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지음 / 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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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다니던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 과의 한 유명한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다. 여러 뒷얘기가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그 교수가 자신이 전공한 해당영역을 넘어서서 같은 과에 있는 다른 교수가 연구하는 분야까지 파고 들어가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강의를 개설하는 등 해서 급기야는 교수들간의 밥그릇 싸움에서 졌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 떠돌던 얘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학교 내에서 그런 교수들간의 기싸움(밥그릇싸움?)이 팽배해 있었고, 교수들 자체도 타교수의 학문분야에 대해서 가급적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었기에 어떤 뒷얘기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 칸트의 인식론을 배경으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여러가지 입장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다양한 과학적 인식의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회는 사회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는 경제학의 전유물이 아니며, 정치는 정치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영역 제국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경제학이 경제현상을 이윤추구를 위한 합리적인 행위라는 측면에서 관찰한다면, 사회학은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그리고 정치학이 정치현상을 권력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사회학은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것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유일한 차이점은 "다양한 거리두기에 상응하는 다양한 인식의도 사이의 차이이다."

짐멜의 글을 읽으면서 당시 학문풍토에 감탄하곤 했다. 물론 이 감탄은 짐멜에 대한 감탄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철학-역사-과학-경제학-미학-심리학-법학 등 모든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글을 보면서 당시 제학문간 미분화되어 있어 더욱 더 종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학문풍토가 한 없이 부러웠다. 토막날대로 토막난 요즘 학문 분과들 속에서, 그리고 그 분과 안에서도 또 세부적으로 쪼개져 마치 '밥그릇 싸움'하는 한국의 학문풍토에서 특히나 더욱 도드라진 특징처럼 다가왔었다.
이번 여섯번째 풍경(과 다음 일곱번째 풍경)에서 저자 김덕영 선생은 짐멜을 추적하면서 그가 영향을 받거나 거쳐간 학문분야를 살펴본다. 사회학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그의 글 중 이해하는 정도만 취사선택했던 나로서는 다섯번째 풍경과 마찬가지로 좀 버겁게 다가오는 논의들이 많이 있었다. 기본이 안되어 있으니 생기는 난독증이다. 쩝~  
매 풍경마다 강조되는 이야기이지만 짐멜이 사회 현상들을 관찰하는 그 준거는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식'들이다.

# 사회학의 인식대상
"굶주림도 사랑도, 탐욕도 노동도, 기술도 종교도 그 자체로서는 사회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이것들은-원인으로서 또는 목적으로서-개인에게 상호작용을 하도록 유발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인 그 무엇이 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상호작용은 짐멜에 의하면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된다. ... 형식이란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반복성, 규칙성, 고정성, 지속성 및 구조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 짐멜은 갈등과 협동, 지배와 복종, 투쟁, 분업, 상호관계, 적대관계, 병존관계, 동시관계, 연속관계 등과 같은 형식을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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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과 사랑, 탐욕과 노동 그리고 기술과 종교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내용으로서 생리학, 심리학, 역사학, 경제학, 윤리학, 미학, 종교사 등의 인식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사회학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식이다. ... 결론적으로 사회학은 사회화의 형식을 그 내용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분리는 어디까지나 인식론적인 차원에서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용없는 형식이 어디 있겠으며, 형식없는 내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추상적 차원에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고 그 형식을 살펴보는 짐멜의 사회학을 김덕영 선생은 '방법론적 형식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말은 쉬운 데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기하학과 문법의 예를 살펴보면 구체적으로는 아니라도 대충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 사회학은 사회의 기하학이 아니라 사회의 현상학이다
사회학은 "마치 기하학적 추상이 오로지 물질적인 내용의 형식으로서만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물체의 순수한 공간형식을 탐구하듯이", 그렇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학은 문법과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의 형식을 그 내용으로부터 추상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 이는 '순수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마치 문법이 언어의 순수한 형식을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내용에서 분리해내듯이 현상에서 귀납적이고 심리학적인 방식에 의해 그 자체로는 아직 사회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사회화의 내용과 목적으로부터 사회화의 요소를 추출해낸다.

내가 짐멜에 대해서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그의 글이 대단히 문학적이라는 점과 더불어,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그 속에서 인간 삶의 의미를 밝혀내려 했던 글들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전자나 꽃병의 손잡이를 가지고 논의를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지고 인간의 사회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곁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모두 나름의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대단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데, 그의 이런 종류의 많은 글들을 아직도 제대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갈증은 계속해서 쌓이기만 한다.

# 철학과 개별과학의 관계
기존의 철학이 주로 추상적인 공리에 입각해 존재 전체를 지향하고, 그것의 총체적인 구조와 본질 그리고 의미를 연역적인 방식으로 밝혀내고자 시도했다면, 짐멜의 철학적 사유는 돈, 유행, 모험, 연극, 풍경화, 성과 남녀관계, 죽음 또는 종교 등과 같이 일상적이며 일견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현상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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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짐멜은 동시대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설의 철학은 "이상적인 것"에서 출발해 "경험적인 것"으로 진행하는 독일 관념론과 정반대로 "사실 그 자체로"라는 기치 아래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이상적인 것"으로 진행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후설의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일전에 대학시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을 읽으면서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 뜬 구름잡는 용어들이며 설명들에 나는 책을 다 읽어가면서도 거의 실신 상태였다. 그 이후로 '철학'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난 본능적으로 머리속이 하얘지고 까마득해지곤 했다. 물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짐멜은 잠시나마 철학 소리를 듣고 흥분해 있던 내게 진정제 정도에 해당하는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철학과 경험과학의 관계를 짐멜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철학은 경험과학의 하한선과 상한선을 구성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실증적이고 단편적인 성격을 띠는 개별과학과 구분되며, 또한 동시에 이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개별과학의 하한선으로서의 철학이 구체적으로 말해 인식론을 뜻한다면, 개별과학의 상한선으로서의 철학은 개별과학이 다루는 대상이나 현상을 통해 총체적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의 심층적 본질과 구조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을 가리킨다. 따라서 철학의 이 두 차원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차안과 피안에 위치한다.

짐멜이 <돈의 사회학>도 아니고 <돈의 경제학>도 아닌 『돈의 철학』이라고 제목을 단 이유도 바로 돈 그 자체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하한점으로 분석해 들어가서 가치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가치를 측정하는 돈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형이상학적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짐멜의 진정한 매력 포인트는 바로 후자, 즉 현상(돈)에서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살피는 탁월한 능력에 있다. 짐멜의 논의대로 사회라는 것이 개인들간의 상호작용의 합이라면, 『돈의 철학』에서 그는 상호작용의 가장 대표적 상징물인 '돈'을 통해 인간과 사회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 형이상학-개별과학의 상한선
형이상학이란 경험과학적 분석의 소재가 되는 개별적이고 외적인 사물과 현상을 가지고 총체적이고 통일적인 시대의 세계상을 배경으로 해서 심층의 본질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이르는 인식행위를 일컫는다. ...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짐멜은 형이상학을 "세계와 삶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태도, 사물을 수용하고 그것을 내적으로 처리하는 하나의 기능적 형식과 유형"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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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인간존재의 목적인가 아니면 개인을 위한 수단인가? 사회는 개인에게 수단이 아니라 방해물인가? 사회의 가치는 기능적 삶에 있는가 아니면 객관정신의 창출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개별인간에게서 불러일으키는 윤리적 특성에 있는가? ... 어떻게든 전체의 형이상학적-종교적 의미가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개인의 영혼에게 맡겨지는가?"

나는 위의 짐멜의 인용구를 읽으면서 '사회'라는 어떤 개별 상호작용들의 무수한 합 보다는 그 상징물인 '돈'을 집어 넣어도 위 문장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 또는 돈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 과연 화폐가 처음 만들어지고 사람들간에 퍼져나갔을 때의 그 수단으로서의 편리함('물물교환'의 고통스러움을 생각해보라)으로 우리는 돈을 바라보고 있는가? 결국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짐멜은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도된 현상을 비극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니체와 달리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인간 영혼의 성장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는 낙관을 하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김덕영 선생은 짐멜의 저술이 사회학이라는 개별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다루어지는 것은 확실히 문제라고 지적한다.

# 『돈의 철학』-사회학이냐 철학이냐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은 전형적인 "시대철학"이다. 여기서 돈은 일상적 삶에서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으로서 현대세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매개물의 기능을 수행한다. ... 인간의 인식행위를 규정하고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외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라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주체의 유의미한 입장과 태도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이라는 개별학문과 철학에 대한 짐멜의 발자취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이 풍경에서 또 하나 짐멜을 말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는 학문으로서 미학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위에서 후설의 현상학과 짐멜의 철학을 연관시키면서 기존 철학과 구분지어 설명한 것은 어쩌면 김덕영 선생이 짐멜이 종국적으로 미학의 영역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점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에움길이 아니었을까?  바로 구체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미학이기 때문이다.

# 철학적 인식수단으로서의 미학
전통철학은 "저 공허한 보편성과 추상화"를 수단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을 개념적인 또는 순전히 외적인 통일성"안으로 강제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한다. ... 따라서 짐멜이 보기에 "문제를 한정적이고 작게 만든 다음, 이를 총체성과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키고 이행시키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론적 대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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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철학에 비해 다음과 같이 커다란 장점을 지닌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언제나 개별적이고 좁게 한정된 문제, 즉 한 인간, 하나의 풍경, 하나의 분위기를 택해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키고 광대한 세계감각을 첨가함으로써 거기서 풍요로움과 보시, 말하자면 부당한 듯이 보이는 커다란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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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미학적 접근방법을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성, 우연적인 것에서 법칙성 그리고 외적이고 일시적인 것에서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통찰하는 방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 예술작품에서는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개별적 부분이나 요소라 할지라도 작품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바로 이를 통해 미학적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김덕영 선생은 짐멜이 이러한 미학적 방식을 통해 가장 흔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을 통해 '현대 문화의 전체상'을 그려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깐 그의 '돈의 철학'은 '현대세계의 총체적 예술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계를 그려낸 예술작품에 오랜 동안 매료되어 왔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인가? 렘브란트의 그림에, 고흐의 그림 속에서, 피카소의 그림속에 사람들이 빠져들고 매료되듯 말이다. 하지만, 내가 고흐의 그림, 렘브란트의 그림, 피카소의 그림들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몇 년 동안을 이 짐멜의 저작 속에 빠져 있었지만 아직도 안개속을 헤집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면서 그의 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있지 않은가! 김덕영 선생이 설명해 나가는 내용들도 이젠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렇게 풍경을 옮기면서도 너무 버거움을 느낀다. 내가 과연 열한가지 풍경을 모두 이 블로그에 실을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어진다. 다음 풍경 또한 내가 짐멜의 글을 읽으면서 수없이 혼란스러웠던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이니 더욱 까마득해진다. 설익은 과일을 으적으적 씹고 맛있다고 억지로 표정짓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소화되지 않은 내 어설픈 이해의 시도들이라고 할 지라도, 아직 이 풍경의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어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짐멜의 철학에 대한 논의, 미학에 대한 논의를 어렴풋이나마 살펴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진다. 이후 짐멜의 글뿐만 아니라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김덕영 선생의 이 글들을 다시 곱씹어 볼 기회가 있으리라는 오기가 생긴다. 그래 일단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 미학적 사회학?
개별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은 근본적으로 경험적-실증적인 접근방법에 의존한다. 사회학적 인식은 단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실증적 경험과학의 본질이요 숙명이다. 이에 반해 미학은 외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을 발견하고 단편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통찰하는 인식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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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식의 과제와 목표를 가진 다양한 인식의 형식과 범주를 엄격히 구별하고 동시에 이들의 분업적 공동작업을 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짐멜이 사회학, 철학 및 미학을 인식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독특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는 짐멜이 반사회학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학 그 이상을 추구했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이렇게 나의 무지를 솔직히 드러내고 편히 읽으니 이 풍경의 결론 부분이 훨씬 맘편하게, 쉽게 다가온다. ^^

함께 듣는 음악은 Ben Harper의 『Burn to Shine』(1999)앨범 중 7번 곡 'Steal my kisses'이다. 무지함으로 답답한 데 음악이라도 흥겨워야 살 것 같다. ^^;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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