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저자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도런스 켈리, 숀 켈리 지음
출판사
사월의책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들 현대인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앞으로 고도의 문화를 가진 어느 시적인 민족이

그들의 타고난 권리로써 옛날의 쾌활한 오월제 신들을 불러내어,

오늘날의 이기적인 하늘 아래, 신들이 사라진 언덕에

그 신들을 다시 앉힌다면, 거대한 향유고래는 틀림없이

제우스처럼 높은 자리에 군림하게 되리라

 

허먼 멜빌,『모비딕』에서 (9쪽)

 

 

# 1장 선택의 짐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순간만다 선택의 무자비한 파도에 직면하며, 그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삶은 확실한 것, 주저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삶은 극한에서조차 주저와 미결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최종 선택을 내림으로써 그런 상황은 절정에 이르곤 한다. (18쪽)

......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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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짐은 특히나 현대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신 혹은 신들을 믿지 않는 세상,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신성불가침한 존재도 없는 세상에서 증식한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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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행동의 원천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힘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힘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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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존재를 놓고 볼 때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행동들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어떤 근거로 나는 이 선택을 하는가?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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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더 깊고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올바른 행동 과정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을 좋은 삶을 위한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판단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서, 다른 행동이 아닌 바로 이 행동을 선택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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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 즉 현대인들은 실존의 기본 문제들에 대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던 문화 속에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 중세의 신은 실존적인 문제들을 묻기도 전에 답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런 역할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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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종교와 정신주의의 극단적 증식-전도 활동이나 명상 수련 따위의 폭발적 증가-을 현대의 주요 특징으로 본다. 그럼에도 특정한 해답을 다른 해답보다 더 우선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들이 분명히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허무주의nihilism라 부를 만한 것이다. 니체는 '허무주의'야말로 신이 죽은 다음의 우리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46쪽)

 

 

 

#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oster Wallace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였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정신일 것이다. ... 1991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래리 매캐퍼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어두운 시대에서 좋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고 빛을 내는 인간적이고 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가해주는 그런 예술일 겁니다. 어떤 소설이든 하고 싶은 대로 어두운 세계관을 가질 수 있지만, 정말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비춰주는 소설일 겁니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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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란 우리가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과제에 대해 충분히 오래도록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이 문제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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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딜 수 없는 이유는 '머리'에 있었다. 현재 속에서 견디지 않고, 벽을 뛰어넘어 정찰을 한 다음 견딜 수 없는 소식, 하지만 어쨌든 믿을 만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머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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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나 권태, 불안이나 분노가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그 속에서는 단 일초도 살 수 없게 느껴질 때, 그런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하여 살아있는 지옥으로 화할 때, 우리는 달리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럴 땐 오로지 현재 주위에 벽을 치고 전적으로 그 속에서만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짓누르는 권태가 열쇠인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 권태를 이겨냄으로써만 선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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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는 2005년 케니언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고 그해 졸업식 연설을 했다. ... 졸업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현실들은 종종 보고 말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입니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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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경험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뽑아낼지를 충분히 의식적이고 자각적으로 선택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런 선택 능력을 훈련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겁니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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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권태가 아니다. 이런 선택이야말로 월러스가 전하고자 했던 실제 가르침이다. 세계를 성스럽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경험―의지와 노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하려는 선택은 우리의 힘으로써만 해낼 수 있는 선택이다. 그것은 힘과 용기와 인내심을 수반하는 선택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영웅주의까지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월러스는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가능한 것 이상으로 오늘날의 세상에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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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삼의 모든 상황에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비결이었다. 어떤 것이 성가시고 비참한 것으로 자동 경험된다 해도, 생각을 조절해서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도록 자신을 강제하는 방법을 찾는 비결이었다. 개인의 순전한 의지력만으로 말 그대로 "더 행복한" 의미를 찾아내는 비결이었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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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양 문화는 부분적으로 신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반응들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합당하게 이끌어주는 의심할 바 없는 단일한 덕목 체계 ―유대-기독교적 덕목체계―가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공적으로 나눠가졌던 문화가 사라진 데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암묵적 가정이 퇴조하고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보편화됨에 따라, 유대-기독교적 원리가 모든 문제에 타당하다는 주장도 자명성을 잃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했듯이,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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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이후에도 훌륭하게 살아가는 개인에 대해 니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적절히 용인되는 행동만을 하는 한 이 자유로운 영혼은 어떠한 외적 규범의 강제도 받지 않는다. ... 그러나 월러스의 세계에는 이런 즐거움조차 없다. 오히려 무거운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짐이 너무 과한 나머지 어떤 인간 영혼도 완수할 수 없는 책임 말이다. 그것은 신 자신이 한때 행했던 무로부터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무로부터 행복한 의미를 구성할 책임이요, 이를 통해 무의미와 신 없는 세계의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날 책임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신이 되라는 요구나 다를 바가 없다.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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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는 실존의 "성스러운" 순간들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에 감사할 이유도 전혀 없다. 월러스가 추구한 행복은 황홀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단테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일신주의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로지 개인의 의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월러스의 관념은 신성함이 개인의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전통적 관념과는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단테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개인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고 신의 의지에 맡길 때만 비로소 황홀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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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니체는 우리가 충분히 이런 기획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다.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즐거움을 안고 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니체는 우리들 각각이 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실존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었다. 니체는 일종의 무한한 자유를 실존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었다. 니체는 일종의 무한한 자유를 생각하고 있었던 셈인데, 열린 바다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고, 견고하긴 하지만 우리를 속박하는 육지를 '버려진 부두다리'에 비유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육지를 버렸고 이미 출항했다."

 

 우리는 뒤에 남겨진 부두다리조차 불태워버렸다. 실로 우리는 멀리 떠나왔으며 남겨진 육지조차 파괴해버렸다. (…) 육지가 더 많은 자유를 줄 것 같아 향수를 느낀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육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육지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외적인 강제력이나 견고한 토대에 의존해서만 실존적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니체의 관점에서는 강인한 사람이 아니요, 무한한 자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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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에 대해 길버트는 본질적으로 루터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남김없이 그리고 자주 고백을 함으로써 영혼을 순결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젊은 루터가 아니라, 계시를 받은 이후의 루터, 즉 구원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선함을 이룰 수 없다고 믿은 루터 말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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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받은 계시―즉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고, 고백의 선한 행위나 기타 순수성의 표식에 대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신의 은총만이 간지奸知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초점을 돌리는 시각―는 종종 "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그때까지의 성서적 해석을 바꾼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즉 중세 가톨릭에서 그랬듯이, 신이 우리의 영혼을 응시하고, 우리가 얼마나 지고한 순수성을 성취했는지를 봄으로써 우리를 판결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정의 관념을 바꾸었다는 설명이다. 후기 루터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 상관없이 사랑을 베풀어주며, 그런 사랑으로 우리의 실존을 정당화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신의 은총에 관해 개인이 좌우할 수 있는 부분은 전무하다. 우리는 순수하고 수동적인 수용자일 뿐이다. 길버트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가란 자신의 천재적 영감을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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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이것이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104쪽)

 

 

 

#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세계

우리들 현대인은 내적인 자기응시에만 익숙한 나머지 우리의 정조들moods을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만 간주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내적인 경험과 신념을 통해서 이해하기보다는 널리 공유된 정조들에 휩싸여 사는 존재로 간주했다. (112쪽)

* 정조들 moods: 하이데거 철학의 'Stimmung'개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기분, 분위기, 느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 역시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나아가 진리를 드러내는 주요 통로임을 말해주는 용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정조는 인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것으로서 단지 공허하고 변덕스런 기분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특정 상황을 드러내는 존재의 목소리Stimme. 저자들은 이렇듯 하이데거를 원용해서, 정조가 한 사람의 행동을 즉각적으로 결정하는bestimmen 힘의 원천이자, 오래전부터 공유되어 온 문화의 감성적 측면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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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그 순간 가장 문제시되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적이고 열정적인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정조들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신들이다. 신들은 각기 상이한 정조들을 비춰주며, 역할이 어긋났을 때조차 왜 상황이 어긋났는지를 밝혀준다.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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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삶이란 이런 신들과 동조sync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호메로스의) 신들을 조율자라고 부른다면, (…)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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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며, 허무주의적인 실존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아레테arete 개념, 즉 삶에서의 탁월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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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아레테를 "덕virtue"으로 읽는 표준적 해석방식은 오늘날의 생각을 거거에 소급 적용하는 독서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덕"을 통해 그리스적인 인간 탁월성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단어에서 기독교적 의미나 심지어 로마적인 의미를 연상한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탁월성은 겸손이나 사랑 같은 기독교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요, 인간 의무의 준수라는 로마의 스토아적 이상 역시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 호메로스 세계에서의 탁월성이란 결정적으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니체는 호메로스적인 탁월성이 근대의 도덕적 주체와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음을 처음으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호메로스 시대에는 고결한 전사가 보여주는 극한적인 힘을 통해서 숭고함의 개념을 이해했다. 이런 니체식 독법으로 보면, 유대-기독교적 전통이야말로 탁월성에 대한 호메로스식 이해를 약화시킨 주범이다. 고결한 전사의 용기와 힘을 양의 유순함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말이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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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녹스Bernard Knox가 강조한 것처럼, 아레테는 어원상 그리스어 동사 "간청하다"araomai와 관련이 있다. 즉 호메로스의 인간 탁월성 개념은, 그 문화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것과의 적절한 관계맺음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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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시대 그리시인들이 보기에, 신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들이었다. ... 즉 성취한 것 전부를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최선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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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세속 시대의 허무주의는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처럼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저것 아닌 바로 이것을 택해야 할 아무 근거도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짐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세속 시대의 중심 질문은 어떻게 이 짐을 덜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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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삶의 탁월성을 실존의 핵심 사실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데 실존의 핵심이 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이런 감각이야말로 감사의 느낌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요소이다. 어떤 삶을 감탄스런 것으로 보는 호메로스적 이해의 중심에는 이런 감사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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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통제를 벗어나 일어난 사건이 내게 바람직하게 돌아갔을 때, 거기에 완전히 무심한 것이 더 나을까?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느끼는 감사야말로 더 적절한 반응이라 보고, 그것을 육성하고 높이 평가하는 게 더 나을까? 우리 자신에 대한 두 관념 중 어떤 것이 더 육성할 만한 것일까? 우리들 저자는 감사가 더 나은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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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의는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고도 적절하게 갖게 마련인 감사의 느낌을 제의에서 서로 나누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희생 제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사의 느낌을 아직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느낌을 이미 가진 사람들에게는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법이었다. 희생 제의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었다. 때맞춰 정기적으로 열리는 희생 제의는 감사를 표현할 기회일 뿐만 아니라 그런 감사를 유발하기도 한다. ... 우리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행동하도록 만드는 존재에 대해 인지하는 것, 그것에 대해 놀라워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인간 탁월성의 최고 형식이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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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잠은 행동하는 순간과 구분되는 비어 있는 삽화다. 잠들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잠은 인간의 조건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따금 신들이 인간을 방문해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주고, 인간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불안을 가라앉혀서 다시 신선한 욕망을 불어넣어주는 것도 바로 잠을 통해서이다. 호메로스에게 있어서 잠은 일종의 계율이다. 왜냐하면 잠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꼭 이룬다는 보장이 없는, 그런 행동의 표준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보기에 잠은 인간을 가장 잘 특징짓는 현상이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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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grace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리스charis이며, 이것이 영어 '카리스마'의 어원이다. 문자 그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은총 내지 재능의 선물로 호의를 입은 사람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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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관념으로 볼 때, 인간의 행동이란 바로 인간 주체가 책임져야 할 행위이다. 20세기 중엽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그의 신존주의 철학을 통해 이런 생각을 논리적으로 확장시켰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중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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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때 우리의 행동은 마치 외부의 힘에 의해 내부로부터 솟아난 듯이 보인다. 즉 일들이 최선의 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모습을 스스로 가질 때, 여러 사람이 마치 한 몸인 양 착착 맞춰 일할 때,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며, 절로 감사가 우러나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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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내적 상태를 응시하는 오늘의 기술들 덕에 우리는 내면을 거쳐 완벽하게 사유된 것들만을 최상의 인간 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우리는 '정조'에 대해서도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사적이고 내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향한 텅 빈 머리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내적 체험이라는 발상은 그들에게는 놀랍고 기이한 것이었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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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아주 명백한 것으로 여기는 내적 삶에 관해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 꿈, 느낌, 그리고 특히 정조는 호메로스의 그리스인들에게 개인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공적으로 공유하는 것으로서, 폭풍 속의 빗방울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공유된 정조에 휩싸여 있다고 느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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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들이 만신전을 형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신들은 저마다 특정한 정조를 비춰주며, 그 정조를 지키려는 의식儀式들 일체를 뒷받침해준다. ... 최고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세계를 규정하는 이들 정조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해 온몸을 열어 잠시 동안 휩싸이거나 붙들리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단일한 신이 아니라 신들의 만신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밑바탕의 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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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바람직한 일들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보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들과 마주쳤을 때 경이와 감사의 마음을 키우는 것, 이것들 모두가 잘 사는 삶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 같은 경이와 감사의 능력을 우리 자신 속에서 함양할 때, 우리는 신들의 변함없는 초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52쪽)

 

 

 

# 4장 유일신의 등장 - 아이스킬로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19세기 초 헤겔 이래로 서양의 역사는 서양의 역사는 어쨌건 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와 이후 시대야말로 이런 발전의 정점에 이른 시대라고 배워왔다. 자유의 자기충족성, 이성의 투명성,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반대편에는 또 다른 전통적 이야기도 존재한다. ...  자유의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의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생기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퇴보를 가리킨다는 시각이다.  ... 호메로스 시대에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던 세계의 경이로움이 차츰 희미해진 과정으로 이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역사는 신들을 상실한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무시해온 역사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들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우리 자신을 닫아버린 역사라는 얘기다.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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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살았던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 호메로스의 올림포스 신들이 지닌 행복한 다양성은 아이스킬로스의 세계에 와서는 더 이상 중요성을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보다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두가지 화해할 수 없는 입장의 대결이 더 중요해졌다. 새로 등장한 올림포스 신들이 그 중 한 입장을 대변했고, 더 원시적이고 오래된 복수의 여신들이 다른 한 입장을 대변했다. ... 새로운 신들은 모두 아폴론 같은 이성적 존재로 표현된다. 공평하고 보편적인 이성에 대한 아폴론의 열렬하고도 일관된 믿음은 호메로스 신들의 다양성을 대체한다. 더구나 각 그룹은 통일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보편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옛날 신들이건 새로운 신들이건 모두 정의에 대해 한 가지 이해만을 갖기를 요구한다. ... 옛적 신들인 복수의 신들은 모두 여성들로서 무엇보다 가족의 가치를 신봉한다. 반면 새로운 신들은 대부분 남성들인데, 개인, 가족, 도시 등 어떤 대상이건 예외없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을 대변한다.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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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는 대지와 피의 여신들을 억압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만 특권을 주었다. 즉 인간 감정의 위험한 측면을 직시하기보다는 비방만 했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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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킬로스에게 제우스는 더 이상 만신전을 관장하는 인격화된 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가 『오레스테이아』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과 새로운 올림포스 신들처럼 어떤 문화적 추동력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대신에 제우스는 이런 모든 힘들을 가능케 하는 근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행위들의 근거가 된다. ... 다시 말해서 제우스는 감춰진 배경으로서 그 자체로는 재현 불가능하지만, 문화의 모든 의미심장한 관례들과 실천들을 지탱해주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성스러움에 관한 매우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생각으로서, 특히 유대-기독교적인 신 관념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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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하는represent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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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이 하는 일이란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의 작동은 성스러운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그 작동을 통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길을 인도받는다.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런 방식으로 예술작품들은 신이 맡았던 전통적 역할을 대신해왔다. 예술작품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권화權化로서, 사람들의 삶에 의미와 목적이라는 빛을 비춰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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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문화가 최상의 빛을 발하려면, 그 문화를 명료화articulate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스킬로스 같은 시인은 자신이 살았던 아테네 세계를 명료하게 밝혀주었다. 시인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게티스버그의 링컨, 링컨기념관 앞의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정치가들 역시 자기 시대의 문제들을 명료화했다. 칸트 같은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 역시 자신의 문화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해설자들articulators은 그 문화에서 의미있는 것에 주목하게 해주고, 그것을 다시 새롭게 만든다. 그들은 그 문화에서 중요한 것,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모두가 그것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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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력한 신들은 실제로 세계를 변형한다. 즉 낡은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꿔버린다. 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은 바로 이런 변형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단지 명료화라고 말할 수는 없고 문화의 재설정reconfiguring이라 불러야 한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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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는 당대의 관례들과 정조의 집약체였기에 분명함과 일관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문화 양식의 찬란한 빛에 대해 찬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재설정자는 사람들의 자기 이해, 세계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새로운 관례들 및 정조를 소개해야만 한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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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예수에 대해 한 말 가운데 가장 어려운 말이 이것이다.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졌는데도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으며…."(요한1:10) ... 패러다임은 이처럼 오로지 역설적인 방식으로만 기술될 수 있다. 재설정자는 세계 안에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이어야 한다. 즉 세계에 의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재설정자는 동시에 세계를 개방하며, 이 때문에 세계는 재설정자에게 의존한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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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히브리 율법에 언급된 모든 외적 행위의 금기들을, 그런 행위에 대한 내적 생각의 금지로 바꾼다. 바울은 나중에 마태복음에 나올 말들을 한발 앞서 강조한다. "살인, 간음, 간통, 도둑질, 거짓맹세, 중상모략에 대한 생각들, 이 모든 것을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며, 한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이다."(마태 15:19)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적이고 내적인 감정들을 삶의 주변부에서 중심적인 관심사로 돌려놓는다.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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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율법에 순응하기보다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고 새롭게 말함으로써 율법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율법과 그것이 정한 금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유대교적 관념에서는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순수한 인간 욕망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념의 중심부로 옮겨놓음으로써,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자리 역시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유대 세계를 완전히 변형시킨다. 이제 기독교인이 목표로 삼는 것은 악에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즉 죄인이 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성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의 과제는 정의롭게 행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정화하는 데 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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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묘사된 것처럼, 예수는 성공적인 재설정자이다. 마치 신이 그러하듯이 그는 새로운 세계를 연다. 즉 내적인 욕망과 의도가 외적 행위에 우선하는 세계를 말이다. 이것은 신들이 주는 빛에 응답한 호메로스적 세계와는 멀리 떨어진 것이며, 아이스킬로스가 연극으로 보여주었듯이, 문화의 배후 관례들을 중시한 아테네인들의 생각에서도 한참 나아간 것이다.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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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 ... 플라톤에 따르면, 모든 영혼은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영원한 선을 갈망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넘어서는 포괄적 영원성에 관해 플라톤의 입장을 따랐고, 오직 영원한 것만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는 견해에도 동의했다. 나아가 플라톤은 말하기를, 인간 존재는 이런 실재를 정신적으로 관조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추상적이고 영원한 미의 형상form에 대해 알려면, 아름다운 한 사람을 고려하는 데서 시작해서 그 아름다운 사람이 다른 모든 아름다운 사람과 공통적으로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영혼에 관해 묻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 다음에는 지식과 법칙의 아름다움으로, 마지막으로는 아름다움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해 묻는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방식으로 상승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영원한 추상적 진리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 그러나 플라톤적인 선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어서 신적 존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동경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선이란 너무나 생기가 없어서 구원의 힘이 될 수 없었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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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호메로스에서 플라톤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내적인 경험이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있다 해도 기껏해야 호기심거리였다. 물론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가 속으로 울 수 있다는 점에 감탄을 표시하고 있지만, 어떤 성취로서가 아니라 단지 유별난 능력으로 볼 뿐이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에게 욕망 즉 에로스란 내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있는 진리를 향한 영혼의 끌림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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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실마리를 다시 꺼내든 사람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자기충족적인 "코기토cogito" 즉 외부 세계와 단절된 내적 경험으로서의 코기토를 다시금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되살려낸다. 그리고 또다시 150년 후 칸트가 완전한 자율적인 자아로서 인간 개념을 언급함으로써 이 생각들은 결실을 맺는다. (209쪽)

 

 

 

#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단테에서 칸트까지

지금까지 이 책을 이끌어온 주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표현될 수 있겠다. 첫째는 어떠한 인간 이해가 서양사의 각 시대를 만들어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온 것들, 즉 우리 외부에 있는 의미의 원천과 관련해서 각 시대는 인간의 실존을 어떻게 설명해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둘째는 인간 존재와 성스러움에 대한 이런 설명들이 허무주의의 위협을 어떻게 저지해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셋째는 역사에서 얻은 이런 자기 이해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이 세속 시대의 허무주의와 싸울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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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신곡』은 중세 전성기의 정점이자 패러다임을 이루는 작품이다.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우주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신의 얼굴에 쓰여 있다는 생각은 단테 세계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달리 말해서 중세 기독교왕국은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는 세계였다. 상상할 수 있는 한 허무주의에 가장 반대되는 세계가 이 세계였다. 중세의 세계에서 본래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세계는 이런 의미들로 충만해 있었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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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생각 속에는 여전히 이 허무주의의 시대에 중요한 빛을 던지는 실마리가 있다. 즉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게 우리의 욕망을 단련함으로써 마침내 그 욕망을 유지하고 충족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들에 우리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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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플라톤과 달리 그는 영원하고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닌 나무나 탁자와 같은 물질적 사물들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과 달리, 몸을 가진 존재는 절대로 허약하거나 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몸은 오히려 힘을 지닌 것이고, 몸을 가진 개체는 몸이 없는 영혼보다 더 완전하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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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계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질서의 맨 꼭대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운동자라고 말한 존재가 있다. 제1운동자는 절대적 완전성을 띤 존재로서 모든 존재들을 자신에게로 이끈다. ... 이러한 우주적 위계질서 안에 만물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창조주 신에 대한 유대-기독교적 믿음과 잘 들어 맞았다. 중세의 세계에서는 납에서 황금까지, 생쥐에서 코끼리까지, 그리고 죄인에서 성인까지 모든 것에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죄의 유형들조차 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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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기독교 세계 속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신이 만들어주는 최선의 충족상태를 열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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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체적인 죄와 영적인 죄를 구별한 바 있는데, 이 구별은 단테가 생각하는 지옥의 지형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육체적인 죄란 음식, 섹스, 재물 따위를 사랑하는 것, 아니 너무 과도하게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과대평가함으로써 범하게 된 죄는 디스의 벽 바깥에서 처벌받는다. 반면, 영적인 죄란 신의 창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 영적 죄인들은 스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디스의 벽 안쪽에 자신들을 가둔다. 그리고는 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정력을 쏟는다.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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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에서는 독립을 위해 애쓰는 모든 삶의 방식이 칭송을 받는다. 자율적 존재로서 스스로 만든 법만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자기 충족성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천국의 기쁨을 물리친다는 것은 곧 죄의 본질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단테의 작품은 자율성의 해악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로 동시대인들에게 읽혀질 수 있었다. ... 신의 창조야말로 우리를 충족의 상태로 이끄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 속에서 사물의 숨겨진 의미를 키워내기보다는 사물들에 대해 자기만의 가치를 정립하려 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단테에 따르면, 이런 시도는 결국 서글픈 허무주의, 즉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기를 움직이는 것도 전혀 없는 허무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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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체계 속에는 분명 자유의지를 위한 자리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의지가 아니다. ... 단테의 견해에 따르면, 감각과 욕망은 자신을 사로잡는 것들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또한 그런 감각을 형성하는 자유를 지닌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지성이 있기에 감각을 올바른 것들에만 사로잡히게 만들 수 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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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옥과 연옥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나는데, 지옥의 사람들은 여전히 나쁜 욕망을 품고 있는 데 반해 연옥의 사람들은 그것을 뉘우친다는 점이다. 뉘우침의 행위는 자유의지에서 나온 행위로서 나중에 심판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회개는 구원으로 가는 길이요, "처벌" 역시 감각과 욕망의 왕국을 혁신하여 자유로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데 필요하다.

 단테네 따르면, 모든 영혼은 세상의 사물들에 자연적으로 끌리는 성향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끌림을 가치 있는 삶 쪽으로 돌릴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욕망을 억누르든가 아니면 제거하는 방법이다. ... 하지만 단테는 다른 견해 즉 기독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단테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랑은 올바른 대상에 적절하게 향하고 있기만 하다면 좋은 것이다.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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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마음을 끄는 것에 더 헌신적으로 전념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실패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열정과 헌신을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대상 혹은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욕망을 다듬는 것뿐이다. 자유의지란 이 욕망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것이다. ... 문제는, 열정과 헌신을 남김없이 바칠 대상이나 존재를 과연 여기 지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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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음유시인들은 낭만적 사랑을 발명한 사람들이었고, 단테는 그런 낭만적 구애자 가운데 하나였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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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누군가에 대한 낭만적 사랑이란,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성스러움의 경험들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아테네 여신의 인도를 받거나 예수의 현존을 통해 전염성 강한 아가페적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낭만적 사랑 역시 우연히 다가와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것들은 감사의 느낌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기초들 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정확히 이해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은 우리를 눈앞의 상황에 조율시켜 주며, 그것에 따라 모든 것들은 알맞은 만큼의 중요성을 띠게 된다. ... 만일 단테가 이렇게 베아트리체에 대한 헌신으로 만족했다면, 추상적이고 비육체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류에 맞서는 길을 찾아냈을 것이다. ... 하지만 불행히도 단테는 이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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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경우를 보자면, 베아트리체가 천국 내내 그를 안내하기는 하지만 단테는 그녀에 대한 헌신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천국을 여향하는 동안 단테를 인도했던 베아트리체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 왜냐하면 제아무리 베아트리체라 해도 단테의 최종 설계도 안에서는 사랑의 궁극적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길이지 진리가 아니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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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성을 가졌던 구분, 즉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을 갈랐던 차이는 신을 관조하는 기쁨 속에서 평준화가 되어버린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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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말로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일까? 그것은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회피하는 길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것은 중세적 형태의 허무주의라 할 수 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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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고자 한 중세의 시도는 결국 실패한 시도였다. 「지옥편」이 부정적으로 전하고 있는 메시지, 즉 자율성이 능동적인 허무주의를 낳는다는 메시지는 현상학적으로 일견 타당해 보인다. 모든 의미가 우리와 더불어 생기는 것이라면, 그 어떤 힘이나 권위도 우리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용어로 육화된 예수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수동적인 허무주의를 낳는다. 그 시도는 결국 최고 존재에 대한 사랑, 즉 모든 개체성과 의미 있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사랑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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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중세적 종합, 즉 아퀴나스와 단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가지고 기독교적 계시를 개념화함으로써 도달했다고 하는 성취는 허무주의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길임이 밝혀졌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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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와 단테보다 1세기 뒤에 글을 썼던 마르틴 루터는 ... 신비가들이나 수도사들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두 유형 모두 세상과 절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신을 관조함으로써 얻는 축복보다는 세상 속에서 누리는 공동체적 기쁨이야말로 전염성 강한 기독교적 정조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확고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240쪽)

 

 우리는 (…) 자신의 몸과 그 몸이 하는 일을 통해 우리 이웃을 아낌없이 도와야만 합니다. 우리 각자는 타인에게 마치 그리스도가 된 듯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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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기독교인들은 다른 모든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예수의 정조를 직접 공유하기에, 더 이상 교황과 사제의 중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르터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인이 교황이며,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모든 자가 성자"이다. ... 그것은 적어도 서양에서 가장 강력한 제도 가운데 하나였던 교회에 맞서 인간이 스스로를 자족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터주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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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은 개인을 내적인 생각과 욕망으로 정의되는 존재로서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신이 만들어준 위계질서 즉 개인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의미들을 희생한 대가였다.

 루터의 기독교 해설을 통해 확실히 세상은 그 정치적, 종교적, 환경적 외양에 있어 마법에서 완전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단테가 보았던 의미들의 위계질서-신의 얼굴에 모든 것들의 가치가 씌어 있는 그런 위계질서-로부터 멀리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루터에 따르면 개인들은 더 이상 왕과 국가에 복무해야 한다는 법률들을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저마다 왕으로서 존재한다. ...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더 이상 사제나 그들의 중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예수는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전함으로써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서 정당화시켜준다.

 이것이야말로 자아를 의미의 자족적 원천으로 보는 계몽주의적 이해의 먼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달리, 루터는 여전히 개인이 구세주에게 의존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견지했다.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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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데카르트는 이런 수용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허무주의로 향하는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었다. ... 서양 역사에서 데카르트는 유일하게 예수와 비견될 만한 재설정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기독교 세계를 성자와 죄인이 함께 존재하는 세계로 정립했듯이, 데카르트는 근대 세계를 자기 충족적인 주체와 자기충족적인 객체가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로 정립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한 영혼의 내면적 깊이와 루터가 강조한 개별 기독교인의 독립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이 일을 해낸다. 그러나 루터가 아가페와 감사의 정조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수용성이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견지한 데 반해서,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란 완벽하게 초연하고 자기 내포적인 존재이므로 수동성과는 무관하며 신에 필적할 만큼 큰 의지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44쪽)

 

 내 안에서 그보다 더 큰 것이 관념을 포착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의지, 즉 자유의지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른바 신의 형상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주로 이 의지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예로 들었던 성스러움의 경험들은 시종일관 정조들에 대한 경험이었다. ... 이들과 계몽주의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전 시대에서 정조가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이 이제는 다 닳아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조는 공적이고 공유가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레스 혹은 아킬레우스를 통해 대담한 용기의 정조에 사로잡힐 수 있었으며, 예수의 현존 안에 거함으로써 아가페적 사랑의 정조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을 주체로 보는 오늘날의 데카르트적 이해 속에서 정조란 사적이고 내적인 상태를 말하며, 본질적으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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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주체야말로 우리가 수행하는 행위들의 유일하고도 자족적인 원천이라는 근대적 생각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 주체에 대한 이 근대적 생각 덕분에 호메로스가 감지했던 현상들이 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 이전까지 사람들은 내면적 자아에 대한 생각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최선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 호메로스의 세계와 중세 세계는 분명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우리 자신의 사고와 생각으로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끌어당기는 것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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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서, 즉 내적인 사유와 욕망과 의지를 갖는 존재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외적 세계"는 의미 없는 대상들, 즉 나와 대립해 있는 비주체적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데카르트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주체와 대상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신의 피조물로 이해했다. 데카르트 이후 우리는 자신을 거의 무한히 자유로운 '의미의 할당자'로 보게 된다. 이런 할당자는 자신이 선택한 의미만을 자기 주변의 무의미한 대상들에게 부여한다. ... 그래서 인간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만일 이처럼 완벽히 자기 내포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데카르트는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성과 경험을 가지고 매 상황에서 해야 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규칙을 발견했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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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데카르트는 주체와 객체만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세계 위에 윤리학을 정초하는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매우 획기적이었지만,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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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단테가 악의 특징이라고 보았던 고집스런 자율성을 살려서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신적인 측면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향한 결정적 발걸음을 내딛었다.

 자유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해는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해설자를 필요로 했는데, 그가 바로 18세기의 위대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다. ... 칸트에 따르면, 주체는 세상의 주재자로서의 신을 대신한다. 칸트는 계몽주의란 결국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몽주의를 통해 오직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만 교황에게든 왕에게든 복종할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자율성, 즉 나 자신의 법칙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는 것-단테가 묘사한 '디스'에서 이것은 오히려 영혼의 죄악이었다-이야말로 인간의 최고선이 된다.

 이런 칸트의 견해는 루터에게서 온 것인 동시에 루터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249쪽) ... 루터에게 있어서 나의 실존적 확신의 원천은 나에 대한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는 데 있는 반면, 칸트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나 혼자만의 모든 행동에 책임이 있다. 더구나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표식이다. ... 여기서 본질적인 점은 도덕 법칙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 우리는 스스로 입법하는 자, 즉 우리 자신이 세운 법률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이다. 신 또는 기타의 힘, 충동, 권위 있는 문헌, 부모의 요구, 사회적 관습, 국가의 법률 등 우리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 행위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외적 힘들은 "의지의 타율적 규정들"로 평가절하된다. 그것은 타자가 부여한 우리 행동의 원인들이다. 이런 외적인 힘들이 우리 행위에 영향을 미치도록 놓아둔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인 자유롭고 자족적인 존재가 요구하는 바에 맞춰 살지 못하는 셈이 된다. (250쪽)

......

근대적 관념에서 인간 행위란 인간 주체가 책임져야 하는 행동이다. ... 사르트르는 이렇게 썼다.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온 세계이다. (251쪽)

......

호메로스가 인간 탁월성의 모범이라 생각한 행동들은 칸트나 우리가 보기에도 도저히 인간적인 행동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호메로스가 칭송했던 탁월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의지에 대한 타율적 규제-자유의 잘못된 포기-로 보일 뿐이다. ... 칸트적 입장이 갖는 위험성은, 우리 행동을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짐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들이 오로지 우리의 손에만 맡겨진다는 데 있다. ... 사실상 인간을 완전히 자율적인 자아로 본 칸트적 개념으로부터 인간을 모든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본 니체적 개념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다. 그러나 의미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또한 자유롭게 취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제작자를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허무주의요, 단테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간 실존의 의미 있는 개념으로 내세울 수 없었던 생각이다. (253쪽)

칸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안 지나서, 그리고 니체보다 한 세대 전쯤에 글을 썼던 허먼 멜빌은 이런 허무주의의 우협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이미 목도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길로 호메로스의 다신주의적 신들을 상상했다는 점이다. (253쪽)

 

 

 

#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멜빌의 '악마적 예술'

 

분명 이 구절은 책임 핵심이자 아마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멜빌은 마치 예언을 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구절은 이러하다.

 

앞으로 고도의 문화를 가진 어느 시적인 민족이 그들의 타고난 권리로써 옛날의 쾌활한 오월제 신들을 불러내어, 오늘날의 이기적인 하늘 아래, 신들이 사라진 언덕에 그 신들을 다시 앉힌다면, 거대한 향유고래는 틀림없이 제우스처럼 높은 자리에 군림하게 되리라. (263쪽)

......

결국 고래는 일종의 신비, 즉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진 나머지 무의미나 다를 바 없고, 너무나 해석이 분분한 나머지 그 해석들 모두를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신비적 대상이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향유고래의 모호하고도 감질 나는 특징이다. ... 이슈메일―집에서 쫓겨나 유랑의 삶을 살게 된 성서의 인물(이삭의 형 이스마엘)에게서 따온 듯한 이름―은 모든 고상한 것들뿐 아니라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도 친숙한 인물이다. (265쪽)

......

이제 부러진 삼중 돛대에 걸린 그 고래는, 돛대만을 남긴 채 가라앉는 배와 마찬가지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끝없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휘감겨 들어가게 될 것이다.[각주:1] (270쪽)

......

신성한 진리란 것이 과연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멜빌이 강조한 "신적인 아량" 역시 자발적이고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하고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신적이고 참된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현재의 정조를 통해서만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장 높은 곳으로 나는 기쁨이든 가장 낮고 어둔 곳으로의 하강이든 이런 정조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다시 말해 변덕스런 이슈메일이 그랬듯이 이런 정조들 안에 산다는 것은, 곧 이 정조들이 드러내주는 복잡한 진리들에 마음을 연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진리들은 궁극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고래의 신비가 그렇듯이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 불완전성 때문에 그것들은 신성하고 참된 것이다. (273쪽)

......

이제 안전하고 확실한 기초에 대한 중세적 사고-즉 신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장 깊고도 최종적인 원천이라는 생각-는 뒤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슈메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느낀 바 있다.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적어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279쪽)

......

모비 딕을 추격하는 에이해브의 모습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미친 듯이 추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하지만 멜빌의 세계 속에 그런 최종적인 진리란 없다. 비합리적인 가면 배후에는 어떤 합리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런 토대를 찾아내려는 에이해브의 결의, 그것은 단 한 가지에 미쳐 있는 일신주의의 사악한 성격을 보여줄 뿐이다. ... 에이해브가 가장 철저하게 증오하는 것은 우주가 종국에는 불가사의하다는 생각, 궁극적으로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즉 사물들의 존재 방식에 관한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고수한다. 그것은 뭔가 전통적 신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이런 잘못된 일신론적 정념이야말로 가장 위험스럽고 치명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멜빌의 책에서 진짜 사악한 것은, 단 하나에 미쳐 있는 에이해브의 일신주의를 통해서 이 우주가 가장 혐오하는 방식의 육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285쪽)

......

고래에 대한 멜빌의 이해 속에는, 표면적인 사건들 배후에 감춰진 우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표면적인 사건들 자체-모순되고 신비스럽고 다양한-가 의미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책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아무리 고래를 해부해 보아도 피상적인 것밖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그 뜻이다. 이슈메일의 놀라운 힘은 이런 표면적 의미만을 가지고도 잘 살아간다는 데 있으며, 거기서 즐거움과 안식의 참된 처소를 발견한다는 데 있다. 그는 그 의미들에서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288쪽)

......

이렇듯 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즉 일상 속에 감추진 목적을 찾는 대신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은 기독교 이전 시대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이전 시대뿐 아니라 불교 이전, 플라톤 이전, 힌두교 이전, 유교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을 출간한 이래로, 많은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야스퍼스가 "축의 혁명Axial Revolution"이라 부른 기원전 천년 동안의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철학, 붓다의 열반 개념, 그리고 영생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 관념들을 낳았던 시대로 말이다. 이 시대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선이 존재한다는 생각, 신적인 것의 본성으로서 ㅣ어떤 초월적 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처음 소개한 시대였다. 찰스 테일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89쪽)

 

 축의 혁명은 신적인 것만을 궁극적 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평범한 성취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 선을 재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열반이나 영생 같은 것으로 말이다.

 

 반면 멜빌의 얼굴 없는 고래는 우리에게 이런 "초월"의 관념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에이해브가 고집했듯이 가면의 배후에 숨겨진 어떤 합리성을 찾기보다는, 이슈메일처럼 그날그날의 실존에 대한 정조를 찾고 기르도록 해준다. 즉 아내, 심장, 침대, 식탁 등에 간직되어 있는 정조를 통해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들을 찾게 해준다는 얘기다. 니체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삶은 축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호메로스 시대에 최고조에 이른 바 있다.

 

 오, 그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인들이여! 그들은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표면,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거나 가상을 숭배하는 것, 즉 형태, 음정,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는 것뿐이다.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지만, 그것은 심오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290쪽)

......

기독교가 길을 잃은 것은 그 기본적 방향성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방향 전환 때문이라는 비판이 이 속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가 자신만이 참된 신앙이라 고집할수록, 그리고 전체적이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진리라고 주장할수록, 그것은 더욱 고립에 빠질 것이고 공동체 정신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초월적이고 신성한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여기 지상에 이미 주어져 있는 공동체적 행복과 다양한 선들은 포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슈메일이 보여주는 다신주의적 입장은 일상에서 만나는 공동체의식 속에서 주어진 그대로의 의미들을 찾게 해준다. 모순적이고 다의적이며 복합적인 의미들을 말이다. 이런 의미들이야말로 부슬비 내리는 11월 같은 영혼을 몰아내주는 것이다. (293쪽)

......

이슈메일이 공동작업자들과 함께 경뇌유를 짜면서 경험한 "풍부하고 애정이 넘치며 친근하고 다정한 감정"은 이 모든 것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기독교적 즐거움은 우리에게 감춰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것들만을 찾은 나머지 그것을 간과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즐거움-이슈메일의 관점에서는 기독교가 약속했던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개인적 기대치를 낮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꿔야만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다. 반면에 에이해브의 완고한 일신주의는 이곳 지상에서 이미 찾을 수 있는 현실적이고 다신주의적인 즐거움을 덮어버린다. 우리가 잠깐만이라도 주변에 이미 주어져 있는 즐거움을 인식한다면, 이 즐거움이야말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정조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원히 즐겁거나 항상 즐거울 필요도 없다. 기회가 왔을 때마다 그것을 누리면 된다. ... 멜빌이 살았던 세계는 에이해브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세계에서 에이해브는 자율적 의지의 힘으로 우주의 심오한 의미를 꿰뚫고자 했다. 에이해브는 인간을 자율적 자아로 이해한 칸트의 이론과 영원한 축복에 대한 단테의 종교적 희망을 결합한 인물이다. 이 설명들 각각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지만, 하나로 결합되었을 때는 최악의 사악함을 이룬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기적인 하늘"이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즉 인간의 자기충족적 의지로 성취할 수 있는 것 너머의 의미들이 왜 허용되지 않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그것들은 어떻게 우리가 지상에서 신들을 쫓아버렸는지, 그리하여 "신들이 사라진 언덕"만을 남겨두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쫓겨난 "옛날의 쾌활한 오월제 신들"은 "고도의 문화를 가진 어느 시적인 민족"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나라는 삶의 일상적 의식들에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296쪽)

......

우리는 뭔가 단일한 의미가 있다고 여긴 나머지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만, 곧 그것을 찾는 일에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보편성이란 귀머거리와 다름없는 것이요, 혼돈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돈이 그 자체로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라 해도, 우리는 단지 그때그때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304쪽)

......

우주의 다양한 의미들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진리에 그저 추가로 덧붙여진 게 아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런 의미들 각각과 충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들이 계시하는 진리들에 만족해서 사는 것이며, 그것들을 강박적으로 화해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복수적 다신주의를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귀를 먹게 하는 화이트 노이즈의 혼돈도 아니요, 흰색의 말없는 공백도 아닐 것이다. 그 이미지는 색채의 스펙트럼 속에서 저마다의 색들이 아름다운 색조를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을 것이다. .... 색깔들을 모두 더하면 무슨 색이 나올지 궁금해 하지 말라. 그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정조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성스러운 것에 반응하는 갖가지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라. (305쪽)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일 것이다. (321쪽)

......

서양 역사를 규정해온 초월적 진리에 대한 에이해브의 철저한 투신이야말로 서양사의 전통을 내부로부터 침몰시킨 원인이라는 얘기다. (323쪽)

......

표면적 진리들에 대해 스스로를 닫는 내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종교라면 무엇이건 멜빌은 "(그 종교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모든 다신적 진리들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놓아둔다. 그런 진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맛보도록 하자.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의미를 선사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 즐거움과 슬픔 속에 만족스럽게 머무르자. (326쪽)

 

 

 

#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스포츠와 종교 사이의 이런 유사성은 이 공동체들이 그만큼 중요성을 띠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위대한 성취를 함께 축하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과 하나 되는 느낌은, 축하를 보내는 그 일이 정말로 위대하다는 느낌을 강화시킨다. ... 같은 마음을 가진 공동체와 이런 순간들을 공유할 때, 그것들은 더욱 큰 의미를 띠고 다가온다. 우리는 교회에서든 야구장에서든 타인들과 멋진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다.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공유하면, 이 멋진 순간들은 터져서 빛을 발한다. (334쪽)

......

모든 스포츠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한다. 경기하는 순간이나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이 오면 뭔가 압도적인 것이 우리 앞에 일어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며,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덮어버린다. 이런 순간이 오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성스러움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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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권태, 분노와 불안을 거부하거나 초월하기보다는 우리의 실존이 갖는 고통스런 측면을 인정하면서 성스러운 순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완성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런 성스러움의 개념이야말로 우리에게 화내는 신들 없이는 우리를 보살펴주는 신들도 없다는 생각과 어울리는 개념이다. (341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경험은 "신적인 것을 달래기 위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의식은 월러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의 결론으로 조명되고 기술될 것이다. (342쪽)

......

스포츠가 보여주는 성스러운 의례들에 대해 우리는 네 가지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 첫 번째로는, 진정으로 특별한 순간이 오면 뭔가 압도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실어 나른다. 여기서는 파도라는 은유가 중요하다. 파도가 거세게 밀려올 때, 파도타기의 명인에게 그것은 그를 견고하게 지지해주는 기초가 된다. 파도는 더 크게 밀려올수록 더 힘차게 그를 실어 나른다. 하지만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기억 뿐이다. ... 스포츠의 순간들도 이와 같다. 만일 우리가 그 순간들에 올라탄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실어 나르고 삶에 의미를 안겨줄 것이다. 보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 경기가 시작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누구도 경기의 흐름을 만들거나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경기 중에 펼쳐지고 드러난다. 그것은 은총을 부르거나 절망을 일으키며, 영웅적 행위나 실패를 낳는다. 또한 열광을 가져오거나 낙담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 느낌들의 총합보다 크다.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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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실존의 기초를 상황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 속에는,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영원하고 지속적인 확실성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확실성은 일시적이고 다양하게 주어지며, 따라서 언제나 관심과 주목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를 잠시간 실어 나르기는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우리가 현대 문화에서 경험하는 이런 성스러움의 특징은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적 실재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이다. 호메로스 시대에 자연 내지 자연에 실재하는 것들을 부르는 이름은 '퓌시스physis'였다. 영어 단어 '물리학physics'은 이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현대 물리학 역시 존재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호메로스와는 전혀 다른 실재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자연의 최종 원소들은 쿼크와 경입자, 그리고 부피와 전하를 가지는 원자의 하위 입자들이다. ... 물리학이 우주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린다 해도, 그것은 근본적 구성요소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하지만 호메로스가 보기에 이런 인과론적 설명들은 모두 잘못된 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냐하면 호메로스 시대에 '퓌시스'라는 단어는 우주의 어떤 궁극적 구성요소를 일컫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 실재하는 사물들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방식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호메로스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실재적인 것은 갑자기 분출하여 잠시 우리를 사로잡다가 마침내 우리를 놔주는 어떤 것이다. 호메로스의 단어 '퓌시스'를 번역한다면 '반짝임'[각주:2]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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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에서 반짝임은 실제로 빛을 가지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스포츠의 순간들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 과학적 실재 개념은 실재의 인과론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그와 대조적으로 호메로스의 설명은 실존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순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가를 기술하는 데 있다.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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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력한 힘에 압도당한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나의 행위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대한 스포츠 게임에서 관중들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을 느낄 때, 그 행동의 원천이 내게 있지 않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348쪽) ... 그 행동은 자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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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계몽이란 자기에게 부과된 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칸트적 의미에서 미성숙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기초해서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중들의 광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미성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 칸트적 의미에서 볼 때, 야구 경기장에서 가져야 할 성숙함이란 합리적 개인으로서 그 상황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공동체의 반응이 갖는 힘에 저항하는 것이다. ... 관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은 여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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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경고 속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결국 야구장에서 관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과, 히틀러의 집회에서 군중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 사이에는 포착하기가 매우 힘든 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 현상의 반짝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루 게릭의 고별사와 히틀러의 선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지적할 수 없다면, 아마도 칸트가 말한 성숙함이야말로 지루하기는 해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가장 현명한 지침이 될 것이다.

......

만일 계몽주의가 형이상학적으로 자율적인 개인을 내세우는 것이라면, 계몽주의는 단지 지루한 인생이 아니라 거의 살 수조차 없는 인생으로 불가피하게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단테에게 자율적 의지를 갖는다 함은 곧 세계의 의미 원천에 반항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멜빌의 에이해브 역시 이런 의미 원천이 가지는 어떤 힘 때문에 미쳐버리고 만다. 우주에서 개인이 점하는 위치에 대해 분명하고도 완벽한 답을 발견하려는 그의 집념이야말로, 즉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지를 알아내려는 데 미쳐버린 그의 욕망이야말로, 멜빌이 보기에는 가장 비극적이고 심각한 결함이었다.  (350쪽)

......

계몽주의가 형이상학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야말로 서양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에서 진일보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루터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 칸트, 니체를 거치면서 증폭되어 온 몰락의 마지막 발걸음이자, 가치있고 의미 있는 실존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자아 개념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한 해독제로서 호메로스적인 다신주의-잠시 스쳤다가 사라지는 반짝임들-가 오늘날의 문화에 유용하다고 주장해왔다. (351쪽) ... 그런 경험은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정도를 초월하는 어떤 것에 우리가 참여할 때만 주어진다. ... 우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리스[각주:3] 사이에 끼여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에는 허무주의적이고 무의미한 삶이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의미심장하지만 혐오스러울 수 있는 삶이 있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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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poiesis[각주:4] ... 주어진 의미들을 최선의 것으로 연마하는 장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것은 여러모로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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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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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장인은 나무의 쓰임새라든지 성질 등 의미있는 차이를 나무 속에서 발견하지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는다. 숙련된 장인은 톱밥이 "당근처럼 쐐기꼴"을 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가 계산대 줄에서 짜증내는 여인을 보고 가족 중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단정하는 방식과 아주 다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장인의 과제는 의미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기술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는 데 있으며,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분간하는 데 있다.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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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수레바퀴 장인으로서 거의 마지막 인물인 조지 스터트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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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장인에게 나무가 지닌 저항성을 매정하고도 몰상식하게 다루는 전기톱 따위란 없었다. 나무는 기계의 먹잇감이 아니요, 무력한 희생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는 그것을 잘 달랠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허락하곤 했다. 마치 이해심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듯이 그런 장인과 협력해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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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무를 다루는 장인의 기술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이 아니라, 지성과 유연성을 지닌 활동이라는 얘기다. 그의 재는은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며, 순간순간마다 달라진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은 장인에게 없을 것이다.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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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다양한 실천적 지식을 통해서 장인은 나무에 대한 단순한 책임감을 넘어서, 자신이 사는 고장과 땅에 대한 유대감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된다. ... 특정 장소에 대한 이런 존경심은 기술적 숙련이나 반사적 반응과 같은 우리의 기술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해 성스러움의 감각을 갖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최고의 상태로 고양시켜 준다. (359쪽)

* 성일 생각 - <목수 이야기> 책 생각이 많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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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트가 말하는 장인적 기술은 개인의 고립적이고 자동반사적인 기술 숙달과 달리, 전적으로 자기 지역과의 연대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관계들이 다 그렇듯이 한쪽은 다른 쪽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장인과 기술의 상호 육성에 대해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 하지만 기술이 사물의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관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창작적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퓌시스의 위험스런 출현과 자비로운 출현 사이의 의미 깊은 차이를 분별하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말이다. ... 그런 정조에 휩싸여야 할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깨닫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이다.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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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그런 기술이 오늘의 문화에 유용한 성스러움의 형태를 길러준다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메타 포이에시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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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전은 오늘날의 삶에서 전문적 기예의 중요성을 감소시켜왔다. 확실히 현대 테크놀로지의 주요 목표는 당신이나 나의 기술 수준과 상관없이 전 분야를 모든 이에게 접근 가능토록 만드는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도록!"이라는 표어야말로 테크놀로지 시대가 내세우는 주문이다. ... 테크놀로지란 힘든 일들을 쉽게 만들어서 우리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기본 공식이다. ... 숙련된 기예를 지닌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이런 기예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차이들을 밝혀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런 차이들 각각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책임감을 기르게 한다. 이런 기예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테크놀로지가 우리 삶을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단조로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이 단조로움으로 인해 세계는 점점 기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스터트가 나무에 대한 지역적 이해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 이 뜻이다.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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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트가 말하듯이 "사무실의 책상물림들"에게는 기계로 생산한 바퀴 테두리가 더 나아보일지 모르지만, 숙련된 장인에게는 완전히 몰지성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질의 저하보다 더 나쁜 것은 차이를 설명하는 기술을 잃는다는 점이다. 기예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질수록 세계는 더욱 더 가치의 구분을 잃게 된다.

 두 번째는, 세계가 의미를 상실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로워진다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애착과 존경의 정조 - 어떤 분야에서 기치 있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아는 숙련되고 밀착된 관심-는 우리에게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 존경은 우리를 의미심장한 차이들의 양육자로 만들어준다. 즉 목재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것에 찬탄을 보내고 떠받든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양육하고 최고의 상태로 빛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기예의 필요성을 없애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의미의 육성자로 보는 고매한 관념마저 없애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테크놀로지의 행진은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 위험성이란 기술 개발이나 기술 향상에 가로놓인 위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에 놓여있는 위험을 말한다. 테크놀로지적인 삶의 방식이 부추기는 것만을 추구하는 위험성이 그런 것이다. ... 테크놀로지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창작적 실천을 지켜가면서 개별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더 적절한 대처 방안일 것이다.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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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 항로를 찾기 위한 분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곧 항해술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의미심장한 구별들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잡이 건물이나 도로표지판, 태양과 별들의 위치에 대한 감수성도 함께 잃는다.  GPS로 운행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휴지休止상태를 간헐적으로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휴지 다음에는 메시지가 가르쳐주는 것을 정확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는 철저히 비인간적인 무엇이 들어있다. ... 더 나아가 이런 경험은 우리 자신을 GPS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동화 장치로 변모시킨다. 이것 역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기예와 관심, 그리고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질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치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내는 기예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지 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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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자율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전통은 바로 이런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 철학에서는 그것을 확신의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존재, 즉 세계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내주는 정조들에 자신을 늘 열어두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의 확장은 무엇에 관심을 가질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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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부재를 참는 것과 그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인간이라면 어쨌건 자신을 다른 인간과 구분해야만 한다. 일반적이고 진부한 상태에서 벗어나 특별하고도 세련된 활동에 뛰어드는 순간이 그런 때이다. ... 답은 '보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 일상을 기능적인 일들로 채우는 것이 과연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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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카페인 알약이나 홍차보다 커피 마시기를 더 좋아할까? 커피의 어떤 점 때문일까? 커피가 가진 각성효과보다는 그 향내와 온기, 그것을 마시는 의식, 그밖에 다른 요소들 때문 아닐까? 만일 그러하다면 어떤 커피, 어떤 추출법, 어떤 컵이 가장 좋으며, 어떤 친구와 함께 어떤 장소에서 마시는 게 가장 좋을까?

 이런 질문들은 추상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정답을 얻으려면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우리 스스로 이런 의미있는 차이들을 분간하려면, 위험과 보상이 함께 따르는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다. 커피에 대한 이런 실험과 관찰은 결국 의례가 지닌 특징들을 분간해내는 솜씨를 우리에게 길러주며, 궁극적으로 그 특징들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솜씨를 길러준다. 이런 기예는 다중적인 것이다. 적당한 커피와 컵, 커피 마실 장소를 정확히 고르는 안목,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는 방법을 동시에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예를 익히고 그것에 걸맞은 환경들을 육성한다면, 우리는 틀에 박힌 일 대신 의식적인 활동을, 진부하고 의미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신 우리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의미 깊은 경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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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을 끄는 분야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너무 시시한 게 아닌지, 너무 고립적이거나 너무 따분하지는 않은지, 모든 것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데 부적합하지 않은지, 이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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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설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구분하는 기예는 어떻게 계발할 수 있을까? ... 이길로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용기가 필요하다. 군중의 광기에 저항하는 칸트적 용기가 아니라, 그 속에 뛰어들어 그것을 경험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 우리는 세상이 드러내는 위험스런 경험을 겪어봐야만 그 불같은 어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광적인 지도자의 전체주의적인 선동에 휩쓸려본 경험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의 위험하고 황폐한 결과를 경험할 때만, 따를 만한 지도자와 배척해야 할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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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시스는 우리를 파도처럼 고양시키는 거칠고 열광적인 성스러움을 보여주고, 포이에시스는 사물들을 가장 훌륭하고 성스러운 상태로 만드는 온화한 양육적 스타일을 보여주며, 테크놀로지는 모든 성스러운 것들을 비웃는 삶의 자동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지닌 다차원적인 성스러움들 속에서 사는 장인은 어떤 순간에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 감사의 축제가 필요한지를 반성 없이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열광적인 스포츠의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동시에, 광적이고 위험한 선동가의 웅변에 이끌리지 않도록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사물들에 조율되어 있으며, 따라서 신들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열어두고 있다. ... 우리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신주의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도덕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신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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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름이 있으니, 문화와 그 풍부한 유산에 대해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신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왔다. 다시 말해서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덮거나 막아왔다는 얘기다. 신들이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그들은 감수성을 육성하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리는 『신곡』의 죄인들처럼 자족적임을 주장하면서 우리 자신을 폐쇄시켜 왔다.

 우리가 신들의 부름으로부터 자신을 닫아버린 것은 스스로를 자율적 주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 신들이 우리에게서 퇴장하거나 우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신들은 여전히 우리가 그들의 부름을 듣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왜 신들이 우리를 저버렸는지 묻지 말고, 왜 우리가 신들을 버렸는지를 묻기로 하자.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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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옛 신들을 다시 부를 수도 있다. 과거 한 때 존경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성스러운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고전들을 통해서 말이다. ... 우리는 탈마법화된 우리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성스러움들을 찾아내는 기예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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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신들의 세계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 신들은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동안 우리를 실어 나르다가 마침내 힘을 잃고 우리를 떠나도록 놔두는 신들이었다. 이런 퓌시스적 성스러움은 오늘날 우리 문화의 주변부에서 여전히 유용하지만, 우리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성스러움은 아니다.

 우리는 퓌시스 외에도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호메로스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개념으로, 세계를 양육하는 감각이자 세계를 가장 빛나는 것으로 만드는 기예를 계발하는 감각이다. (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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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에 대한 이런 이해에 덧붙여서, 우리는 또한 세계에 대한 테크놀로지적 이해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생산하고 통제하도록 해주는 이해 방식이자 사물에 대한 효율적이고도 영리한 이해 방식이다. 때때로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점도 내적인 가치도 없지만, 우리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주조될 준비가 되어 있는 세계이다.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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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다양한 존재방식들에 균형을 잡아주는 다신주의야말로 호메로스가 알았던 그 무엇보다 더 변화무쌍하고 더 흥분되는 것이리라.

 이 현대적 다신주의 세계는 성스럽게 빛나는 것들로 이루어진 놀라운 세계일 것이다. (378쪽)

 

 

# 옮긴이 해설 -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 찾기

이전과는 달리 현대를 특징짓는 특별한 무의미가 우리의 관심대상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관용의 탈을 쓰고 있지만 종국에는 철두철미 의미를 거부하는 절대 무의미, 그것이 바로 현대 허무주의가 설파하는 무의미이다.

 우리 시대는 허무주의의 시대다. 니체가 정확히 짚어내고 있듯이, 이 시대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잏고 흔들린다. 니체는 유럽 허무주의의 기원을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에서 찾은 바 있다. 그 둘의 공통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배후 세계를 가정한다는 점에 있다. ... 지금껏 서구인들은 '신'으로 불리는 배후의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얼추 찾은 것을 가지고서 '의미의 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헛된 망상일 뿐이다. 원래부터 없던 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처럼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는 '신의 죽음'이라는 니체의 한마디 말로 요약된다. (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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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회는 처음부터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의미의 집을 지으려 했다. 세속화, 탈신화화, 탈마법화된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만들었고 괄목할만한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단의 허무주의에 도달했다. ... 지상은 점차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간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신 없이 의미의 집을 만들려는 근대 계몽의 기획은 실패한 것일까?

 의미는 믿음을 먹고 자란다. 믿음이란 토대가 없다면 의미는 발붙일 곳이 없다. ... 보통 이러한 믿음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실증적인 증거와 앎에 의거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이나 욕망 또는 무지에 의거한 믿음이다. 전자는 근거 있는 믿음으로, 후자는 터무니없는 믿음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전자만을 인정하려 하지만, 그런 태도도 터무니없는 믿음이기는 마찬가지다. (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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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근대는 신을 축출한 시대다. 신의 축출은 아마도 서구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일 것이다. 왕을 내쫓은 프랑스 혁명은 신의 축출 다음에 필연적으로 이어진 수순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가 잊는 것이 있다. 신은 쫓겨났어도 신이 있던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은 인간 자신-왕, 성직자, 과학자-을 앉히기도 하고 권력과 자본을 놓기도 한다. 소소하게는 그곳에 연예 스타를 세워두기도 하며 자신만의 연인을 모셔두기도 한다. ... 내가 보기에, 그 자리는 바로 의미를 낳는 믿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용어로 말하면,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 한 곳에서 응결된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믿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지로서의 믿음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얄팍한 믿음의 저편에 있으며, 사랑하고 소망하는 인간의 유한성과 긴밀하게 뒤엉킨 믿음이다.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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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주의자는 신을 버리려다 신이 현상하는 자리인 성스러움마저 버렸다. 그는 버릴 수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을, 버렸다고 자신했다. 성스러움마저 버리고 난 뒤에 찾아든 것은 새로운 미신이고 야만이다. 황량한 무의미의 사막만 남는다. 그것이 바로 현대판 허무주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빛을 잃어간다. 지금 시대에는 꼬맹이들도 "사는 게 뭐 별거 있어?"라는 말을 서즘지 않고 내뱉는다. ...... 근대 세속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신의 자리에 대신 드리어선다. 자율적인 주체인 인간은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일단 배제하고 거부한다. 그리고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재배치하고 재평가한다. 그로부터 자기와 무관한 것들은 의미를 잃고 만다. 자기 아닌 것들의 의미 있는 색깔들이 바래지자마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 관한 것들마저 무의미해진다.

 또한 모든 행위의 선택과 성패는 주체의 책임으로 전환된다. 근대인에게는 선택할 것이 너무 많고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 무겁다. 과도한 책임은 책임의 의미를 압사시킨다. 감당하기 힘든 책임은 우연과 필연의 탓으로 돌려지고, 과거에 신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경이와 감사의 미덕은 상실된다. 게다가 인식의 주체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과학적 지식은 모든 것을 앙상한 수학공식과 자연법칙으로 환원시킨다. 과학적 지식 이외의 나머지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 공상 등으로 치부된다. ... 근대적 주체가 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는가 싶더니만, 이내 객관적인 지식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 셈이다. 인간보다 지적으로 훨씬 더 탁월한 인공지능이 미래에 인간을 지배하리라는 SF의 전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개연성을 더해만 간다. 이 모든 것의 최종 결과는 허무다. (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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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주의polytheism라는 말에는 다시 두 가지 강조점이 있다. 첫째, '다多'-신주의라는 말에는 전체주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 전통철학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일신주의monotheism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신주의는 의미의 다양성을 하나로 축소시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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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다-'신神'주의라는 말에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은 앎으로 해소되지 않는 믿음 체계를 뜻한다. 동시에 인간이 주도할 수 없는 타자적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 영웅들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 현란하고 초인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운동선수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행했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그들은 전승된 문화, 오랜 시간 동안의 연습, 또 미지의 힘에 이끌려 즉각적으로 행한다. 행위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무엇이든 주체의 통제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의 행위와 사건에는 이처럼 타자적인 계기가 언제나 동반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울렀던 말이 '신'이다. 그리고 이런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 경이와 감사의 마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마음에서만 의미도 증폭될 수 있다.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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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인간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의미는 한 개별 주체의 힘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신으로 표현되는 인간 이외의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의미는 발생한다. 다신주의에서 공동체가,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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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의미를 밝히는 성스러움이 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그들은 그것을 퓌시스physis, 포이에시스poiesis, 메타 포이에스스meta-poiesis라고 말한다.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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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퓌시스는 그리스어로 '자연'을 뜻하는 말이다. 번역을 해서 그렇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자연自然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퓌시스의 근원적인 의미는 생성과 소멸, 드러남과 사라짐의 강렬한 교차에 있다. 밤하늘에 순식간에 반짝였다 사라지는 별똥별이나 봄에 신기하게 움텄다가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시드는 풀잎처럼, 퓌시스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 개념이다. ...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퓌시스만으로는 안 된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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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포이에시스는 그리스어로 '창작'을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 저자들은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받아 포이에시스를 퓌시스에 가깝게 해석한다. 즉 퓌시스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는 힘이듯이, 포이에시스는 이전까지 감춰진 것을 인간의 손으로 현상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퓌시스의 위용을 더욱 잘 드러내는 인간의 능력이 포이에시스인 것이다. (418쪽) ... 가령 운동선수처럼 인간에게 감추어진 몸의 재능을 극대화한다거나, 예술가처럼 작품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장인처럼 재료가 지닌 특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기술이 포이에시스다. ... 셋째, 테크놀로지는 원래 포이에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개념이다. 그 말의 어원인 '테크네techne'는 포이에시스와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둘 모두 퓌시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 개념은 변화한다. 이제 '자연의 결'에 '따라' 창작하는 포이에시스와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로 탈바꿈한다. ... 그리하여 과학기술에 매혹된 과학맹신주의자들은 또 다른 차원의 일신주의자이며 종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퓌시스의 일면만을 배타적이고 강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퓌시스를 철저히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 메타 포이에시스란 포이에시스처럼 퓌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흔적을 경계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메타 포이에시스는 앞서 언급한 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 기술이고, 다른 것으로 부단히 옮겨meta다닐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그것은 예컨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형성했다가도 어느 순간 냉철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자, 군계일학의 한 인물에 열광했다가도 파시스트와 훌륭한 정치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스마트폰과 GPS를 애용하다가도 때로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끄고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창밖의 경치를 주의 깊게 살피는 지혜다. 이런 지혜를 가져야만 이 시대에 다신주의를 제대로 관철할 수 있다. 그래야만 허무의 암흑이 걷히고, 모든 것들이 빛날 수 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미래의 아이들에게 "사는 게 뭐 별거 있어?"라는 냉소어린 말을 더 이상 넘겨주지 않을 수 있다. (420쪽)

  1. 여기서 '삼중 돛대'는 삼위일체설에 근거한 기독교적 일신론, '침몰하는 배'는 거기 의존해온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저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또한 '고래'는 우주 또는 신의 불가지적인 진리, 따라서 허무주의와도 통하는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270쪽) [본문으로]
  2. 저자들이 철학적 기초로 삼고 있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physis는 빛 안으로 열려 펼쳐지는 것, phyein은 빛남, 빛이 비침을 의미한다"고 <형이상학 입문>에서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오디세울스가 귀향길의 바다에서 만난 두 괴물. [본문으로]
  4. 포이에시스는 제작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을 가리키는 프락시스praxis와 대비되는 단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예술과 창작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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