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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어빈 얄롬 | 역자 임옥희 | 출판사 리더스북 (2006)

브로이어 박사와의 거래에 따라 니체는 로종 클리닉에 입원하게 된다. 브로이어는 철저하게 니체의 육체적 질병에 대한 검사 및 치료를 하고, 니체는 브로이어가 지닌 삶에 대한 불안과 한 여자에 대한 강박을 치료하고자 브로이어와의 지난한 상담을 시작한다. 브로이어는 니체가 자신을 편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고민거리들을 숨김없이 과감하게 다 이야기한다. 그의 환자였던 베르타라는 여인을 아직도 못잊어하고 있고, 꿈에서나 진료실에서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온다는 얘기 등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니체 또한 자신의 이야기(정확히는 루 살로메와의 관계)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도록 멍석을 깔아놓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다. 단 브로이어의 불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

두려움은 어둠에서 잉태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은 별과 같은 겁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낮의 눈부신 태양에 가려져 있을 따름이지요.
......
신 없는 자유로부터 성장과 흥분을 만끽하는 데 가담한 소수가 되기로 선택했다면, 최대의 고통을 맛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없는 자유와 최대의 고통은 서로 묶여 있는 것으로 분리된 경험이 아닙니다! 고통을 덜 받고 싶다면 견인주의자들처럼 최고의 쾌락을 포기하고 줄여야 합니다.
......
당신이 이 낯선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면 무엇을 생각했을 것 같냐고 물었지요. 제발, 자리 잡고 앉아서 눈을 감고 나와 더불어 사고 실험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저 높은 곳에 올라앉아봅시다. 산꼭대기라면 좋겠지요. 함께 관찰해보죠. 저기, 저 멀리 있는 한 남자를 우리는 봅니다. 지적이면서도 예민한 정신을 가진 남자를요. ... 한 때 그는 자기 실존의 공포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너무 많은 것을 보았을 겁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아가리를 보았을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무가치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 한 점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라는 것도 보았을 겁니다. 아니면, 인생의 무상함과 우연성을 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육욕이 공포를 진정시켜주던 그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두려움은 너무 생생하고 끔찍합니다. 따라서 그는 육욕을 자기 마음속에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허나 육욕이라는 잔혹한 경쟁자는 다른 모든 생각들을 몽땅 집어삼켜버리지요. 육욕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오로지 갈망하고 회상할 줄밖에는요. 그래서 이 남자는 탐욕스럽게 베르타, 그 불구자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세상을 들여다볼 수도 없게 되죠. 베르타가 손가락과 입술을 움직이던 모습, 어떻게 옷을 벗고, 어떻게 걸었고, 어떻게 이야기했으며, 어떻게 절뚝거리고, 더듬거렸던가. 이런 경이적인 모습을 회상하는 데 온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깁니다. 그래서 그의 전 존재가 그처럼 사소한 것들로 소모되어버립니다. 고매한 사상을 위해 건설했던 위대한 대로들이 쓰레기로 막히게 됩니다. 한 때는 위대한 사상을 생각할 수 있었던 남자의 회상은 이제 점점 흐릿흐릿해지고 조만간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공포 또한 사라집니다. 오로지 마음을 갉아먹는 잘못된 불안과 더불어 남게 됩니다. 당황한 그는 마음의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 불안의 원천을 찾고자 합니다. 쓰레기 더미를 샅샅이 뒤지는 것, 마치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뒤지는 것이 오늘 그가 발견한 방법입니다. 심지어 그는 나더러 자기와 함께 쓰레기 더미를 뒤지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

니체의 이러한 이야기들은 분명 브로이어에게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브로이어가 여기서 무너진다면 니체를 치료하고자 의도했던 목적은 물거품이 된다. 자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니체 당신도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는 괴로움과 절망을 자신에게 보여달라는 것인데 아직까지도 니체는 그 요청에는 묵묵부답이다.  

(브로이어) "프리드리히, 저도 그런 대화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내 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묻고 있거든요.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는가?' 우리의 논의는 감지될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없습니다. 내 가슴에서 고동치는 맥박과 내 무거운 머릿속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목표와 인생의 목적에 관한 우리의 추상적인 대화는 내 고통과는 무관합니다"

이야기는 이 둘의 상담과정으로 계속 전개되어진다. 상담과정에서 브로이어의 경우는 니체를 진료하겠다는 의지는 약해지고 점점 자신이 니체의 환자가 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게 나쁜 것이 아니다. 브로이어 자신과 니체가 둘 다 서로 배려해주는 닮은 관계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호랑이 무늬의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비비면서 같은 그릇의 우유를 핥아먹고 있는' 모습으로 브로이어는 둘의 관계를 정의해 나간다.
이 책은 중반기 내내 둘의 상담과정이 끝나면 브로이어가 쓴 연구노트와 니체가 쓴 연구노트를 통해 각자의 입장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니체의 연구노트 중에서...

증상은 불안이 정신의 깊은 심연에서 폭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일 따름이다. 유한함에 대한 깊은 근심, 신의 죽음, 고립, 목적, 자유. 일생 동안 가둬둔 깊은 근심이 이제 족쇄를 풀고 정신의 창과 문을 두드린다. 그들 증상은 뭔가 얘기하고 싶어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살아남고 싶어한다!
... 도스프예프스키는 그 책에서 "어떤 것은 친구들에게조차 얘기할 수 있다. 또 어떤 것은 친구들에게조차 얘기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얘기할 수 없다."고 썼다! 지금 브로이어 내부에서 폭발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조차 한 번도 말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 베르타는 도피, 위험한 도피, 안전한 삶이라는 위험으로부터의 도피다. 그리고 열정이자 신비이며 마술이다. 그녀는 브로이어의 사형선고에 집행유예를 내리는 위대한 해방자다.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가졌으며 삶의 요람이자 위대한 고해사제다. 그래서 그의 내면에 있는 동물성과 야만성을 용서해준다. 그녀는 꿈속에서 영속적인 사랑, 영원한 동반자, 영구불변한 존재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그에게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확실한 승리를 보장해준다. 그녀는 시간의 폭력에 대한 방패이자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고 지하의 심연으로부터 안전을 그에게 보장한다.
... 교구의 사제들은 아버지처럼 늘 사탄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한다. 그들은 사탄이 신앙의 적이라고 가르치며, 신앙심을 허물기 위해 사탄은 어떤 가면이라도 쓸 수 있다고 가르친다. 회의와 의심이라는 가면보다 더 음험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신성한 회의론자들은 누가 보호해줄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과 예속에 대한 증오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알려줄 것인가? 나의 외침인가? 우리 회의론자에겐 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혹을 없애고 가장 교묘한 곳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놓는 사탄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없애지만 신의 대용품으로서 선생, 예술가, 미인을 신성시한다. ...
우리 회의론자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강해야 한다. 종교적인 충동은 맹렬하다. ... 나의 외침은 회의론자들의 사제가 되는 것일까? 어떤 가면을 썼더라도 종교적 소망의 정체를 탐색하고 파괴하는 데 일생을 바쳐야 하는가? 적은 만만찮다. 신앙의 불꽃은 죽음과 망각, 무의미에 대한 공포를 연료로 하여 끊임없이 불타오른다. ....
베르타가 어떤 의미로서가 아닌 베르타 그 자체로 여겨질 때까지 의미의 껍질을 하나씩하나씩 벗겨내야 한다. 그녀에게 덧붙여진 의미의 결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낼 때 비로소 브로이어는 그녀 역시 두려움에 떠는 헐벗은 인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녀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녀, 그,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둘 사이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어느 날 둘은 브로이어의 부모가 잠들어 있는 묘지 주변을 산책하게 된다. 그곳에서 니체는 우연히 브로이어의 어머니의 이름 또한 베르타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 숨겨진 사실과 관련하여 무의식에 대해 언급을 한다.
"하르트만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지요. 그는 무의식의 스물네 가지 양상을 설명하는데, 기억과 정신과정 중 가장 큰 부분은 틀림없이 의식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난 그 말에 동의해요. ... 삶, 진짜 삶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건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거예요. 의식은 존재를 덮고 있는 반투명 표피에 불과할 뿐, 훈련된 눈으로 보면 그 표피 아래 있는 원초적인 힘, 본능, 권력에의 의지라는 엔진 자체가 보일 테니까요. 당신도 어제 베르타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면서 무의식을 얘기했었죠. ... 그녀의 가장 은밀한 방, 부패가 전혀 없는 성소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당신의 이미지가 영원히 그녀의 마음속에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순간에 당신 이미지는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요? 거대한 무의식적 기억의 저장고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산책을 마칠 때 즈음해서 니체는 브로이어에게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살아 있을 때 살아라! 삶을 최대한 누릴 때 죽는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올바른 때에 살지 못하면 올바른 때 죽지도 못한다."
......
"당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았나요? 아니면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겁니까?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선택당했나요? 마음에 들어요? 아니면 후회합니까? 내 질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겁니다. 다 살아버린 겁니까? 가족에게 큰일이 생기는데도 무력하게 기도하면서 서 있었던 아버지에 관한 꿈, 기억납니까? 혹시 아버지를 닮은 것은 아닌가요? 결코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슬퍼하면서 힘없이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
"시간은 게걸스러운 포식자거든요.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아요. 당신에게 할당된 삶대로 살았다는 게 얼마나 끔찍합니까!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자유를 외쳐본 적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하겠소!"
......
"영겁회귀란 당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순간마다 그 행위를 영원히 또한 기꺼이 선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지 않은 행동, 사산된 사상, 하지 않은 선택, 그 모든 것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삶은 당신 내면에 영원히 그대로 혹처럼 남아 있어요. 귀 기울이지 않았던 양심의 목소리가 영원히 당신에게 소리칠 것입니다."
......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 내게 그런 말을 얼마나 자주 했습니까? 한 번도 제대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고 얼마나 한탄을 했습니까? 당신의 친절과 의무, 성실성, 이 모든 것이 당신을 가두는 감옥의 창살입니다. 그런 작은 미덕에 갇혀 당신은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겁니다. 당신의 감춰진 사악함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일부만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본능 역시 자유를 갈구하기 때문이에요. 동굴 속에 있는 들개의 본성 말이죠. 그것들이 자유를 부르짖는다니까요."
......
"아이들을 키우려면 자신부터 먼저 커져야죠.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동물적 욕구 때문에 혹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결핍을 땜질할 요량으로 아이들을 키우게 됩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신의 분신이나 또 다른 브로이어가 아니라, 좀더 고귀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겁니다. 그건 창조자를 생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부인은 어떤가요? 그녀 역시 당신처럼 결혼이라는 감옥에 갖혀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결혼은 감옥이 아니라 좀더 고귀한 뭔가를 키우는 정원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포기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신성한 결혼의 의무를 떨쳐버리고 본인의 내부에서 부르짖는 자유를 찾으러 떠나라고 니체는 이야기한다. 브로이어는 너무나 괴로웠다. 자신이 그동안 의사생활을 하면서 지켜왔던 명성,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 등 자신을 외부에 알렸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 자신의 삶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대할 수 있다고...
놀랍게도 며칠도 되지 않아 브로이어는 결국 니체의 충고를 따라 아내에게, 그리고 프로이트 등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여행가방 하나만을 챙겨 집을 나서 기차에 몸을 싣는다. 아내는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않고 그에게 저주를 내리고 모든 사람들 또한 잘 나가던 그가 갑자기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훌훌 털어버린 그에게 과연 무슨 일과 생각의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소설은 막판 대 반전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것은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모든 소설책을 다 읽어내리면서 브로이어와 니체의 사고의 흐름을 함께 했던 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동안 후반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프로이트의 등장, 그리고 니체의 눈물... 정말 끝까지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엄청난 반전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한 참 읽고 있는 도중에야 요제프 브로이어라는 학자가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니체와 프로이트를 연결해주는 가공의 인물인 줄 알고 있었기에 내 신경의 초점은 니체에,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프로이트에 집중에 있었다. 사실 브로이어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였다는 사실 자체는 내가 이 소설을 읽는데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갖은 이유는 니체를 알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브로이어가 니체를 치료하려고 하던 도중에 종국에는 니체에게 치료를 받게 되는 과정처럼 나또한 니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브로이어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레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 브로이어의 모습이 기실은 현대를 살아가고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느껴졌고 그에 따라 그에 대한 감정이입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불안, (무언가 알 수 없는) 갈증, 그리고 탐닉 등... 누구든 지금 이순간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 틀을 깨뜨려버리고 훨훨 자유롭고 싶어한다. 가끔씩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 브로이어의 최종 선택 이후의 모습이 어떨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브로이어는 진실로 자유를 찾았을까? 웃음을 지으며 자기 자신을 대하는 '고통의 희열'을 경험했을까?
정말 엄청난 소설이다. 아마 금년에 내가 무슨 소설을 읽던지 2008년 내가 읽은 최고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600페이지라는 소설의 길이가 처음 책을 접할 때 머뭇거리게 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무엇보다 브로이어와 니체가 만났었다는 허구를 제외하고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존하는 인물이었고 소설처럼 딱 맞지는 않지만 일정정도 유사한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뿜어져 나온 이러한 소설쓰기가 얼마나 엄청난 학문적 작업이었을 지 생각하면 이 어빈 얄롬이라는 작가, 아니 학자의 집요한 노력에 끝없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작가 후기에서 앙드레 지드의 한 구절 "역사는 일어났던 허구다. 반면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라는 표현을 빌어 그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 그렇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허구다. 내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심리치료 분야에서 일어나는 있을 법하지 않은 내력들을 참조해보건대, 이 책에 나온 모든 사건들은 역사가 역사의 축으로부터 약간만 회전했다면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함께 듣는 음악은 Bebel Gilberto의 "Tanto Tempo"(2000)앨범 중 7번 곡 "So Nice(Summer Samb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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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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