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유시주, 이희영, 강현선, 이지연 / 출판사 창비(2007)


이 책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눈큰이가 사 놓고 책꽂이 이곳 저곳에 함부로 쳐박혀져 있던 책이었다. 무슨 책을 읽을까? 책꽂이를 보던 중 발견했을 당시 이 책은 별로 매력적인 구석이 없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썼던 '민주주의'는 어디가고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바닥까지 핥아 텅 비어 개사슬에 이리뒹굴 저리뒹굴 찌그러진 채 엎치락 뒤치락하는 개밥그릇 신세가 되었다. 나 또한 이 책 또한 뜬구름 잡는 진보를 자칭하는 학자들 몇이 쓴 허접한 글 모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 들어가는 말 - 시민들의 일상체험
현실의 삶에서 부딪히는 의문과 고통을 성찰하고 해결하고 싶어하는 시민들에게 그동안 한국사회의 이론과 연구는 너무 삶과 동떨어져 있거나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그 동안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87년 6월체제'라고 담론화하여 못박아 왔고, 많은 뜨네기 정치인들이 이 6월 항쟁의 주된 주역이었던 '386 세대'를 빙자해서 정치를 하다 '무능'이라는 낙인을 받고 상당수 국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영역에서의 양극화, 최소한의 복지의 후퇴, 촛불과 미네르바 사건으로 대표되는 결사표현의 자유의 심각한 제한, 망국적인 경쟁교육,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남북관계, 그리고 알게 모르게 옥죄어오는 우리네 삶의 고달픔과 피곤함...
이 모든 내 삶 주변의 현상들이 무언가를 갈망하게 했다. 그것이 꼭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알려는 노력도 없이 모든 걸 냉소하기에는 나 스스로에게도 무책임한 생각이 들었다.
근래에 읽었던 『살아있는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선진국가라는 미국의 진보적 학자가 쓴 '희망찾기'였다면, 과연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어떤 희망을 찾고 있는지 지적으로 호기심이 생긴 것도 이 책을 조금은 억지스럽게 읽기 시작한 또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 들어가는 말 - 시민들의 일상체험
시민들이 일상체험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구체성을 재구성함으로써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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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가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성과는, 보통의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여기에 실린 동료 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쑤 화젯거리 중심으로 성급히 문제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일간지에서는 제공하지 못하는, 술자리에선 비분강개와 단편적 성토 사이로 흩어져버리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지나친 격렬함에 묻혀버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바로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 허공에 있던 민주주의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고, 나로 하여금 일상의 경험을 되살리며 내 삶을 성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책은 30여명의 각계 각층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괴리, 모순 등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서구의 역사적 민주주의 발전사나 이론을 들여오는 방식이라던지, 오래 전 있었던 4.19 혁명이나 5.18민중항쟁, 6.10 항쟁의 기억들을 우려먹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강권하는 건조한 글들에 지겨워져 있던 나로서는 각 장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혀졌다.

1.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 '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수준과 같이 간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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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민주화된 사회라고 하는 것은 가장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남녀관계에서 여자이고, 전체적으로 뭐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이제 뭐 없는 계층이라든지 이런 경우들이 어떻게 잘 보완이 된 사회냐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영미, 41, 대학강사)


흔히들 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는 형식적 민주주의 또는 제도적 민주주의는 정착되었고 이제는 질적 민주주의 또는 일상(생활) 민주주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편리함 그 이상의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
나의 경우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김영미(가명)라는 사람이 표현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그들에게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를 민주화된 사회라고 나름 정의해 왔다. 내가 만난 소외자는 남성 또는 그 연장으로서의 구조적 권력기제에 의해 착취당하고 폭행당하는 여성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속에 내던져진 탈북자(지금은 '새터민'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커밍아웃을 했던 동성애자,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의 경쟁적 삶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었다. 이들의 사연과 이들의 모습과 이들의 씁쓸한 웃음을 직접 대면하건, 영상이나 활자를 통해 대할 때면 난 마음이 불편하고 나 스스로 죄인이 된 듯한 마음이 들곤 한다. 영낙없이 표정관리가 안되고 잘 나오던 말도 버벅거리게 되고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난 최소한이라도,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적어도 나 또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희망 한 가닥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회를 적어도 '민주화된 사회'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런 가닥들이 여러개가 있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도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그래서 무기력함으로 당혹해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선택을 함께 이야기하며 등 두드려줄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너무 큰 기대일까?  물론 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기대하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이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터뷰를 접했을 때, 그래도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안도감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 

2. 민주화와 양극화
- 인간의 존업과 사회정의는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경제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고 완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다.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 98년 당대회에서 개정한 '베를린 강령' 4장 4절 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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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이만큼 진행됐는데도 불구하고 (…) 우리의 미래가 과연 행복한가. ... 이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분노, 그게 제일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 뭐, 지하철에서 그냥 너무 원한에 차서 남을 밀어서 떨어뜨린다거나, 통제 안되는 슬픔, 이런 것들이. 그게 안타까워요. ... 저 혼자도 취직을 못하는데, 학생들의 취직을 걱정해주는……, 학생들한테 '그렇게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영선, 44, 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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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빈부차는 상관이 없는데, 노력하지 않고 갑자기 벌어버리는 그런 것들은 너무 너무 사람들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최태경, 49, 초등학교 교사)

얼마전에 읽었던 유종일 교수의 『위기의 경제』서문 제목이 '문제는 정치야! 이 바보야!'라고 되어 있었다. 대학 때부터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세상이 정말 달라지는 줄 알았다. 순진했다고 해야 하나 무식했다고 해야 하나.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집권을 하게 되면 이 불평등을 깰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사람들 모두 너무 지쳐있고, 많은 이들이 탐욕의 화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현상을 봐도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이 끝없는 탐욕이 어느정도인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학자들은 대자적 계급의식을 갖춘 '민중'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해야 한다고 황당한 논문발표를 하기도 한다. 위 사람들의 한숨과 분노는 과연 탐욕의 열차에 아둥바둥 올라타려 누군가를 짓밟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전쟁터같은 이 곳에서 어떤 울림이 있을까? 
잠시나마 '어~ 이건 아닌데'하며 그 행렬을 주춤거리게 했던 '용산 참사'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쉬이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렸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다. 다시 탐욕의 기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달리기 시작한다.        

# 불안, 상대적 발탈감의 정치적 행로
면접자가 장애인 시설이 집 근처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주민시위를 예로 들어 '중산층의 시민의식'을 거론하자 그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지금 그렇잖아요. 월급쟁이들이. '아, 내가 50 되면 잘리는데 집값이라도 오르고, 뭐라도 해가지고, ... ' 이게 안전판을 마련해야 된다는 어떤 그런 게 있기 때문에 (…) 자기 동네에 혐오시설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것도 참, 비난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 그건 어떻게 보면 생존 본능하고 비슷하다고 저는 보거든요?
(…) 중산층이다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서 자기들은 또 절박한 거야. (강석현, 43, 일간지 기자)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가 있다면 바로 이 작자이다. 보수일간지 기자라는 이 사람은 이 내용 외에도 언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시장논리에 입각해 자기정당화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생각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이러한 중산층들의 보수성은 맹목적 반공주의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87년 6.29 선언 직후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게 된 주된 요인 중 하나라는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양극화'는 공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 또는 다른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이기적 행위를 경쟁에서 이기거나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작용한다. 요컨대 '양극화'는 '민주화'가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무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한다.

일전에 홍세화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프랑스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차이는 '공공성'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인가 윤리교과서에서는  노동자의 파업을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보장된 집단적 행동으로 정의하면서도 그 제약 조건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즉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노동자의 파업이 일어나 철도 노선이 끊기고 대중교통이 마비되어도 프랑스 사람들은 충분히 그 상활을 이해하고, 자신의 불편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교육받는 우리는 파업은 인정하되 그 파업은 결코 우리에게 불편함을 줘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선에서의 선긋기를 내재화하고 있다. 파업이라는 것이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노동을 멈춤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불편하고 힘겨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 힘이 생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양극화에 대해서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어찌보면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3.  제도와 사람
-성심과 성의가 없는 곳에 제도와 법이 기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우창,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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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닫고 있는 사람'과 '피해가는 사람'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힘들고 피곤한" 책임을 외면함으로써 '방조자'가 되고, 결과적으로는 '입을 여는 사람'과 '부딪치는 사람'에게 미필적 가해자가 된다고까지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치러야 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입을 여는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 간다. ... 모두들 입을 닫고 있는데 나 혼자 말하는 것,모두들 피하는데 나 혼자 부딪히는 것이 '구조적'문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 뿐일까? 이 문장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인터넷에 글 쓰는 것조차 엄격한 자기검열을 요구받는 현재, 난 가급적이면 이 블로그를 통해서나 인터넷 언론에 댓글을 쓸 때나 침묵하기 일쑤가 되어 버렸다. 물론, 비판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괜히 입 열었다가 어디선가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황당한 자기검열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누가 나같은 소시민의 글을 읽고 민감해하지도 않을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정권의 문제에 날을 세우는 많은 이들이 있다. 난 그들의 등 뒤에 숨어 무임승차하고 있다. 입사한 지 7년째 되어가면서, 임원들이나 상사들에 대해 비판의 글도 올리기도 했고, 나에게 '향후 직장생활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다'는 압력을 행사하는 상사 앞에서 '그런 조직이라면 떠나야죠'하면서 벌떡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문제가 훤히 보이는데도 침묵하는 내가 되어 버렸다. 난 점점 이기적이고 그럭저럭 내 생을 좀먹는 좀벌레가 되어 간다. 벌레가...

# '원론'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나 이런 사람들은 훨씬 편할 수도 있어. 완전히 바깥의 조직인데, 우리는 내부야. 한 조직에 있어. 한 조직에 있는 사람끼리 갈등하고 설득하고 그래야 되는 것이 굉장히, 솔직히 인간적·심적으로 부담스럽고 피곤하고 힘들어요. (최태경, 49 여, 초등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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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조직 속에서의 개혁, 일상 속에서의 개혁은 어떤 점에서는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투쟁보다 힘들다. 구속이나 투옥은 없지만,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인 습속과 관행에 맞서며 인간적인 갈등을 견뎌내야 한다. 일상의 습속을 거스르는 투쟁은 최루탄 속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투쟁만큼 격렬하지 않지만 결코 그것보다 쉽지 않다.  

절대 동감한다. 솔직히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이 '식사 하셨어요?' '오늘 좀 춥죠?'라는 일상적 인사말을 주고 받으면서 뭉텅뭉텅 살 수 있고, 그게 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 사람들과 업무를 바라보는 입장차에 대해서, 그리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세에 대해서 문제제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거리에 나서서 투쟁하는 것보다 훨씬 힘겹고 고달픈 일이다. 그렇게 일종의 암묵적인 카르텔을 형성해 간다. 그리고 나의 갈증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풀고자 자꾸 조직 내부가 아닌 외부를 기웃거리게 된다. 요즘의 내가 특히 이 경향이 심하다. 가끔 술을 마시면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고 싶어요. 밖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많이 받고 싶어요'라고 종종 이야기한다. '직업으로서의 소명' 같은 것은 사라지고 내 삶의 충만을 직업과 무관한 밖의 활동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니, 나의 갈증과 삶에 대한 불만족은 하루하루 깊어져 가는 것이다.

# 시민교육의 방향과 방법
시민교육의 설득력은 '논리'가 아니라 생활현장에 뿌리박은 풍부한 체험과 이해에서 나온다는 걸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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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민교육에 관심이 있는 현직 사회교사 20여명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5개국의 시민교육 교과서를 번역했다고 한다. ... 자료의 번역과 분석에 참여한 한 교사는 서구 시민교육 교과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정의, 연대, 인권, 평등과 같은 추상적 가치가 실제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와 질문을 제시한다는 점"을 꼽았다. 가령 미국 중학교의 시민교육 교과서은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선수로 내보내는 학교 농구팀 주장, '배워야 할 필요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는 학생들만을 모집하는 음악예술학교, '호수의 장점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훌륭한 수영선수나 보트를 소유한 사람만 호수 주변의 집을 살 수 있도록 한 지방정부를 예로 들어놓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은 위 상황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의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정함'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관련해 공정함을 넘어서는 다른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이 글 초입에도 썼지만, 소위 진보진영의 학자라는 사람들은 흔히 외국의 사례를 빚대어 표현하거나 일극중심의 정치제도 프레임만을 언급하며 제도적 영역에서의 변화만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민주시민교육이라는 것 또한 정치 제도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외국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차원에서 많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령, 5.18민중항쟁을 이야기하면서도 '해방구', '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적 항거' '군부독재의 만행'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 사례를 들어 '나의 이해(생존에 대한 갈망)와 공공의 이해가 상충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 때, 그 곳 광주 시민들이 겪었을 심적인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희생을 각오한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강의나 교육은 그리 많지 않다. 즉, 그런 가슴아프지만 감동적인 역사적 경험을 나의 문제화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심화시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단지 국가가 운영하는 깨끗한 국립묘역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때가 되면 '그 때 빛고을에서 보여준 민중의 투쟁을 기억하고 계승하자'는 구호가 잠시나마 회자되는 것은 결단코 기억이 아니고, 계승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을 가지고 우리에게 억지스레 인권, 평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속의 사례로부터, 그리고 위의 경우처럼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나아갈 길을 고민할 때 공감할 수 있는 연대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싹틀 것이다. 그런 민주시민교육으로 이제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 배제의 기초 - 무지와 오만
상대주의적 자세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배타성'을 낳는다. 실제로 배타성은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매우 부정적인, 그리고 강력한 속성의 하나로 지적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다수자가 '차이'에 근거해 소수자를 '타자'로 대상화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다양한 층위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 특히 집단주의와 국가주의, 냉전적 흑백논리가 오랫동안 사회의 내면을 장악해온 탓에 이때의 '나'란 '주체적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준거한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성찰 없이 내면화한 몰주체적 개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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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정권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스스로를 저항적 폭력으로 조직해야 했고, '국가이익'을 내세운 야만적인 집단주의와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또다른 집단주의를 형성했다. 집단주의는 '동질성'에 근거한 결속을 강조하며 '차이'를 억압한다. ... '차이'를 억압했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은 군부독재와 '시대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차이'를 억압하는 흑백논리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실제와 다르게 단순화함으로써 그것을 올바로 표현하는데도, 바꿔내는 데도 실패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살아왔다. 나를 돌아볼 틈이 없이 동료집단 속에서,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구국의 강철대오' 앞에서 나를 잊은 채 더 큰 집단 속에 소속되고자 안간힘을 써 왔다. 그렇기에 그 집단을 벗어나는 순간 쉽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또 다른 집단에 쉽게 나를 구겨넣는 것을 예삿일로 여겨왔다. 인맥, 학맥, 지연, 혈연이 좌지우지하는 한국사회에서 나을 오롯이 나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 성찰과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하는 고된 일임에는 틀림없고, 난 편하게 나를 잊은채 그 흐름에 몸을 맡겨왔던 것이다. 그 결과 집단의 논리로 인해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벽을 세웠으며 그 상대방을 온전한 한 개인으로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사람이 포함된 집단의 논리에 끼워맞춰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그 사람을 진실되게 대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도 나는 오랜동안 내게 익숙해져 있는 그러한 사고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아이들은 [장애가] 심해서 이런 특수학교라는 곳을 만들어서 어떤 학급에, 인원도 4명밖에 안되고 거기다가 교사까지 두 명을 넣어줬어요. 그런데 주고받는 것들이 어른이, 엄마가, 아빠가, 말을 할 수 있는 형제가, 이런 분들의, 성인의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해서 오히려 또래하고의 어떤 관계를 맺는다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경험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른들이 어른들 편의로, 어른들 위하는 마음으로 분리를 시켜놓은 거죠. 거기서 빼서, 집어낸 거잖아요. ... 저는 특수학교가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박영주, 40. 특수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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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학생을 일반 학생과 분리하여 특수학교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을 그는 일종의 '격리정책'으로 여긴다. "특수학교의 가장 큰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인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더불어 사는 것"인데, 아이들을 "따로 빼내서" 특수학교에 모아놓는 것은 또래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 아이들이 "삶을 향유"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볼 때 불편하지 않도록, 또한 "아이들을 화장실까지 실어 날라서 앉혀주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장애 학생들을 위해 운영한다는 특수학교가 결과적으로는 특수교육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박영주씨는 미국과 호주의 장애인 정책을 ... 그 두 나라와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의 차이를 "우리나라는 아직도 '장애극복'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 사람들은 장애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2년 전이었던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누나 반에 정신지체아 학생이 있었다. 가장 쇼킹한 사건만 이야기하자면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뾰족한 연필이나 볼펜으로 급우들을 찍는 일이 있었다. 누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 부모는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라'는 누나의 요청을 결단코 거부했었다. 힘들어하는 누나를 보면서 '뭐 그런 부모가 다 있냐? 그러한 아이들을 위해서 특수학교가 있는 것 아니냐?'고 위로해주며 참 황당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의 장애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아이 엄마 입장에서 마음 독하게 먹고 악다구니로 기필코 아이를 일반학교에서 생활하게 한 이유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먼 훗날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이 혼자 남아있을 때, 특수학교에서 보호를 받으며 길들여졌던 아이가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 쳐질 때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얼마 안있어 안토니오가 다니게 될 어린이집에서 신규가입 아이들의 부모들을 모아놓고 어린이집 설명회를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들어오게 된 아이 중에 성장장애아라고 아이를 소개하는 부모가 있었다. 그 어린이집 교사들과 기존 가입 부모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그 아이를 한 번 맡아보겠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 아이 엄마는 아이 걱정보다는 아이와 함께 생활할 아이들과 교사들에 대한 걱정을 먼저 얘기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분명 선생님 여러분들께도 그리고 함께 지낼 아이들에게도 분명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난 그 엄마의 입장과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 아이와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한 교사들과 그곳 아이들의 부모들에 대해서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힘든 일도 많겠지만 안토니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아이는 분명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진정 더불어 산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가족-사상과 일상의 간극이 폭로되는 공간
남편도 같이 운동하면서 만났던 남편인데, 이게 가정이란 영역에서는 (…) 정말 비민주적이죠. 그러니까 머릿속으론 이념적인 부분은 굉장히 선도적인 구호를 외치는데 정작 생활 속에서는 굉장히 아주 보수적인 가치관에 그렇게 있어요. 역할 분담도 하나도 안되고, 가사 분담도 하나도 안되고. 아주 전형적인, 전통적인 그런, 가부장제의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의식의 연장이었어요. ... 저는 이제 이런 내면과 바깥, 보이지 않는 부분과 드러나는 부분, 이런 부분들에서의 불일치가 굉장히 많이 저한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 (…) 저도 제 머릿속으로 '아, 이게 옳은 것이더라'고 하는 생각과 제가 실제로 실천적인, 살아가는 모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고통받죠. (김경진, 42, 시민단체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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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데모크라씨라고 얘기하는 걸 외쳤던 사람들이, 지금 보면 그 정도의, 자기 삶에 있어서 그 정도밖에 유지 못하면서"라는 김경진 씨의 말은 민주주의를 세계관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는 사람에 견주어 일상의 모든 관계에서 좀더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기대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독재권력을 향한 투쟁에서는 그처럼 열렬했던 남편의 민주주의는 아내와의 관계나 가족 안에서는 작동되지 않는다.

대학시절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일정정도 교류가 있었고, 나 또한 관련 수업들을 몇 개 수강했었던 경험이 있다. 그러면서 일종의 '조심성'이 몸에 베기 시작했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세상('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현실만으로도, 그리고 그것을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사회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에서 남자로서의 나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누군가에게서 애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던가? '사내대장부가''남자니까'라는 얘기를 사용하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다.
내일 모레 우리는 이사를 한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결혼 기념일이다.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결혼할 때부터 우리는 가사분담을 엄격히 했다. 눈큰이는 요리를 담당했고, 그 밖에 빨래, 청소, 설겆이 등 모든 역할은 내가 담당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나 너무 힘들어! 역할분담 재조정하자'라는 나의 요구도 묵살된 채 지금까지 비교적 잘 지켜져 왔다. 아마도 향후에도 크게 변동사항은 없을 것 같다. 대신 나는 바랬던 것이 있다.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짐지워진 역할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아버지의 생활에서, 드라마 등에서 숱하게 그려지는 '남자 가장'의 역할 등을 통해서 결코 쉽게 해방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또한 절감한다. '누가 너더러 가장으로서의 짐을 지라고 했느냐?'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분명 누가 나에게 그런 적은 없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무게를 느낀다. 아... 이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변에서 운동을 열심히 한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위의 김경진씨가 한 이야기들과 같은 맥락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평등을 이야기하는 남자는 술자리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밤늦게까지 앉아서 평등을,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2차 노래방에 가서는 도우미 아줌마를 불렀었다고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성장이나 집안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회적 이슈들마다 뛰어들어 플랭카드 앞에서 민주주의를 외쳐대는 또 다른 권력지향적 남성들도 많이 보았다.
구호로서의 '민주주의'를 외치는 남성들에 대해 위의 경험들을 일반화시켜 덧씌우고 있던 차에, 일전에 강정구 선생님이 구속되었을 때 한겨레 신문이었던가? 조한혜정 선생님이 강정구 선생님의 일상을 소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회적 현안과 민족 통일을 절절히 외치면서도 매일 일찍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함께 가사일을 분담하고, '부모'로서 아이들과 충분한 대화를 갖는 선생님의 일상에 대해 언급한 글을 보고 강정구 선생님에 대해, 그리고 내가 가졌던 기존 운동가들에 대한 일반화된 선입견 또한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그런 남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또한 나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눈큰이에게는 못마땅한 구석이 없을 리 없다. 내 딴에는 며느리를 최대한 배려한다고 생각하여 '우리 어머니, 아버지 같은 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시댁을 찾을 때마다 긴장하고 어려워하는 눈큰이를 구박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눈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 
진보진영 남자들에 대한 나의 이 가혹하리만치 비판적인 시각이 어쩌면 그들처럼 투쟁의 최일선에 뛰어들지 못한 나를 변명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그들은 투옥되기도 하였고,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런 젊은 시절 경험으로 인해 현재의 경쟁의 구도 속으로 편입되기조차 버거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술을 벗삼아 자신의 상처를 위로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을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활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 오래된 이야기 - '민주주의를 외치는 가부장'
'진보적' 남성들의 '사상과 일상의 불일치' 문제를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 주로 제기하는 게 균형을 잃은 처사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주장과 행동의 불일치는 진보적인 남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며,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운동권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약의 부담'을 스스로 졌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남성들이 또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고 공적인 공간을 거의 독점해오다시피 한 남성 일반의 특성이 운동권 남성에게도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치부되어온 가족이 역설적으로 '공적으로 주장하는 가치'와 '일상의 실제 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공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우리 모두의 이중성
한국인들에게는 언제나 '나 말고 다른' 한국인들이 문제이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은 없고 '다른'한국인을 향한 비판만 도처에 넘쳐나는 탓에 때로는 '그 많은 문제 있는 한국인들은 다 어디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이다. ...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이중성을 합리화할 때 쓰는 주된 논리는 "남들 다 그러는데 나만 중뿔나게 원칙 지키다가는 바보가 되거나 손해를 본다"는 경험에 근거한다. ... 원인이 나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나로선 어찌해볼 수 없는',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데 있으므로 개인의 책임은 면제, 혹은 합리화된다. 따라서 윤리적 책임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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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사회를 성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사회의 변화는 나의 변화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사상과 일상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나 자신을 민주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사회의 민주화, 즉 규범적 원리와 행동 원리가 일치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일상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그것을 나의 문제화 시킬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책에는 흔히 이야기하는 정치문제, 언론문제, 지역소외의 문제, 교수사회의 문제, 종교의 문제, 노동운동의 귀족화 문제 등 사회 제반 이슈들도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입장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은 그리 생산적인 일이 되지 못하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면서 그동안 이책을 읽으며 메모해 두었던 많은 인용문들(아마 지금까지 인용한 글들보다 더 많은 인용글들)을 삭제했다.
문제는 '나'에게서부터 시작한다. 나를 성찰하는 것부터가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이 여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바로 나의 문제로 직결될 수 있도록 글을 짠 것부터가 참으로 신선하고 진일보적인 민주주의 관련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시주 선생님이 이런 일상의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당당히 들어내 보이고 아프지만 진보진영에 대해 쓴 소리도 거침없이 할 수 있던 뒷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지난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성찰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이 책의 내용들이 대단히 강력하고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현재의 상황만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훑기보다는 조금 더 나도 우리의 우여곡절 많았던 역사를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유시주 선생님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나의 바람을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고, 나와 우리 부모세대와 그 윗세대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나의 감정이 오락가락 한 큰 이유는 그동안 나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그만큼 나를 불신하고 있는 나의 상황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가 나를 포근히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바래본다.  

일상은 민주적 가치의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자각하는 통각세포이며, 시민들은 일상의 정치적 고통을 경유하며 민주적 가치를 이해하고, 내면화한다. 이때 일상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행의 현장'으로서의 역사적 공간이 되며,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부딪치는 이 역사적 현장에서 시민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가치를 선택하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곧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를 좌우하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함께 듣는 음악은  Dianne Reeves의 『The Grand Encounter』(1996)앨범 중 9번 곡 "side by side"이다. Germaine Bazzle과 함께 흥겹게 불렀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youtube에 해당 곡이 없어서  Dianne Reeves가 부른 Both Sides Now를 링크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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