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글 / 동아시아 (2008)

#과학의 약속과 반(反)과학의 도전
"과학이 인류에게 냉혹한 적군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 나는 과학을 혐오하며 또한 과학이 두렵다. 나는 과학이 삶의 온갖 순수성과 고상함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있다고 본다. 과학이 문명화의 탈을 쓰고 인류를 야만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들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과학이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대한 분쟁과 충돌을 가져올 것이며, 아니 어쩌면 인류의 모든 수고로운 진보를 피로 물든 혼돈 속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본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조지 기싱(George Robert Gissing, 1857~1903)은 과학에 대해서 이렇게 불평했다.
...
첫째는 과학이 자연을 황폐화하고 인간을 기계화해서 우리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이다. ... 둘째는 과학에 유물론적 성향이 강하고, 그 결과 인간에게 고상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셋째 비판은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이른바 과학적 방법이라 불리는 탐구 방식이 자연이라는 객체와 인간이라는 주체를 분리해서 자연을 냉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다룬다고 본다.

고등학교 때 내가 과학영역에서 '생물'을 선택했었다는 기억조차 끄집어내는 게 힘들정도로, 과학과 관련된 글을 접하는 건 강산이 적어도 두 번은 지난 요즘에 와서였다. 
평소에도 수 앞에서는 한 없이 나약해지는 나로서는 과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의 용어 자체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과학에 대해 심한 거부감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따져보니 아마도 국민학교 3학년 아니면 4학년에 읽은 한 문고판 단편 소설 때문이 아닐까 짐작을 해 본다. 내가 어렸을 때 읽은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 소설이 가져다 준 선명한 서늘함밖에는 없다. 
내용은 이랬다. 
때는 과학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한 머나먼 미래였다. 아이들은 인간과 교류하는 것보다는 방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노는 것에 훨씬 재미를 느끼는 때였다. 그런 아들과 딸을 지켜보는 부모는 자녀들이 나가서 놀기도 하고 부모들과 교류를 하는 조금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뜻에서 자꾸 방안에만 박혀있는 아이들을 야단친다.
부모들이 자신의 삶을 간섭하는 게 극도로 싫어서, 아이들은 자신의 방 전체를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해서 정글로 만들고 그 속에 굶주린 사자를 설정해 놓는다. 그리고 그 사자에게 부모님의 옷냄새를 맡게 한다. 아이들은 그 정글 속 어딘가에 자신의 몸을 숨긴다.
한참이 지나도 역시나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아이들을 찾을 생각으로 부모는 아이의 방에 들어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밀림 속에서 아이들을 찾는다. 그러던 중 굶주려 있던 사자를 만나고 부모는 갈기갈기 찢겨 사자의 먹이감이 되어 버린다. 
내가 정확히 이 소설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때 접한 공포감과 충격은 거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퇴근 후 청계천과 시청광장을 찾았었고, 방송에서는 연일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과 관련된 보도와 토론이 쏟아져 나오던 시점에 한 선배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았다. '대한민국 과학학의 권위'라고 책 표지에 선전을 하고 있지만 사실 '홍성욱'이라는 이름 석자를 접한 것도 처음이었다.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 촛불집회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를 끝으로 그 뜨거웠던 분위기를 식혀가고 있을 즈음해서 많은 언론들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광우병 발병확률을 인용하면서 그동안 뻥튀기 되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엄청난 국력 손실이었다 등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감소시키고 참여했던 일반시민과 집회 주동자들을 양분하여 후자에게 이념의 틀을 씌워 마녀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후폭풍은 거세기만 하다. 
과연 광우병에 대한 우리의 공포와 그에 따른 월령제한 없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거부의사를 밝히고 급기야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이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 서문
지금까지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사회가 과학을 지원하고 과학이 연구를 통해 사회의 지원에 보답한다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지만 황우석 사태가 드러낸 교훈은 과학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욕망을 그대로 반영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목표를 이루면 된다는 식의 성과지상주의와 마법 같은 과학이 우리를 잘살게 할 수 있다는 과도한 욕망이 만났을 때, 희대의 과학 사기 사건이 만들어졌다. 반면에 광우병 논란은 과학적 사실의 수용이 우리의 가치, 믿음 그리고 정책 참여의 정도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곧 지금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는 과학-사회의 관계는 '지원'과 '보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학교 때 수업을 들으면서 18세기인가 정확히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영혼이라는 게 실제로 뇌 속에 한 위치를 차지하며 물질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과학자들간의 논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당시 한 쪽은 실제 죽은 사람의 두개골을 열어보이면서 '봐라! 영혼이라는 건 없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한 쪽은 '죽는 순간 두개골 속에서 영혼이라는 물질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반론을 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아이들 논쟁처럼 들리지만 당시에 과학이라는 영역안에서 그 논쟁은 꽤 심도깊게 진행되었다. 이 때 이 교수가 이야기 한 요지는 '과학'이라는 영역이 단순히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증명, 실증적 증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갖고 있는 믿음과 가치체계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된다는 점이었다. 사실 현대 과학 또한 연구소를 둘러싼 '자본'(연구설비, 네트워크, 제자 등)을 누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학문적 성과로 인정되는 걸 좌우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과학자는 로맨티스트가 없다?
왜 영화나 소설에 나타난 과학자의 이미지는 대부분 부정적일까? 그 한 가지 이유는 이러한 이미지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의 여류 작가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후에 사람들은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에 대해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영화나 소설 같은 대중 매체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대중 매체에 나온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다시 과학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켰다. 요즘 영화에서 과학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면, 그것은 과학 연구가 '괴물'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가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그 소설 한 편이 나에게 과학의 공포를 심어준 것처럼 마찬가지로 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이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적 감정이 갖는 우연성과 실수들 등이 휘발된 채 이루어지는 정확한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수의 체계, 살아있는 개구리의 배를 메스로 가르는 실험실 풍경 등의 부정적 기억은 내가 문과를 택한 변명거리를 무의식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이과를 전공한 친구들에게는 그런 삭막한 냄새가 상대적으로 많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주관적이지만 말이다. ^^; 솔직히 수학이나 여타 과학과목들은 재미가 정말 없었다. 물론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재무에 문외한이 되어 있는 내게 컴플랙스로 작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 책이 내 책장에 과학관련 책으로 처음 꼽혀지는 책이 아닐까 싶다.
#20년 후의 미래 과학기술 트랜드
랩톱 컴퓨터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발명한 미국의 컴퓨터 파이오니어 앨런 케이(Alan Curtis Kay, 1940~)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이 책을 읽는 사이 직장에서 몇 개월 동안 해왔던 작업에 대한 최종보고를 해야 했는데 마지막 멘트를 이 문구를 인용해서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옮겨봤었다. 물론, 이 책 말미에 이보다 더 좋은 구절이 있어서 이 구절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일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곱씹어 볼 구절이다.  

# 위험 사회에 대처하는 방법
1969년에 미국의 엔지니어 C. 스타(Chauncey Starr)는 기술적 위험 확률을 사회적 이득과 비교·분석했다. 그렇지만 그의 분석은 이러한 손익대차표만으로 파악하기 힘든 변칙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스키를 타다가 죽을 확률이 원자력 발전소 옆에 살다가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더 높은데도 사람들은 전자를 기꺼이 즐기고 후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 연구가 가진 중요한 함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위험에 대해서는 훨씬 관대하다는 것이었다. 즉 자발성은 '위험 체감 지수'를 뚝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으며, 반대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외부에서 강제된 위험에 대해서는 이를 인식하는 정도가 훨씬 증폭되었다.
......
신뢰는 보통 상대방에 대한 기대, 위기나 기회를 받아들이는 태도, 능력에 대한 인정, 배려의 중요성에 대한 동의, 미래의 예측성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책을 추천해 준 그 선배가 광우병에서 비롯된 최근의 사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될 거라고 했던 부분이 이 구절이었구나 싶었다. 홍성욱 교수는 결국 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거짓말로 일삼았던 정부로 인해 전 국민들이 광우병에 대한, 미 쇠고기 수입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거리로 나섰다고 보고 있다. 결국 아무리 광우병에 걸릴 과학적 확률이 엄청나게 낮다고 과학자들이 떠들어 대더라도 그것이 강제되었다고 느끼게 된 순간, 그리고 관련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화에서는 국민들의 공포는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광우병에 대한 불안감으로 촉발된 지난 촛불민심은 종국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신뢰를 접게 만들었다는 것을 MB정권은 알고 있을까? 
광우병 이슈를 어떻게든 잠재우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독재시절처럼 '주동자들'(?)을 색출하고 있고 이젠 승기를 잡았다고 MB정권은 생각하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홍성욱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이는 광우병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 소통의 문제로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MB에 대한 기대? 어제(24일자) 나온 지지율은 25%이다.
위기나 기회를 받아들이는 태도? '명박산성', '초를 누구 돈으로 사는 지 배후를 조사해라', 심지어는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엄마들까지 경찰에 불러 누가 사주한 게 아닌지를 캐묻는 상황이다.
흑자를 달성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을 MB의 친인척이 관련된 외국회사에 팔 계획이 암암리에 진행중에 있다는 등 공기업, 국책금융기관 매각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이 무성하다. 규제란 규제를 다 풀어가면 기업의 적극적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만큼 일자리 창출과 성장에 따른 재분배로 골고루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기회가 오니 공기업 뿐만 아닐 문화영역에까지 대량 낙하산 인사들을 내려 보내고 있다. 대놓고 말이다. 10년만에 찾아온 기회이니 얼마나 벌떼같이 달려들겠는가! 
이젠  종부세도 폐지하겠다고 한다. 결혼해서 전세집에서 살림을 시작한 지 4년이 되어간다. 2년 전에 전세 재계약할 때 3천을 올려서 재계약했다. 결국 모아놓은 돈과 약간의 대출을 더해 재개약을 어렵게 했었다. 이제 조만간 또 2년이 다 되어가서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 눈큰이가 어제 인터넷으로 전세가를 알아봤다. 2년 사이에 또 3천이 올라 있었다. 이미 주택 공급률이 110%를 육박한다고들 하는데... 거기에 종부세까지? 답이 안나온다. 답이...
능력에 대한 인정? 그렇게 국민들이 대운하 건설을 반대한다고 하는대도 경인운하부터 시작해서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MB의 추진능력?
배려의 중요성? 뉴라이트 출신들이 앞장서서 역사교과서를 수정한다고 하고 좌와 우로 이념을 나눠 좌파 빨갱이를 숙청하겠다고까지 하니, 거 참... 정연주 KBS 사장을 법적 임기기간 무시하고 끌어내리지를 않나, 속이 뻔히 드려다보이는 사장 선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시사프로 피디들을 저 낙동강 오리알 지국으로 보내지를 않나.
마지막으로 미래의 예측성? 솔직히 우리나라의 향후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 지 지금으로선 답이 안나온다. 남북관계, 부동산, 교육, 복지, 고학력 청년실업, 출산과 육아... 각각의 영역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적인 예측이 안된다. 어라? 방금 바로 윗 구절에서 불평할 시간 있으면 내가 조금씩 조금씩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해 놓구선 이게 뭔 짓거리란 말인가? 쩝~

# 육식과 광우병에 대해 다시 생각함
값싼 '고기'의 도래가 식량문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축이 곡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육류의 생산이 늘면서 곡물의 소비가 증가했다. 지금 전 세계 곡류의 36%가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이것은 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다. 고기 소비가 제일 많은 미국에서는 곡식의 70~80%가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 또 다른 문제는 가축이 물을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동물 단백질을 생산하는 데에는 같은 양의 식물 단백질을 생산하는 것보다 약 100배의 물이 필요하다. ... 지금 멕시코에서 나는 곡물의 30%는 가축에게 돌아가는 반면, 인구의 22%는 굶주리고 있다. 이렇게 사육된 가축의 고기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도시의 중산층 이상의 계층으로 돌아간다.  ... 광우병의 근본 원인은 결국 인간의 육류 섭취의 급증이다. 육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동물을 먹고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지난 수천 년간 대부분의 사람은 고기가 아닌 곡물을 먹고 생존해왔다.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전 지구적으로 수백억 마리의 가축을 키우고 죽이며, 그 가축을 먹이기 위해 엄청난 곡물을 경작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과잉 섭취한 고기가 비만과 성인병의 원인이라면, 이제 우리 식생활을 한번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까?

평소 육식을 즐겨하는 나로서도 고기를 위해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들이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환경문제에 대해서 최근에 관심을 많이 갖고 되도록이면 실천하려고 하는 나로서는 내 불어나는 뱃살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비상식적인 먹이사슬 구조를 어떻게든 개선시키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의식하면서 먹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패스트푸드 이런 데서는 절대로 먹지 말아야겠다. 정말 나와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하는 구절이다.

# 경계에 선 지식인
대립하는 두 세계를 분석하는 '경계적 지식인' 혹은 '잡종적 지식인'의 필수 요소는 양쪽 세계를 넘나드는 인식적 유창함, 양쪽 세상에 대한 균형 그리고 두 세계 모두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송두율 교수의 학자적 양심과 태도를 존중한다. 그가 2003년에 귀국했을 때 깊이 반성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수사 기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구속될 것을 알면서도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했던 용기를 높이 산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용기 있는 학자는 외부의 압력에 굴해서가 아니라, 내적 성찰을 통새서 자신의 이론과 주장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바꾸는 사람일 것이다. 송두율 교수가 자신의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홍성욱 교수는 분명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알고도 한국사회에 귀국하여 왜곡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 검찰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밝힌 송두율 교수의 학자적 양심과 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송교수 본인이 즐겨(또는 어쩔 수 없이) 쓴 '경계인'의 용어를 인정하기는 꺼리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북에 대한 경계인이 지녀야 할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은 그의 내재적 접근법이 갖는 한계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연구결과들이 나올 당시 남에서 바라본 북의 시각이라는 것이 어떠했는가? 독자들로 하여금 송두율 교수가 단순히 북이 자신을 일정정도 지원하고 인정해줬다는 이유만으로 편협함을 가지고 북에 대해 접근하고 분석했다고 느낄 수도 있게 하는 이러한 저자의 비판은 외로운 이국 땅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러면서도 조국에 대한 애착을 분명 가지고 있던 한 학자의 오래고 고단한 삶 앞에서 너무 피상적인 수준의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송두율교수가 국가보안법이 존재치 않아 남쪽도 왕래를 자주하여 함께 남과 북을 비교 분석할 수 있었다면, 그의 북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에도 일정정도 홍성욱 교수가 말하는 좀 더 거리를 둔, 남쪽의 발전과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만큼이나 북쪽 민중의 삶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야도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보다도 더욱 더 북에 대한 베일이 더 두껍게 쳐져 있던 상황이지 않은가. 각종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터져나오고 그런 상황에서 북의 공식자료를 통한 분석으로 북 사회를 이해하려고 한 것 자체가 왜 문제가 된다고 보는가?
그의 책은, 당시 남쪽에서의 북에 관한 모든 언로가 차단된 세상에서 북한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자 말 그대로 '빨갱이'와 '주체사상'에 급속하게 매몰되지 않는 비교적 객관적인 내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에 대해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도 북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했던 귀중한 연구성과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 전문가들이란 바로 북에서 내건 공식문건들을 통해서 북의 속내를 살피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체제를 이해하려는 정책적 시도가 싹트기 시작한 건 '햇볕정책'부터였다. 그리 오래된 일들이 아니다.
그런데 단순히 찌라시 신문 논조와 똑같이, 헐벗고 가난한 북한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 보지 않고 대부분 북의 공식 문건을 그대로 참고로 해서 북을 바라보며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시각으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몰역사적 비판이다.
이 책 곳곳에서 다양성, 잡종 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다양성과 잡종을 막음으로써 국민 전체의 상상력을 틀어막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냉전논리와 좌우 이념논쟁으로 점철된 남북의 대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접근법으로 남과 북 사이에 이해의 다리를 놓고자 했다고 바라볼 수는 없는가? 국보법이라는 아직도 피를 먹고 싶어하는 이 악법이 존재하고 있는 이 남쪽 나라에 다시 떳떳하게 들어오지 못하고 저 독일 땅에서 후학을 키우지 못하고 외롭게 늙어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경계에 서서 일정정도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지향을 담아 사용하는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통념적 수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좀 가벼운 처사가 아닌가.  '당신의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서 이젠 속내를 밝히라' 는 치기 어린 표현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
과학과 인문학의 연계, 제 학문간 연계의 필요성, 그리고 그에 더해 시민사회와의 소통 속에 과학을 위치시켜야 한다는 홍성욱 교수의 줄기찬 강조는 더욱 파편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보다 나은 삶, 보다 소통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오늘날 깊은 울림이 있는 주장이다.   
며칠 전 한 인문학 강좌를 듣는 데 강사로 나온 철학교수가 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역사학과 문학과 철학이 연계된 인문학적 상상력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과학 내에서의 지나친 세분화 뿐만 아니라 인문학 내에서도 학문 세분화와 그 소통의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는 현상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과학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곳곳에서 등장하는 과학 공식과 용어들은 저자가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고 해도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넘게 과학이라는 영역과 담 쌓고 살아왔던 나에게 이 책은 과학이라는 영역도 인문학적 고민과 함께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 할 내 삶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없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 동안 틈틈이 쓴 에세이들을 묶어서인지 간혹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어 읽는 맛을 떨어뜨린 점도 있지만 앞으로 나의 독서의 폭을 더 넓혀주었음에는 틀림없다.

함께 듣는 음악은 Gary Moore의 "Back to the blues"(2001)앨범의 8번 곡 "The Prophet"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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