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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세상을 바라기에 우리 둘부터 더없이 사랑하고 이해하고자 합니다.

대학 선배 누나로부터 '늦은' 결혼식 초대장을 받았다. 프랑스 삼색기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멋진 글귀를 담은 카드에 파랑, 흰색, 빨강으로 이루어진 리본을 묶어 보내왔다.
결혼은 4월이었지만, 정작 누나는 작년 10월 경부터 자신들에 어울리는 독특한 결혼식을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고 있었고 채팅을 통해서이지만 누나가 얼마나 그 과정을 즐기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드레스는 친환경 소재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거야'
'하객들 만찬도 친환경적으로 할 거야'
'탁 트인 야외에서 재미있게 할려구 그래'

듣기만 해도 여느 결혼식과는 좀 색다른 결혼식이 될거라고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하객들과 마주하며 식을 진행하기 위해 주례를 과감히 없애고, '남녀평등'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녀 공동사회로 진행했던, 그래서 여느 결혼식보다 특이하고 재미있었던 눈큰이와 나의 결혼식 경험이 있기에 '뭐~ 특별한 게 있을까?'하며 반신반의하기도 했는데...

4월 18일, 토요일 눈부시게 화창하다 못해 햇살이 조금은 거북스럽게 따끔한 날씨였다. 식을 올리기에 차고 넘치는 좋은 날씨였다.
예식이 열릴 장소에 도착했더니 무슨 드라마에서나 본 것 처럼 푸른 잔디 위에 하얀 색깔로 예식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탁 트인 곳에 정원 입구와 같은 장식을 설치하고 누나와 형님(가만, 연하라고 한다면? ^^)이 하얀 의자위에 눈부시게 자리잡고 하객들의 축하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단 눈도장 찍고...
오랜만에(거의 10년 이상되는) 만난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선 먹고 보자는 분위기에 휩쓸렸다.
예식 무대와 야외 뷔페 장소가 서로 떨어져 있어서 일단 안토니오, 눈큰이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깔끔한 뷔페와(우와~ 탄산음료가 아닌 생과일을 직접 그자리에서 갈아서 주다니) 아주머니들께서 직접 현장에서 조리하여 제공하는 각종 음식들이 매우 맛있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식이 진행됐다. 의자를 틀어 그냥 앉아서 신랑, 신부 행진을 지켜보려 했는데, 어라?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조르바 춤' 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춤을 추며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그 분들이 춤을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로 알게 되었지만 누나와 형님의 인연은 춤 동아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니깐 결혼식의 식순 자체가 만남부터 미래의 지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와우~ ^^
그렇게 식이 진행이 되었다. 주례없이 사회자의 사회와 주변 친구들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진행하는 동안 나와 눈큰이는 테이블에 앉아 안토니오의 입에 무언가를 계속 넣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누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
정작 두 사람이 만난 인연이며 어떻게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는지는 축하멘트를 하는 지인들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었을텐데... 다음에 누나와 형님을 따로 만날 때가 있겠지.

잠시 후, 형님이 누나를 위해 선사하는 특별 공연이 펼쳐졌다. 사회자의 말에 따르면 형님은 어렸을 적 꿈이 성악가였다고 한다. 바로 엄정행이 부른 목련화를 들으면서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었기 때문이란다.
피아노 음악에 맞춰 형님의 노래가 이어졌다.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가 싶었는데, 클라이막스로 치달아 가면서 음이 높아지는 순간 삑사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많이 웃었다.
사실 지나고 나면 계획대로 잘 진행된 내용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의외의 상황이라든가 이런식의 약간의 궤도이탈은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래서, 아마도 누나와 형님에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부르다 의도치 않게 만든 실수가 서로 오래오래 웃음짓게 만드는 추억으로 남을 거다. (혹여,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실수를 만들기를... ^^)

그리고 신나는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역시 함께 했던 춤동아리 회원들인 듯한 분들이 멋지게 춤판을 열었다. 





결혼식에 가면 의례히 아이들은 따분하고 재미가 없기 마련인데, 안토니오도 그 춤을 보면서 신나서 박수를 쳤다. 
이렇듯 결혼식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말 그대로 축제의 장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이런 자유분방한 결혼식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함께 동조를 많이 못해 준 것이리라. 사실, 누나가 재미있게 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정도로 파격적인 결혼식을 치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매 순간이 굉장히 낯선, 그러니깐 전혀 새로운 것을 접하는 당황스러움도 깔려 있어 일정정도 식 자체에 동화되지 못하고 거리를 둔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세상에... 마지막 신랑, 신부 행진에 흘러나온 음악이 바로 '인터내셔날가'였다는 거다. 
나도, 함께 있던 선배들도 모두 정말 압권이라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 춤으로 만난 과거의 인연을 입장행진에서 보여주었다면, 앞으로 그들이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는 모습을 그 음악과 행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절로 탄성이 나올 수밖에... 오! 브라보~~ 


올려야지, 올려야지 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4월 중순에 행해졌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서야 어렵사리 올리게 되는 것도, 며칠 전 3주간의 오랜 신혼여행을 다녀온 누나의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 누나의 결혼식을 내 블로그에 올려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고 난 후, 저장해 놓았던 동영상 파일들을 꺼내 하나하나 열어보며 그 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한국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공감하겠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맺음보다는 개인을 둘러싼 집단과 집단의 관계 맺기의 성격이 더 강한 경우가 많다. 식을 준비할 때면 그 관계되는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결혼 당사자와는 전혀 무관하게 날짜가 잡히고 식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누나와 형님이 이런 자유분방한, 오로지 그들만의 결혼식을 멋지게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부모에게 의지하게 마련인 한국식 결혼식이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그들 스스로 모두 책임지고 오랜동안 하나의 축제로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 두분은 이 결혼식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태어날 2세(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정말 특이하고 멋진 결혼식을 올린 두분! 불렀던 노래 가사처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아름답게 살아가'세요. 진심으로 두 분의 결혼 축하드립니다. ^^ 

함께 듣는 축하 음악은  Mikis Theodorakis의 『The Very Best of』(1997) 앨범 중 1번 곡 "O Zorbas"이다.
이 음악을 들을 때면 앞으로는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이 떠오르겠지. ^^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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