 속에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가상에 매혹된다. 아폴론은 이렇게 덧없는 현세를 긍정함으로써 '개체화 원리의 장렬한 신상'이 된다.
......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안으로 되돌린다. 이때 무서운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개체화 자체가 고통이다. ...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그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 속에서 전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리스인들의 두 주신(主神)은 이렇게 한몸이 된다.
......
디오니소스제의 광란의 분위기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왜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정신 나간 듯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춤추는가? 이 황홀한 도취는 모든 개인이 다시 집단으로 돌아가는 경험에서 나온다. 개체들을 서로 가르던 선이 깨지고, 그들이 너나 없이 집단 속에 녹아 있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디오니소스적 황홀함이 바로 여기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대학 때 질베르 뒤랑의 『신화적 상상력』(진형준 역, 문학과 지성사,1983)이란 책을 접한 적이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어려웠는데, 이 책 또한 니체의 이러한 신화적 분석에 빚지고 있는 면이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과학의 세계라는 것은 결국 실증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일텐데, 결국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영역은 끊임없이 무시되고, 은밀한 곳으로 숨어버렸으며 지속적으로 실증주의적 방식으로 설명받기를 강요받고 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내가 (실증불가능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나가는 예술의 영역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나아가 편안하게 예술작품들을 접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자기합리화를 시킬 수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직접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아폴론의 셰계 속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남기를 점점 거부하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녹아들기를 갈망하고 의식의 끈을 놓고 온전히 모든 삶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디오니소스적인 황홀감을 맛보고 싶어하는 경향은 꾸준히 강화되고 있다. 모든 광고의 이미지(개념화할 수 없기에 과학이 끔찍하게 싫어하는)에 대한 강조, 젊은이들의 춤에 대한 몰입, 공개된 조직사회의 붕괴와 수없이 많은 작지만 강한 결속감을 갖는 소집단들의 부활 또한 이러한 아폴론적 시대에 억눌려 있었던 디오니소스의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러한 신화적 방법론을 통해서 예술작품들을 분석하고 있지만은 않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도 소개되고 있는데, 모든 표현된 작품들 속에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버린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재미로 따지면야 이러한 성본능에 연결된 프로이트의 분석방식을 능가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나의 표현을 포함한 모든 예술작품들을 성적인 경향(리비도)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찝찝하지 않은가? ^^;

# 파리스의 심판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여러가지 감각 자료를 받아들인다. 풍부한 볼륨, 완만한 곡선, 백옥 같이 흰색, 이 다양한 감각 자료를 하나로 모으면 머리속에 어떤 상(像)이 떠오른다. 이걸 '표상'이라 하자. 다양한 감각 자료를 모아 이렇게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적 구상력(상상력)'이라 한다. 구상력은 감각 자료를 뜯어맞춰 표상을 만든 뒤 이를 오성으로 가져간다. 그럼 오성은 이걸 개념의 상자 속에 집어넣어 판단을 내린다. ...
이렇게 상상력과 오성이 딱 맞아떨어져 하나의 개념속에 쏙 들어갈 때, 인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취미 판단은 본디 인식이 아니다. 여기서 상상력과 오성은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에 구애받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이 '유희'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개념의 틀에 갇혀버리지 않고.

이러한 칸트의 정리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인간은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과학, 도덕, 예술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보다 이 '생산적 구상력(상상력)'에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을 닮은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하지만 과연 인간이 갖는 이 상상력을 복제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성을 중심으로 봤을 때) '터무니없다'는 이유로 이 상상력의 세계를 무시해 왔다. 오늘날 교육 또한 수와 개념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선까지만 아이들의 사유를 허락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방식은 평균화된 인간을 필요로 했던 공장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나 유효하다. 그 교육에 나름 충실했던 나조차도 이제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기 참 버거워졌다. 머리는 정형화된 틀에 이미 익숙해져 있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건 늘  창의성, 무한한 상상력이다. 그래서 너무 억울하다. 예를 들어볼까? 나는 '2+5=?' 하는 문제는 수도 없이 접해봤지만 '어떻게 하면 7이 될까?'라는 방식의 문제는 거의 접해보지를 못했다.
이런... 너무 나가버렸군. 칸트가 말한 상상력은 이게 아닌데...  

루벤스-파리스의 심판 (http://blog.daum.net/poem67)



아름다움은 이처럼 사용 '목적'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미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칸트는 이를 역설적으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불렀다. 미에는 목적이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사물이 아름다운 건 '내용' 때문이 아니다. 가령 <파리스의 심판>의 내용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건 순수한 미적 관조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형식에, 말하자면 선들이 그려내는 형태에 있다. ... 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드로잉'과 구성이다. 여기서 칸트는 완전히 새로운 미학, '형식 미학'의 선구자가 된다.
......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게 아름다운 건지 판정할 보편적 규칙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이 타인에게도 필연적으로 똑같은 만족을 주리라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가 어떤 공통적인 능력, 곧 '공통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공통감이란 심리 구조의 공통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심리 구조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현실에서 미적 판단이 종종 어긋나는 건 이때문이다. 칸트는 공통감을 '이념'으로 요청한다. 쉽게 말하면 공통감이 '있다'가 아니라,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걸 '미'라고 판정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규칙은 없다. 삼각형은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 있어도, 미는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 없다. 미는 '느낌'으로 판정하는 거다. 이렇게 느낌으로 판정하는 능력을 '취미'라 한다.

도대체 『미학 오디세이』를 무엇하러 읽은거야? 이럴 바에는 철학서를 보던가 칸트 책을 물고 늘어져야지. 하지만 철학책을 읽자니 머리가 한없이 무거워지고, 칸트 책을 읽자니 세상이 무너질 것 같으니 어쩌란 말인가? 만화책이 술술 읽히듯이 그나마 이 무서운 글쟁이 진중권 교수의 풀어서 쓴 글과 많은 회화들이 등장하는 이책이야말로 내 지식 수준에 적합한 책이 아닐까? 물론, 내가 이 책의 그림들과 내용들을 다 소화했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얘기하는 '형식 미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리구 칸트 양반! 진중권 교수처럼 강요하지 마시오!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그걸 뭐라 그러던가? 당신의 '정언명령'인가 뭐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질려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난 아직까지도 진교수가 책에 소개했던 여러 그림들 중 상당수에 대해서 '아~ 아름답다'는 미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자꾸 나보고 '공통감'이 있어야 한다면 ... 어쩌라구. -.-

# 정신의 오디세이
유기체의 정점엔 인간이 서 있다. 인간은 정신을 가진 존재로, 그의 몸 속에서 정신과 물질은 통일을 이룬다. 인간의 역사는 정신 발전의 역사이며, 이 역사 속에서 절대자는 오랜 항해를 마치고 마침내 다시 자기한테 돌아간다. '정신철학'은 이 과정을 다루는데, 여기에도 세 단계가 있다. 먼저 '주관정신'이다. 이건 개인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된다. 이어서 개인을 초월한 '객관정신'이 등장한다. 이건 어떤 사회적인 정신 원리, 말하자면 도덕이나 법이나 인륜 따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종합을 이루는 곳에서 마침내 '절대정신'이 탄생한다. 여기서 이념은 더 이상 출발하기 전의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한 구체적 존재가 된다.
절대정신은 다시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이념을 '감각'의 형태로 드러내고, 종교는 '표상'의 형태로 드러내며, 철학은 '개념'의 형태로 드러낸다.
......
예술은 절대적 진리를 드러내는 매체다. 헤겔은 이렇게 이념이 예술 속에서 감각 형태로 드러난 게, 곧 '미'라고 보았다. .... 예술은 자연미의 결함을 제거해 완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념에 합치하지 않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상(Gestalt)속에서 이념이 빛날 때, 헤겔은 이를 '이(념)상'이라 했다.
......
헤겔은 이념과 매체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던 그리스 시대 이후, 예술은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 낭만적 예술 다음엔?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다. ... 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이미 시는 관념적 표상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때쯤 세계의 역사는 저녁 무렵으로 접어든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철학)는 해질녘이 돼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한다.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세계의 역사는 완성에 도달한다. 헤겔의 머리속에서.

'헤겔의 머리속에서' 부분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와 같이 『미학오디세이1』는 철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 수업 시간에 지독하게 '철학'적이어서인지 재미가 없던 개론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재미있다. 철학이라는 영역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아울러 많은 고금의 예술작품들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장수하는 비결이 있는 게 아닐까?

서두에도 말했지만,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는 두가지 경향이 있는듯 하다. 그 하나가 증명가능한 객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들, 종교 등을 통해 드러나는 설명할 수 없는 주관화의 경향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사는지가 관건이다. 나? 난 머리로는 디오니소스적인 술적 영성의 충만함과 근원적 충동을 만끽하고 싶으나 이미 학습받은 뇌와 단련된 신체는 안타깝게도 아폴론의 숭배자가 되어 있다. 내가 나에게 갖는 아쉽고 서글픈 것 중 하나이다. ^^;

함께 듣는 음악은 Triumvirat의 『Old loves die hard』(1976) 앨범 중 1번 곡 "I Believe"이다.
곡 전체를 들려주고 싶지만 용량이 큰 관계로 음악 끝부분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7분 51초의 곡인데 5분 조금 넘게 들을 수밖에 없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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