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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글 / 길 (2007)


이 두 번째 '사회'라는 풍경에서 짐멜은 사회 자체가 국가와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개인과 개인간의 상호작용들의 얽힘, 즉 상호작용들의 거미줄이라는 독특한 정의를 해 들어간다. 존재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변화무쌍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끊임없이 얽히고 섥히는 바람과 같은 것? 

#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사회화로서의 사회 (" "부분은 짐멜 원문, 이하 동일함)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해 시기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같이 점심을 먹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 공감하거나 또는 반감을 가지면서 접촉한다. 이타적인 행위에 대한 감사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묶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고,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서 옷을 입고 치장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또는 지속적인,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덧없는 또는 중대한 이 모든 무수한 관계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함께 묶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소멸되며, 새로이 시작되고, 다른 관계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그것들과 뒤섞인다."
이러한 논의에 입각해 짐멜은 이제 사회에 대한 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고정적이고 거시적인 것으로부터 심리학적이고 미시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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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개인들 사이의 정신적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는 어디까지나 개인들을 통해서 실재적인 것이 된다. 달리 말해 사회는 "주관적 영혼들의 객관적 형식"이다. 바로 사회의 이러한 정신적-주관적 측면을 짐멜은 '심리학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첫 번째 풍경에서도 설명했듯이 당시 독일 사회과학은 철저하게 국가 중심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것들을 '상호작용'으로 해체시켜버리는 짐멜의 학문적 주장은 당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국가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빌헬름 시대 독일의 역사학과 경제학은 제국(황제), 귀족, 관료집단 및 부르주아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대변하고 있었다. 과학 또는 정신이 정치권력 및 경제권력과 대연정을 체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국가 중심적 지적 풍토는 당연히 짐멜의 사회 중심적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거나 국가적인 것에서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은 독립적인 개별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 사회에 관한 모든 과학은 궁극적으로 국가과학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이에 반해 짐멜은 사회적인 것을 단순히 국가적인 것으로 환원하거나 국가적인 것에서 도출하는 것은 현대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일면적이고 협소하게 만든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도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된다. 즉 개인이 상호작용을 하는 수단이자 도구가 된다. 상호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의 일부분이다.

짐멜에게 내가 매력을 느낀 것은 '돈'에 대한 그의 탐구가 출발점이었지만, 결국에는 돈과 시간으로 중무장한 대도시에 사는 우리네 인간들의 영혼에서 끊임없이 느껴지는 허무와 갈망에 대해 천착해 들어간 그의 탁월한 분석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 사회적 공간, 도시와 대도시
도시는 단순히 정치, 행정, 군사 또는 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현대인의 존재와 삶 그리고 행위를 결정적으로 각인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사회화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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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대도시에 대한 짐멜의 연구는 주로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삶과 일상적 상호작용에 대해 이들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아무튼 도시가 현대세계의 구심점이라면, 돈은 이 세계를 원심적으로 확산시킨다. 이 두 개별적 영역은 현대의 강화와 확장에 이바지한다.

여기서 잠깐 짐멜이 말하는 '사회적 경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아마도 대도시 속에서 무수한 관계를 맺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자기만의 공간, 경계지움에 극도로 예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공간과 경계지움의 문제는 근대에 들어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리라.  

#-1. 공간의 사회학
짐멜에 의하면 사회적 경계는 예술작품의 액자와 유사하다. 액자는 "예술작품을 외부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내적으로 결합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액자는 "그 내부에 외부세계의 특징과 운동에 편입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고유한 규범만 따르는 세계가 존재함을 널리 알린다." 결국 액자는 "예술작품의 자족적 통일성"을 상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집단을 공간적으로 둘러싸는 경계는 그 내부에 존재하는 개인을 내적으로 결합시키는 "구심력"이자 "정신적 응집력"으로 기능한다. ... 사회집단의 공간적 액자틀이 좁으냐 아니면 넓으냐에 따라서, 그리고 외부의 다른 사회집단과의 관계가 개방적이냐 아니면 폐쇄적이냐에 따라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유형과 강도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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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인간정신이 추상화되고 지성화된 결과이다. 추상성과 지성은 "중립성의 원리"로서,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추상적이고 지성적인 정신능력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 접근과 화해를 가능케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냉담하고 때로는 소외시키는 객관성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적이고 지성적인 정신능력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는 현대 대도시인들은 과연 그렇게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진정성 또는 본질을 드러내지 않고 거리를 두며사는 것으로 과연 만족할 수 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대도시와 정신적 삶
짐멜에게 대도시는 오히려 화폐경제, 상품과 재화의 분배와 교환, 노동분업, 직업적 전문화, 객관문화,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상호작용의 복합체를 의미한다. 대도시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상호작용하는 거대한 공간이자 "거대한 네트워크"인 것이다. 그런데 짐멜의 관심사는 단순히 거기에 머물지 않고 대도시가 인간의 의식과 심리상태, 개체성, 인격과 자유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짐멜의 대도시 연구는 주체의 근대화 또는 근대적 자아의 발달에 대한 분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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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지성화는 다름아닌 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촌과 도시에서의 삶을 비교해보라. 농촌사람이 서로에게 더욱 감정적으로 관계맺기를 하는 반면, 도시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는 직장인들이 동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을 자제한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이다. 화폐경제, 도시, 이성, 나아가 수량으로 대변하는 여러 삶의 제도들... 세상에 사상자의 정도도 피해액이라는 액수로 환산하는 세상 아닌가! 인격적 범죄의 대가도 벌금형으로 액수화 하는 세상이다. 민주주의도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 개개인을 1로 보고 만들어진 정치제도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경제와 정치체제에서 같은 쌍둥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민주주의가 과연 적합한 정치체제인지 아직까지 답을 못 내리겠다.

"화폐경제와 이성의 지배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기서는 흔히 형식상의 정의와 몰인정한 엄격성이 짝을 이룬다.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람은 개별적인 모든 것에 대해 냉담하다. 그 이유는 개별적인 것 안에서는 논리적 이성으로 다 포착될 수 없는 관계와 반응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폐원칙에 현상의 개별성이 자리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화폐는 모든 현상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성질과 특성을 단지 수량적인 문제로 평준화하는 교환가치만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는 모두 그들의 개체성에 기초하는 반면, 이성적 관계는 사람들을 마치 숫자를 대하는 것처럼, 즉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업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자체로는 무관한 요소처럼 다룬다. 대도시인이 배달원이나 고객, 심부름꾼, 혹은 의무적 인간관계의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각자의 개체성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풍부한 감정이 묻어나게 되는 소규모 집단과 다르다. 이 집단에서는 상호급부에 대한 객관적 계산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화폐경제와 더불어 대도시에서는 고객을 위한 생산이 시장을 위한 생산, 즉 "생산자가 보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생산"에 의해 대체된다. 그 결과 "고객과 생산자 양측의 이해관계는 몰인정한 객관성을 띠게 되고 이성적 계산에 입각한 경제적 이기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개인적 관계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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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진대, 일부 미국 쇠고기 수입업자들의 인격적 진정성이 담긴 서약을 믿으라고? 그들 개개인을 진정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장을 위한 생산, 경제적 이기주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토대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부처가 되라는 꼴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이전 어느 시대에서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카메라 한대를 가지고 몇 분 간격으로 찍은 사진들을 빠르게 돌리는 영상을 보면 정말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엄청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이 대도시이다. 이러한 대도시의 양태를 가능케 했던 것을 짐멜은 다름 아닌 시계의 대중화로 보고 있다.

"전형적인 대도시인의 인간관계와 업무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결과 그들의 관계나 활동들은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약속이나 업무 추진에 있어서 정확을 기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는 수습하기 어려운 혼돈상태로 붕괴될 것이다. 만약 베를린에 있는 모든 시곗바늘이 단 한 시간이라도 느닷없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간다면, 베를린 전체의 경제관계와 그 밖의 모든 관계는 오랜 기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외적인 요소로 보일지는 모르나, 대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다리거나 헛걸음치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를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대도시에서 사는 기술은 모든 활동과 상호관계가 확고하고 초주관적인 시간의 도식을 아주 정확히 따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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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 직장 동료선배와 저녁을 같이 먹는데, 그 선배가 밥먹는 도중에도 한 숨을 푹푹 쉬는 것이다. 그냥 스스로가 답답하단다. 뭐 여러 이유가 있을텐데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니깐 답은 알 수 없지만 난 속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사실 답답함을 많이 느끼면서 살고 있어요'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먹고 살만하니까 배부른 소릴 지껄인다고?

"건물과 교육시설들, 공간을 뛰어넘는 기술의 기적과 편의시실들, 공동체적 삶의 형태들 그리고 국가를 나타내는 제도들 안에 엄청난 양의 정신이 비인격적인 결정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그것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관심을 끄는 자극들이 도처에서 밀려오고 시간과 의식의 충전을 통해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개인의 삶은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점점 더 개인적 색채나 비교 불가능한 특성을 몰아내는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채워진다. 그 결과 개인적인 것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자신의 개성과 특성을 짜내야 한다. 즉 누군가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경우라도 개인적인 것을 과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객관문화의 우세 때문에 주관문화가 위축되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설교자들, 특히 누구보다 니체가 대도시를 격렬하게 미워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들이 대도시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을 받고, 바로 대도시인들에게 그들의 충족되지 못한 갈망의 선지자이자 구원자로 비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속에서는 지성화, 추상화로 이루어진 의식 저편에 있는, 아무런 목적 없이 단지 만나는 것 자체로서 만족을 느끼는 그러한 만남을 통한 상호작용에 대한 갈망이 웅크리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지만, 정작 아파트 문을 열고 깜깜한 거실에 서면 '참~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과거 어린 시절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던 그 학창시절의 벗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물론 그건 마음속에서 포장한 이상적 상황이기도 하다. 막상 그 친구들을 만나면 '너도 그럭저럭 사는구나'를 확인하고 쓸쓸해지게 되는 건 매한가지이니까.

# 시민사회
개인이 상호작용하는 곳 어디서나 사회가 존재한다면, 친교는 "좁은 의미에서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의미와 삶의 원리에 따르면, ... 서로서로 즐거움을 주고 자극을 주며 기분 좋게 하는 경우에 비로소" 형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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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는 노동분업과 직업적 전문화의 피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공간으로서 시민계층의 구성원들에게 인격적 관계를 맺고 노동과 직업세계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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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민주주의적 사회이다. 친교에서는 한편으로 개인의 사회지위, 역할 또는 직업,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실제적 이해관계, 목적, 동기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즉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사회화의 내용은 사상된다. 친교는 누구나 순수한 인간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인격적인 관계와 상호작용이 추구되며, 오로지 고상한 대화와 교제 그리고 유희가 추구된다. 친교는 짐멜에 의하면 직업세계로부터 해방된 시민계층의 구성원들이 놀이 형식을 통해 남과 더불어 그리고 남을 위해 의사소통을 하고 상호용을 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이러한 친교를 맺기 위해 많은 도시인들은 비밀적인 클럽에도 가입하여 그 속에서 자신의 인격적 일부를 스스럼 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또한 극단적인 형식일텐데(입장에 따라서는 문란하게 비춰질 수 밖에 없는) 성적 유희 형태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독특한 복장과 악세서리, 심지어는 얼굴 이곳 저곳에 구멍을 뚫는 피어싱을 하는 사람 등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물론 비밀사회만큼이나 증가하고 있다. 과연, 이 시간과 돈과 이성이 지배하는 정말 꽉 막힌 도시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며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함께 듣는 음악은 영화 "Canone Inverso : Making Love"의 Soundtrack(2001) 앨범 중 16번 곡 "Piccoli Studi"라는 곡이다. 영화는 못보고 음악만 듣다니... 어디서 볼 수 없을까? Ennio Morricone가 음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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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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