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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 글 / 푸른숲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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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IMF가 터진 바로 다음 해인 98년 봄 또는 가을이었을 거다. 이제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서 깜깜해 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모두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누워 자신의 젊은 꿈들을 뭉텅뭉텅 잘라내고 어디든 뽑아주는 곳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 나는 북녘어린이를 돕기 위한 행사에 자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단체에서 자원활동 대학생들을 불러서 양평에서 1박 2일짜리 평화 워크숍을 마련해 주었다.
그 때 월드비전의 오재식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사실 그 당시 그 분이 어떤 분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오히려 직장생활을 한 한참 후인 몇 년 전에야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
훤히 벗겨진 이마에 서글서글한 큰 눈, 그리고 떠나지 않는 미소가 편안함을 주는 어느 중후한 노인양반으로만 비쳐졌다. 사모님과 함께 오셔서 우리들이 진행하는 워크숍을 구석 한 켠에서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시다가 짧막하게 강의를 하신 기억이 있다.  
다른 내용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떠나라'는 내용과 함께, 그 분의 젊은 시절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더 큰 꿈을 꾸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당시 높은 학번의 대열에 끼여 있었고, 이제 곧 졸업을 눈앞에 둔 나는 선생님께 '요즘 대학 분위기가 어떤 지 아시느냐?, 다들 생존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직장에 자신을 구겨넣듯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해외로 갈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당장 나부터도 졸업 후 생계를 위해서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뭐 이런 투정 섞인 질문을 던졌었다.
선생님은 그런 우리 학생들을 좁은 취직의 울타리에 꽁꽁 묶게 하는 대학 시스템이 문제라면서 이럴때일수록 대학은 해외체험활동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해서 학생들에게 더 넓은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고 함께 참여하신 몇몇 교수님들에게 말씀하시는 걸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하셨다.

이 책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의 저자인 한비야씨가 책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둘 꼽고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오재식 월드비전 회장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오재식 회장의 추천으로 월드비전 활동을 시작한 한비야씨가 활동내용을 적어서 기록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오지탐험가에서 긴급구호활동가로 대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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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당시 나는 내가 대학 생활 중에 이렇게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인냥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사하는 즐거움, 함께 하는 보람, 그리고 북녘친구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어린이들을 만나는 것이 내겐 큰 삶의 힘이 되던 때이기도 했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아! 그 때 오재식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바로 이거였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더 큰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데, 나 또한 우물안에서 펄쩍펄쩍이며 우물 테두리가 내 삶의 구획된 경계인 것마냥 생각하고 질문했으니 그런 개구리에게 뭐라 딱히 답해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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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밖으로...'를 읽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들뜬다. 한비야의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져 온다. 가슴이 시큰해지기도 하고, 구호활동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대목을 만나면 마치 내 일마냥 괜히 즐겁고 보람있게 느껴졌다. 작가가 독자의 마음의 결을 따라 대단히 글을 잘 쓴다는 능력도 주된 요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열정이 읽는이의 마음을 탕탕 요동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고된 현장 활동 속에서 틈틈히 기록을 했던 글들을 다듬어서인지 현장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도 이 책이 호소력을 갖는 매력이니 ... 이 모두 작가의 열정과 그 열정으로 불살라진 노력들이 아니었으면 '뭐! 이런 삶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다소 밋밋한 책정도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눈큰이를 기다리다가 눈큰이가 들어서면서 나보고 "자기야! '지도밖으로 행군하라'가 100쇄를 넘었대. 그게 그렇게 재밌어?"라고 말하길래 놀랐다. 100쇄라니...
물론, 나도 이 책이 갖는 놀라운 흡입력과, '연봉이 높은 순'이 '잘 사는 순'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잣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좋은 서적이라고 절대공감한다. 그래서 눈큰이에게도 '응! 그 책 읽으면 마음이 한 동안 들떠'라고 읽을 것을 권했고, 오늘부터 눈큰이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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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케냐)의 이동 병원에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를 만나려면 대통령도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런 강촌에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었다.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돈을 쫓아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에도 분명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고,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는 글이나 영상을 접하면 숙연해지고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면서 나직이 읊조린다. '그래!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며 대리만족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멀리 내다볼 것 없이 내가 그렇다.

# 아프가니스탄
"내가 뭐 해줄 것 없어요?"
"그거 한번 해볼까요?"
"와, 참 잘했어요"
어느 때는 과장되게, 어느 때는 잔잔하게 하는 이 세 마디에는 내가 요원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었다. 진심어린 배려, 도전 정신, 그리고 칭찬과 격려.

요원으로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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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기스라는 아프가니스탄 산골 깊숙한 곳에 한 아이(압둘)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도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한다. 그 아이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영양죽을 먹이는 일을 이 주 가까이 했지만 먹인 것도 다 토하고 설사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주삿바늘로 엉덩이를 찌르는데도 울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그 큰 눈만 껌뻑였다.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 것인가? 한비야는 이 주 지나 떠나는 날까지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바드기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치료급식소를 둘러보고는 압둘에게로 갔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양손의 둘째손가락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힘없이 누워있던 아이가 갑자기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꽉, 깨무는 게 아닌가. 따끔하다. ... 마치 "걱정 마세요. 이제 나 힘 세졌어요"라며 힘 자랑을 하는 것 같다. 내 손가락에는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눈물을 참지 못했다. 바보같이.

괜히 나도 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바보같이. 이 글을 읽는 내내 10여년 전 북녘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 동영상 장면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다. 앉아있을 힘이 없어 탁아소 선생이 팔을 등에 대어야만 앉아있을 수 있는 아이의 모습이 강렬하게 내 머리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파리 쫓을 힘이 없어 그냥 이러저리 파고드는 파리 떼에 묻혀 허연 눈만 뻐끔뻐끔 뜨고 있던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또 어떻고... 그 영상들이 떠오르면서 나 또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정말 세상이 너무 아프다.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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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해외 원조에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원조받은 액수는 총 130억 달러 정도이고, 지금까지 원조한 총액은 약 22억 달러다. 갚아야 할 '은혜의 빚'이 이렇게 많은데도 우리는 국민 총소득의 0.06퍼센트, 1인당 한 달에 4백 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다. 이것은 유엔이 권장하는 0.7퍼센트는 물론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그리스의 0.17퍼센트, 포르투갈의 0.25퍼센트와 비교해도 처지는 수치이며, 1위인 덴마크는 무려 0.91퍼센트이다.

누구나 다 긴급구호활동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비야는 책 끝머리에 조금은 차갑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 지금 나의 상황에서는 긴급구호활동가는 꿈도 못꾼다. 그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영어조차 못하니 말 다했다.
그러니 나의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돈을 통한 기부활동이다.
얼마 전 회사사람들 몇 명과 함께 작은 행사를 통해 한푼 두푼 모은 돈을 가지고 책을 사서 어렵게 지내고 있는 어린이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현금으로 주는 것보다 우리는 책을 통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취지를 설명하고 새책들을 한박스 들고 찾아간 곳이었지만, 물론 책도 필요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당장 지불해야 할 월세며 생활비였다. 단순히 돈만 입금하는 편리함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못한다고 넋놓고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즉 금전적인 지원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야지만 훗날 더 큰 나눔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부도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나누자!

# 세계의 화약고 -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
이라키 : 중간 동네에서 진짜 잘나가던 애였는데 미국이가 아즈라엘 편을 들어주면서 틀어졌음. 미국이가 이웃집 이란이를 혼내줄 때는 친했으나 중간 동네 대장 자리를 노리자 미국이한테 팽당했음. 요즘은 미국이가 심심할 때 두들겨 패는 샌드백 신세다.

아즈라엘과 빨레스타인 : 교실 중간 자리가 옛날에 자기 자리였다고 원래 앉아 있던 빨레스타인을 마구 쥐어패고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음. 반장하고 막역한 사이라서 눈에 뵈는 것이 없음. 머리가 좋고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음. 중간파 열 몇 명과 일대 다수로 싸워 이겨 학교의 전설로 남았다.

북한이 : 키는 작아도 깡과 자존심은 엄청나게 강해서 반장한테도 마구 대듬. 남한하고는 일란성 쌍둥이. 요즘에는 '핵'이라는 무시무시한 방귀탄을 들고 반 전체를 협박. 때문에 반장인 미국이랑 유엔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려 했으나 배 째라며 버티고 있다.

미국이 : 학급 반장. 공부 진짜 잘함. 싸움은 더 잘함. 집안도 갑부라서 반 아이들이 설설 김. 하지만 반의 사소한 일에까지 참견해서 욕을 많이 먹고 있음. 그래도 어쩔 수 없음. 건들면 죽음이니까. 최근에 한 친구(이라키)가 제대로 걸려서 개 패듯이 두들겨 패고 있다.

유엔 : 담임선생님. 미국이네서 촌지 받은 거 때문에 싫어도 미국이 말을 잘 들어줌. 최근 미국이가 말 안 듣고 방자하게 굴어도 가만히 놔둬서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음.

이 책 속에는 이와 같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소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책을 무겁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호흡을 할 수 있게 하는 매력 중 하나이다.
매번 우울한 일들과 힘들게 활동하는 이야기로만 구성했다면 사람들이 버거워하고 '그래! 한비야,너니까 할 수 있다' 하며 남일로만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곳곳에서 씩~ 웃게 만드는 밝은 이야기와 우스갯거리를 들려주니 '어! 이거! 이런 재미도 있구나' '야!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야'라고 공감하고 기꺼이 함께 하고픈 생각을 마구 마구 샘솟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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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요즘에는 기업에서 이미지 차원에서도 해외 활동을 권장하는 추세이고, 또 이런 활동을 한 사람들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인것 같다. 오직 연봉 높은 회사만 바라보고 대학 입학부터 준비해 온 사람과 이렇게 다양하게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 중에서 인재를 뽑으라면 난 후자를 택하고 싶다. 내가 경영자라면 말이다. 그 사람은 함께있는 즐거움을 주고 서로를 이끌어주는 진정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할 때 그 조직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
근데, 한비야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조직 생활과는 잘 어울리지는 않겠구나 싶다.
뭐랄까? '착한 야생마'라고 해야 하나?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사람을 들뜨고 흥분시키게 만드는 결코 나쁘지 않은 매력이 있으니 아무래도 개척가의 길을 계속 가야 할 듯 싶다.
긴급구호팀장으로 한비야가 활동하고 있는 사이 서울에 있는 같은 조직 팀원들은 그 자금을 대고, 실무적인 회계처리 등 제반 사항을 계속 챙겨야 하니 같은 조직이라고 하더라도 이거 너무 차이가 나는 활동 아닌가.
그래서 책 어느 부분엔가 각고의 노력끝에 서울에 있는 팀원과 연락을 취했는데 팀원이 무뚝뚝하게 사무적으로 받고 전화를 끊어 매우 서운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난 일정정도 그 팀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비야씨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이 서평 초반의 내 대학시절 경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 자신과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이 것 하나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을 읽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함께 듣는 음악은 Elie Semoun의 "Chansons"(2004)앨범 중 3번 곡 "La Minute De Silence"라는 곡이다. Lisa Ekdahl과 듀엣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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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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