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안토니오가 낑낑거리면서 뒤척여서 오줌을 뉘고 다시 재우고 난 후였다. 어제밤 안토니오를 재우다 그냥 잠이 들어버려 양치질을 하지 못한 입안이 텁텁했다. 양치질을 하고 난 후 널지 못한 빨래를 널고 때지난 신문 하루치를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다. 


한 달 전쯤에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상임이사가 새로 들어왔다. 상임이사는 그동안 조직이 너무 정체되어 있고 효율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 직제를 개편하고 그동안 항아리 구조의 문제를 가졌던 조직체계를 슬림화하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 막혀있는 '소통'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직원 한명 한명과 단독 면담까지 했다. 면담과정에서 많은 직원들에게 곧 직제가 개편되면 그동안 윗선에서 관리자로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를 내보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평소 나 또한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는 조직에서 간부가 너무 과도하게 많은 것을 조직의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사람을 자른다'는 것이 경영자의 입장이 된 지금에서는 마음이 혼란스럽다. 몇 차례 우리 조직은 설립 이후 내홍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뀌었다. 지금 새로 들어온 상임이사 또한 일전에 그 내홍으로 조직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온 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간다고 해서 조직이 다시 발전적 조직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간부들의 수를 줄이고 실행력이 높은 평직원의 수를 높임으로써 일정정도의 역동성을 되찾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목표 설정이다. 직원들과 공유하는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채, 조직체계에 문제가 많으니 사람을 일단 자르고 보자는 발상은 위험하다. '구조조정'은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하거늘 목표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왜 이문제를 시급하게 공론화하고 조직을 술렁거리게 하는 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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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이사는 전직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각 직급별 토론을 통해 우리 조직에 맞는 이상적인 조직체계안을 각자 만들도록 했다. 그 일련의 진행실무를 내가 맡았다. 이렇게 하면 조직에 대해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고 그만큼 조직 내의 여러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화하여 직원들이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원하는 과정과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나는 몇몇 직원들을 선발해서 그들로 하여금 기존 조직 진단 자료를 참고로 해서 심도 깊은 논의들을 진행시켜 안을 만드는 'TF Team 구성안'을 제시했지만, 기존의 모든 TF Team의 운영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각 직급별로 나온 안은 예상대로 너무 부실했고, 조직이 처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숫자 놀이'에 불과했다. 일부는 공공연히 퇴출대상자로 지목된 자들이었고, 일부는 조직 전체에 대해 심도깊게 고민해 본 경험이 없는 자들이었다. 잘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스스로의 위치를 제거하는 직제를 도출하는 것도 무리였고, 자신의 업무만 신경쓰던 자들에게서 조직 전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은 직제를 도출하라고 한 것도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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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이해관계에 멀리 있으면서 조직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고 조직의 실질적인 여론 형성에 주도적인 자들이 취한 무책임한 자세에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본인 스스로가 조직에 대해 옳은 소리를 냈다가 (현 이사장 또는 전임 상임임원으로부터) 제재를 당했거나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런 문제에 깊게 관여하지 않기를 원한다. '사람이 잘릴 상황인데, 있는 조직편제에서 그냥 수적 열세인 팀을 폐지해서 이리 저리 옮기는 차원의 논의는 적절하지 않다. 상황에 맞게 이 기회에 조직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 따라 조직편제를 내 놓아야 한다'고 몇몇 직원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본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나? 한 번의 의견 개진으로 그쳤다. 그리고 그들 속에 묻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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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그들의 의견이라면 별 편견없이 마냥 신뢰하던 막내였다. 그래서 한 때는 그들과 함께 '간부진은 사퇴하라!'고까지 당당하게(?) 주장했었고, 그로 인해서인지 모르지만 그때 몇몇의 간부들이 조직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이젠 내 후배 직원들이 새로 상당히 많이 조직에 들어왔고 난 상임이사의 표현에 의하면 '이제 때가 묻을만큼 묻은' 직원이 되어 있다. 
이전처럼 '필요없는 간부직들은 조직을 떠나라'라고 쉽게 주장하고, 동조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나의 심정을 '때가 묻을만큼 묻은' 때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에 그러한 경험을 겪었기에, 단순히 그들이 떠난다고 해서 조직이 새로운 활로를 찾을 거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 이 조직은 충분히 공감받을 일을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조직이다. 요즘들어 그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단지 그 일을 각 팀마다 자잘하게 벌이다 보니 조직의 인지도는 물론, 실질적인 조직성과 측면에서도 체감되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간부수가 많고를 떠나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윗사람들 몇을 자른다고 해서 나아지지 못한다. 
거꾸로 이 목표와 방향이 구체화되고 난 후 조직의 실행력을 높여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이 제기되면 그 때는 기존 간부들을 실무직원으로 내려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연륜에 맞는 일을 하게 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게끔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경영자의 몫이다. 이건 이미 '퇴물' 취급받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고 실질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일단 자르고 보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그 조직내의 에너지는 분출되기는 커녕 있는 열정마져 사그라들고 마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위에 내가 적은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내가 조직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나는 매월 주는 월급에 만족하면서 사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 지 오래다. 누가 잘리더라도 나는 아직 잘리지 않을 거라는 기대만으로 눈치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은 지 오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직업을 알고는 말한다.
'4시 신데렐라! 당신은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군요!'
오래 전 이 조직에 입사했을 때 가슴 뿌듯하고 무언가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명함을 건네기도 부끄러워진다. 그 명함에 새겨진 이름에 걸맞게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종이나 전공 때문에 받게 되는 편견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평범한 이들이 내가 건넨 명함을 받고 내게, 아니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 거는 기대는 옳다. 그걸 편견이라고 느끼는 건 내가 그 기대에 맞게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전공하셨어요? 운동 좀 하셨겠는데요?'라는 질문 또한 내가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운동'이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시대에 대한 고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내가 불철저했기 때문이다. 
편견의 문제는 결국 나의 문제이다.


상임이사의 단독 면담이 결국 나에게도 찾아왔다. 
"4시 신데렐라! 당신에게 이 조직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난 당황했다. 눈동자는 허공을 몇 번 돌다가 다시 상임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게! 제게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상임이사가 피식 웃는다. 뭔가 내가 뒤가 구리다는 느낌을 준 것 같았다.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입장에서는 저는 무척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근데요. 입사 초기의 기대와 열정의 문제로 접근하면 저는 그 때 초심에 비해 그 열정과 의지가 현저하게 낮아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상임이사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직장생활 7년차에 접어들었다. 난 남들이 이야기하는 '퇴물'이 되가고 있는 느낌이다. 


함께 듣는 음악은 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었던 Sigvart Dagsland의 또다른 앨범 『laiv』(1996) 중 6번 곡 "Gyldne Land"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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