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으른 생활이 년초부터 시작되었다. 하루에도 틈만 나면 블로그를 찾아들어오던 일도 잦아들고, 글 쓰는 것은 '내일 쓰자' 하면서 미루게 되었다. 물론,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년초부터 회사 일이 이전보다 조금 더 타이트 해지면서 집에 들어와서는 그냥 퍼지버리게 된 것도 핑계라면 핑계다. 
'아휴... 블로그에 글 올려야 하는데' 
'그래, 올려야 되겠더라'
'자기도 그렇게 생각해? 요즘 너무 뜸했지?' 
눈큰이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 사람과 저녁을 먹고 수다 아닌 수다를 떨고 오느라 11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으며 갈등이 생겼다. '그냥 음악 듣고 책이나 읽다 잘까?'하고... 
결국, 아니다 싶어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아있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이사 이야기? 안토니오가 오랜 시간 함께 할 공동육아 어린이집? 몇주째 묵혀둔 책 이야기들? 


# 제주 아버님으로부터의 편지

이번에 다녀가서 참 좋았저.
경혼디 구정에 오는 거랑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네가 제주에 오고싶은 것은 네생각으로는 옳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현재의 우리나라의 전통윤리로는 옳지 않은 것 같다. 지난 번에는 신혼 초이고 해서 다녀가는데 무리가 없었지만 이제는 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시부모님이 다녀오라고 하더라도 보내는 서운한 마음은 당연히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아니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빠라면 아들이 결혼했을 때 며느리가 명절날 친정에 가겠다고 하면 못 보내겠다. 하기야 너와는 다른 환경이겠지만.
구정에 못 오는 대신 이번처럼 연휴를 택해서 한 번 다녀가면 좋을 듯 하다.
구정에 오는 건 안토니오 아빠를 위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구정은 추석과는 다르다. 구정에는 세배도 해야할 절차가 있으니 잘 고려해보거라.

#
결국, 크리스마스를 제주도에서 보낸 후 한 달의 시간이 지나 다시 제주도를 방문했다. 결혼 후 일년 중 한 번의 명절은 눈큰이 고향에서 보내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되도록이면 그 결정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따지고 들면 똑같은 자식인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명절 모두 시댁에서 보내는 것은 분명 대단히 불합리한 일이다. 어느 가족인들 한 해에 몇 번 모이지도 못하는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싶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제주도라는, 그래서 명절 제사를 끝내고 동시에 친정으로 내려갈 수 없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명절 맞이 방식은 부모님께 말씀 드리기도 편한 면이 있기도 하다. 
1남 2녀를 두신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경우 2녀 모두 서울에 올라와 있어 명절 당일 전날까지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남 이렇게 셋만 모여 명절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소에도 자식들 다 떠난 집에서 두 분만이 지내시고 계셨는데, 명절때조차도 너무 적적하게 보낸다고 맏딸인 눈큰이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려하곤 했다. 제주도 분들이 되도록이면 자식결혼을 육지 사람과 시키려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명절때만이라도 자식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제주도에 내려갔다 온 지 한달도 안되어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 명절을 세고 오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가 나나 눈큰이에게는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장인어른께서도 무리하게 해서 설날 오지 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크리스마스 때 정말 오래간만에 본 안토니오를 얼마나 닳고 닳도록 쓰다듬고 쳐다보셨던가 떠올려보니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게 더욱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어렵게 설 명절 제주도로 다녀오겠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승락해 주셨다.
'안토니오 데리고 가서 잘 세고 와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눈에 밟히겠느냐. 우리야 뭐 매일 보니깐 걱정말고 기회있을 때마다 자주 내려가야지' 
물론, 어머니께서는 '간 지 한 달도 채 안됐는데 추석에 가는 건 어떠냐?'라고 아쉬움을 표하시기도 했지만... 
물론 내가 막내라는, 서열상 조금은 여유로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안토니오 말고도 이쁜 형네 조카가 와서 재롱을 부릴테니 눈큰이에게나 나에게나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거다. 솔직히 맏며느리로 우리 집에 오신 형수님께는 많이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우리의 뜻을 무조건 따라주시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귀향길, 전국은 폭설로 심한 교통대란이 일어났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본격적인 폭설이 오기 전 곱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비행기에 올랐고 안전하게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굵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한라산에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어 안토니오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하시던 어머님, 아버님이 결국 산을 넘어오시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갔다. 안토니오도 다녀간지 얼마 되지 않은 외할아버지 집이 익숙해서인지 오랜 이동시간에도 불구하고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처제도 와 있었고, 처남도 제주시에서 넘어오면서 집안은 활기와 행복이 넘쳤다. 안토니오 하나하나의 행동과 말이 가족 모두를 웃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오랜만에 만나 말이 끊겨 침묵하는 시간도 생길법했는데도 안토니오가 그런 어색한 정적은 몰아냈다. 


설날 아침 눈큰이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놀래킬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제주로 떠나기 전 안토니오 고모가 선물한 앙증맞은 한복을 안토니오에게 입히고 짜잔~ ^^ 
 


할아버지께서는 허허 웃으셨고, 차례상 준비에 바쁘시던 할머니도 주방에서 나오셔서 활짝 웃으시며 안토니오를 껴안았다.
아직 집성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친척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실 때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절을 하자 할아버지들께서는 푸른 색 지폐 한 장씩을 안토니오에게 건넸다.
여러 친척분들께 인사를 한 설날 밤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안토니오가 정작 우리에게 세배를 하지 않은 걸 알고 눈큰이가 안토니오에게 절을 하게 시켰다. 안토니오는 하루종일 절을 했는데 또 하라고 그러냐고 배짱을 부릴법도 한데 넙쭉 절을 했다. 우리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절을 마친 안토니오가 잠시 후 엄마를 쳐다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근데 엄마는 왜 세종대왕 안줘?" 
   
#
설날 다음날인 27일. 우리는 다음날 하루를 휴가를 낸 상태였기 때문에 하루 더 여유롭게 제주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안토니오가 낮잠을 자는 사이 우리 둘은 잠시 차를 몰고 나와 데이트를 즐겼다. 바로 4년 전 우리가 식을 올렸던, 바다가 환하게 내다보이는 호텔에 가서 손을 잡고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참 시간 빠르다 그치?'
하루종일 손님들께 인사를 하느라 지쳐버려, 꼭대기 가장 전망좋은 방에서 하루를 묵으면서도 눈큰이의 머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핀을 뽑고 나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던 기억들... 멀리까지 찾아준 친구들과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야외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들이 저 들판과 바다를 보며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자기야~ 우리 결혼식 다시 한 번 올리면 안될까?'
하긴, 만일 결혼식을 육지에서 치렀다면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몇시간 정해진 스케쥴에 따라 정신없이 진행되었을텐데...  통유리로 바다가 보이는 식장에서 우리가 서로 기획한 주례 없이 남녀 공동 사회로 진행된 단백한 결혼식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포근하고 행복한 기억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안토니오를 생각해라... ' 
'네~' 
한 20여분 산책로를 따라 걷고 난 후 우리는 호텔 커피숍에 들어가 케익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모처럼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통유리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흐른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 정말 좋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제주도 사람과 결혼한 것을 정말 많이 부러워한다. 나도 사실 눈큰이를 만나 제주도로 인사를 갔던 그 때, 그러니깐 삼십대 중반을 내달려 갈 때서야 비행이라는 걸 처음 해 본 이후로 매년 꼬박꼬박 관광의 고장 제주도를 방문하니 분명 복은 복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여 이젠 내 처지를 갖고 장난스레 눈큰이에게 투정을 부린다. 
'아! 나도 렌트카 타고 아무 생각없이 여행하고 그러고 싶다'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아시면 화내시겠지만 간혹 눈큰이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몰래 와서 한 2박 3일 관광하고 갈까?'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 
그렇게 앉아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큰이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에는 두 시간을 충분히 주무셔 주셨던 안토니오가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깨나서 엄마를 울며불며 찾는다. 
그렇게 낭만적인 경치와 분위기에 푹~ 취해있던 우리는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안토니오 울음 소리에 기동타격대보다 더 신속하게 튕겨져 일어나 잰걸음으로 나와 차를 타고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려! 우리가 여기까지인겨~'  
우리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작별의 시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라산을 넘다가 안토니오에게 마지막 제주의 선물을 선사하셨다. 5.16 도로(맘에 안드는 이름이다)를 타고 가다 성판악에서 잠시 내려 안토니오에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엄청나게 쌓인 눈 경치를 선사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눈이 제대로 수북히 쌓인 날이 얼마 없었던 것도 같다. 안토니오는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덩이를 굴린다. 덩달아 나도 눈큰이도 신이 나서 서로에게 눈을 던지고 고함을 치며 눈길을 내달린다. 솔직히 더 신난 건 우리들이었다. ^^




처음 적을 때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어떻게 기억해내야할 지 막막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쯤 적어놓으면 언젠가 안토니오가 읽으면서 덩달아 2009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의 설 이야기를 같이 음미하고 웃을 수 있겠지. 이젠 몇 주 후면 안토니오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그래서 요 몇 달 사이 안토니오가 지낼 어린이집을 알아보았고 공동육아 어린이집 중 한 곳을 정한 상태이다.
그리고 다음 주,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던 이곳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한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밖에 보지 못한 안토니오가 서울로 올라와 우리와 함께 지내며서 어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까? 걱정반 기대반 섞인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함께 듣는 음악은 Charlie Haden과 Pat Metheny가 함께 연주한 『beyond the Missouri Sky』(1997) 앨범 중 11번 'Cinema Paradiso (Love Theme)'라는 곡이다. 안토니오가 커서 이 음악과 함께 이 글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