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병용 | 그림 류연복(판화) | 출판사 거름(2008)


2008년이 내 기억속으로 흘러갔습니다.
지난 년말 각종 뉴스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서도 슬픈 소식을 많이 접했습니다. 
'많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전이의 강도가 쎈 소식들이었죠.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후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밤 늦게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그 소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말 해맑게 잘 웃던, 그만큼이나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곤 하던 후배 녀석이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혼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3년 전 이었나요? 
첫 애 돌이라고 잔치한다고 오라고 전화를 받았을 때, 우리 아이는 눈큰이 뱃속에서 제법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을 때였죠.
눈큰이와 함께 찾아간 돌잔치에서 환하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느 누구라도 애정 없이 허투루 대하는 녀석이 아니었기에 자식사랑이 얼마나 깊었을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그 녀석이 작년 년초에 친권을 포기한 이혼이라는 걸 했다고 하니 그 생이별을 해야 하는 엄마된 마음을 내 감히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강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 후배가 그 동안에 겪었을, 그리고 지금 이 춥고 삭막한 계절에도 겪고 있을 마음고생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도무지 기댈 벽이 잡히지 않을 깜깜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 지 생각하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슴 속이 답답해져 옵니다.

# 연민의 발견
엄마품을 애타게 찾는 아기와 순진한 엄마의 슬픈 눈빛이 자꾸 아른거려 가슴이 뻐근해온다. 함께 있어야 할, 떨어져서는 안 될 생명들이 찢겨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한꺼번에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줄기 희망이다.
               - 김지하, 「생명」중에서

마음이 어수선하던 차에 위드블로그에서 진행중인 이벤트 서적들 중 고른 이 책  (울고 싶은 그대를 위한)『마음병원』에는 신기하게도 헤어진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와서,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의심까지 했었어요.
그들의 갈등은 맨 처음 경제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에게 그들의 이혼소식을 알린 한 후배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언젠가는 전화를 해서는 '아이 분유값이 없다'고 울며 하소연을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작년, 아니 재작년 한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어쩌면 내가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랬던 그들이 돌이 갖 지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점점 갈등이 심해지고, 종국에는 헤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사연을 듣는 나는 무척이나 괴로왔습니다. 정작 아버님을 떠나보내며 슬픔에 겨워하고 있는 후배에게는 등 한 번 제대로 토닥여주지도 못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면서도 그 후배, 그리고 본능적으로 엄마품을 애타게 찾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심하게 아려왔어요.
지금도 그 소식을 듣고 한 달이 지났지만, 난 그 후배를 대하기 두려워 전화 한 통 건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마음 속으로 '잘 이겨내기를' 하면서 먼 거리에서 그냥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있죠. 그 후배가 서러움에 울음을 쏟아내면 어쩌나, 괜히 잘 이겨내고 있는데 내가 전화해서 위로랍시고 상처를 들 쑤시면 어쩌나 등 여러가지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만들어내면서 말입니다. 



책에 대한 리뷰 첫머리를 이 가슴아픈 사연으로 시작하려니 글이 쓰여지지가 않네요. 이 책의 부제는 '울고 싶은 그대를 위한'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책에서 어떤 위로를 받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이런 전이된 슬픔에 대해 이 책이 잠시나마 손을 집거나 등을 기댈 정도로 옆에서 위로해줄 벽이 되어 주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작년 11월 즈음에 읽었던 한 책에서 우리는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인 것마냥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는 자세보다도 그 누군가의 말 속에서 허점을 찾아내는 방식의 글읽기와 글쓰기, 듣기와 말하기를 너무나도 익숙하게 배워왔다고 주장하는 글이었죠. 
정작, 사람과 사람간의 신뢰를 쌓기위한 가장 기초적인 '잘 듣기, 공감해 주기'에 대해서는 너무 서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내는 것 또한 어렵게 여겨지게 된 것이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소통을 가로막는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과 함께 진정한 소통을 위한 첫 출발점으로 '끝까지 들어주기'를 제안했던 그 책의 구절이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우선적으로는 책을 읽을 때, 버릇처럼 문제점을 지적하는 그런 읽는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공감해주고, 그 속에서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는지를 찾는 데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죠. 물론, 오래된 나의 그 책읽는 습관이 쉽게 사라지겠는가마는 그래도 열심히 노력중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아쉬운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어요.
이 책은 그렇게 슬픔을 깊게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그래서 '울고 싶은 누군가를 위한'  '마음 병원'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어요. 마음병원에 들어가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았다기보다는 마음병원 앞에 세워진 마음병원 진료과목과 그에 대한 간략설명을 안내판으로 읽은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오히려 책을 읽고 느껴지는 상징적인 인상은 이 작가가 끝없이 천천히 길을 걷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의 희망으로 보듬어내려는 작가의 감수성이 돋보입니다. 그러니 만일 나보고 책 제목을 지으라고 했다면 주제넘게도, (지친 우리가 만나는)『길 위에서』정도가 이 글들과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
이 책은 장병용 등불교회 목사가 읽은 책, 만난 사람들, 걸으면서 느껴진 단상 등 일상에서 누구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렇지만 쉽게 감지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작은 파동들에 대한 글로 엮여져 있습니다. 난 사실 이 책을 읽을 때까지 장병용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지 못했어요. 책에 소개되어 있듯이 그는 '오랜 세월 소외와 고통의 질곡을 헤매는 이들의 벗으로 살면서, 섬세한 감수성으로 자신의 삶과 타인의 영혼에 촉촉하고 은밀한 기쁨을 전하는 글'을 쓰는 장애우를 위한 교회 목사이자, 시인, 수필가입니다. 그의 여러 과거 이력(어렸을 적 가난으로 여동생이 죽은 일, 아버지에 대한 아픈 회상 등)에 대해서 이 수필집에서 간간히 전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그만이 아닌 우리 아버님, 어머님이 함께 겪었을 동시대적 슬픔 같은 것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제8요일의 시간
나에게는 하반신 장애자로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도 아주 맑고 순수한 어린 왕자 같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참으로 예술과 예수를 진실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던 장애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장문의 유서를 내 앞으로 남기고 여주 남한강 대교에서 뛰어내려 한 많은 인생을 마쳤다.

그토록 노력해왔지만 세상은 내가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곳인가 봅니다. 이제 그만 나의 지친 육체를 쉬게 해야겠습니다. 내 마음 한복판에 깊이 뚫린 상처를 메울 길이 없어 나는 이렇게 죽어갑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나의 잘못입니다. 다 나의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가엾은 영혼을 거두어주시고 품에 안아주실 줄 믿습니다….
......
내 목회는 한 장애인의 서러운 눈물과 한을 운명적으로 가슴에 끌어안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작년 말에 회사 동료들 몇몇과 함께 용산에 있는 저소득 가정을 위한 어린이집을 방문했었어요. 첫 방문은 아니고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그 곳을 운영하는 선생님으로부터 거의 최악의 상황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경기침체로 지원도 많이 끊겼지만, 무엇보다 정부 지원창구가 막혀버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죠. 적은 예산이 저소득층들에게는 그나마 삶을 견뎌낼 최소한의 안전핀 역할을 하였는데, 그나마도 생존을 위한 최저 비용마저 줄여버리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그들에게 더욱 가혹한 한 해가 될 것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이들마져도 내 마음속 안타까움의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바로 안타깝게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비롯한 그곳 민중들의 신음소리가 온종일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피 범벅이 되어, 당황해하는 어른들 품에 안겨 놀라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접하고 있노라면, 막무가내인 이스라엘을 향산 분노보다는 '차라리 차라리... 그들을 고통없이 거두어주시옵소서'라는 끔찍한 기도문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


오늘도 하루종일 이스라엘의 만행은 계속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눈을 떴어요. 그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회사 몇몇사람들과 함께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했죠. 그러나 그런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전이되어 오는 이 끔찍한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오래 전 핍박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불리워졌던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의 처절한 기도가 저절로 읊어집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 광기 狂氣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존 인물 조르바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 카잔스키는 조르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를 전해주는 껄렁한 노동자였다.

......
"당신은 전부 갖추었는데 광기가 없어요", "광기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자유를 찾지 못하죠"라고 양고기를 물어뜯으며 이죽거리던 조르바의 말이 섬광처럼 다가와 내 안에서 번뜩인다. 

촛불집회 때도 그랬고, 난 언제나 그랬어요. 그래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읽는 가운데 나오는 막노동꾼 김씨에게서, 그리고 이 책에 인용되는 조르바에게서 그 본연의 자아의 표출을 대할 때면 경외감마져 느껴집니다. 지면상에서나마 분노를 여과없이(이것도 엄청난 여과이겠지만) 표출하지만, 실상의 나는 죽은자를 떠나보내는, 아이와 헤어져야 하는 이들의 슬픔과 이들의 아픔, 이들의 분노에 여과없이 공감하고 함께 하지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심정적 동조자로서, 그들과 함께 섞여있지만 늘 거리를 두고 있는 방관자로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목마릅니다. 늘 세상에 뿌리박지 못하고 겉돌며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갈증이 생깁니다. 이 책에 대한 실망은 이 책의 내용 또한 적정한 선에서 멈추어버리는 것입니다. 슬픔을 진정 어루만져 줄 수 있는(그것이 광기이든 아니든간에) 무언가가 빠져있는 느낌입니다. 아마 장병용 목사 또한 이러한 갈증 때문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죠.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시간은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무엇일 수도 있고, 혹은 그냥 나도 모르게 내 육체와 정신을 스쳐 지나가는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내 머리에는 이제 뽑기를 포기한 흰머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나의 부족함과 갈증을 메꿔나가고자 하는 노력은 올 한 해도 계속 될 것입니다.
 
# 더불어 아름다운가
얼마 전 한 부부로부터 『반짝이고 글썽이는 것들』이라는 시집을 선물 받았다. ... 그들은 ... '장애우 평등학교'를 세우고 있었다. ... 그 부부는 이 일을 위해 매일매일 자신들에게 이렇게 묻기로 약속했단다.

아름다운가.
나 이외의 사람에게도 유익한가.
우리가 즐거이 해낼 수 있는가.

이 책에는 작가 장병용 목사 주변의 따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읽었던 책과 시 중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엑기스를 뽑아 인용해 놓았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나로서는 그 글들을 다시 인용하면서 한 해 동안의 내 다짐들을, 바람들을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더불어 함께 함으로 이루어진 이 짧막한 세 질문을 조심스럽게 따라 읽어 봅니다. 난 그리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직장인으로서,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그리고 이 세계의, 자연의 한 일주체로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을 때 이 질문 중 하나라도 답할 수 있다면 그 날의 시간은 복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눈을 뜨면 아름다운 세상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눈뜬 친구들을 향해 이런 충고를 한다.

당신들의 눈을 쓰되 '내가 만일 내일부터 장님이 된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보면서 살까?'하는 심정으로 인생을 살아보세요.

그러기에 올 한해는 누구를 비판하고, 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자제할 생각입니다. 사실 이런 나의 생각의 변화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난 년말 책을 읽다가 다짐했던 조금은 해묵은 다짐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을 때도,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도 문제점을 먼저 찾듯이 보고 듣지 않고 일단 충분히 공감할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회사 생활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최근에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건 아니죠!" 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때가 있어 눈큰이에게 주의를 받은 적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만일 내일부터 장님이 된다면... 음... 안토니오 얼굴을 하루 종일 볼까요? ^^;

#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어둑한 겨울을 거슬러
성큼성큼 해를 찾아가는
눈 맑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가슴속에 고운 씨앗 하나 품고 있는
가슴속에 빛나는 칼 하나 마련해둔
그대는 지금 어느 들을 걷고 있는가.
멀리 개 짖는 소리 그치지 않고
어둠을 삼삼오오 몰려다니는데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어딜 갔는지
아아, 살고 싶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 백창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작년 말부터 내가 직장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너무 안주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년말 즈음해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나름대로 이리저리 강의나 교육엘 부지런히 찾아다녔죠. 직장내에서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평을 하고 험담을 하는 문화가 나는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인 것 마냥, 회사가 세계의 중심인 것마냥 좁은 틀 안에 갖혀 있자니 그 지긋지긋함이 나의 마음을 좀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강사들을 만났고, 또 길을 찾아,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와 비슷한 많은 이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자고 으쌰으쌰하는 과정에서는 정작 발을 떼고 말았어요. 너무 큰 일을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난 우선은 서로의 마음과 갈증에 대해서 조근조근 이야기 해나가며 같이 공감할 사람들을 찾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같이 무릎을 치며 '이거다!' 하는 일들(그것이 아무리 작고 하찮을 지라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누군가 이미 틀을 짜놓은 판에 손발만 움직여 주는 그런 방식으로는 내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어요.
올 해에도 내 계획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겁니다. 안토니오가 서울로 올라와 함께 하게 되면 그럴 기회도 적어지겠지만 눈큰이와 함께 부지런히 좀 더 시간을 쪼개서 정말 뜻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 하나 만나고 싶습니다. 작년보다 더 자주 발품을 팔고 더 열린 자세로 듣고, 더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말하리라.   

# 틱낫한의 평화로움
탁닛한의 대표적인 명상법은 걷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홀로, 또는 여럿이서 천천히 걸으라.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걷기 위해 걷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 위함이다. 모든 걱정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걷는 동안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면,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걸음도 평화롭게 내딛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유독 걷기에 대한 예찬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글들이 걷는 가운데에서 얻은 영감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장병용 목사는 끊임없이 자연 속 산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 걸음 걸음마다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할 자연의 벗들이 그와 함께 합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자연 속에서 모든 마음을 탁 탁 비우고 걸을 때 다시 채워지는 이 신선한 에너지들을 나도 느끼고 싶었죠. 어쩌면 옛 현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먹고, 자고, 걷는 것만 제대로 하면 내 마음의 동요도 가라앉고 새로이 세상과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신호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습니다.

# 초록빛, 그 환한 생명의 자리
녹색 운동의 선구자요,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자이며 은둔 시인으로 활동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 『월든』이란 책에서 그는 자신이 숲으로 들어간 까닭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오로지 내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생의 지극히 본질적인 것들만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내 스스로 삶의 참모습을 찾아내고 싶었다. 죽음을 맞을 때, 내가 산 삶이 참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슬픔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인생의 골수를 취하는 것, 강인한 스파르타 사람처럼 참삶에 속하지 않는 것을 모조리 때려 엎는 일이었다.

한 달 전 쯤이었나요? 눈큰이가 혼자 일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미안했는지 나에게 '선배도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다녀와! 내가 허락해 줄테니'라고 말했었죠. 그 때 나는 '다리 다 나았을 때 나 혼자 산에 다녀오고 싶어'라고 대답했었죠. 항상 산에 오를 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철저하게 혼자인 '나의 참모습'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컴컴한 숲 속을 오르다가도, 잠시 바위에 몸을 기대 쉬다가도,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도 찾아오곤 했었어요. '도대체 나란 놈은 어떤 넘인가?'라는 너무 근원적인 질문, 그래서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해대며 계속 고개를 숙이고 나를 혹사시키고는 했었는데 잠깐이지만 그렇게 산을 타고 내려오면 그런대로 자신감도 생기고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내가 산 삶이 참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슬픔'이 충분히 예견되는 이 생활에서 올 한 해 그런대로 최선을 다해야 겠죠. 그래서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만 있다면... 어느 경지에 올라서야 저렇게 당당하게 '인생의 골수를 취'했다고 '참삶에 속하지 않는 것을 모조리 때려 엎'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요.

우연히 위드블로그를 통해 읽은 이 책 『마음병원』을 통해서 대부분은 저자가 인용한 또 다른 인용문을 통해서지만 한 해 큼직한 포부 몇 가지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은 역시나 행운이었습니다. 하나의 블로그 글 속에서도 내 감정이 이리 요동치는 이유는 그만큼 나와 함께 숨쉬고 있는 세상이 사람들이 아파서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 또한 어찌 해 볼 수 없이 이리 마음만 동동거리는 것 또한 이제 나이 40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참 창피한 일이지만 뭐 그게 나이니 어쩌겠습니까? ^^;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 줄 쳐가면서 정작 시는 못 외우면서 '여기서 당신은 조국을 뜻한다' 등과 같은 참고서에 나와 있던 내용들을 달달  외워가며 읽었던 한용운의 시 인용구가 자꾸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옮겨봅니다. 하나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관계들 중 하나라고 봤을 때, 오늘 우리는 불행합니다. 왜냐구요?  ...

# 항복하면 행복하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한용운, 「복종」중에서



함께 듣는 음악은 Phil Coulter의 『Lake of Shadows』(2001)앨범 중 10번 곡 "The Year of French"(프랑스에서의 시절)입니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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