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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한 3개월 정도의 프로젝트를 하나 했다. 그 결과보고서를 제출하고 난 후,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참가자들에게 제주도 워크샵을 다녀오라고 했었다. 11월 정도에 가기로 했었는데, 회사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그 포상성 짙은 워크샵은 무산되었다. 제주도에 계신 장모님과 장인어른께는 너무 죄송했다. 며칠 휴가를 내서 바쁜 귤밭일을 거들어 드리고 올까도 생각했던 참이라서 나 또한 맘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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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울린다.
"네~ 어머님!"
"그래, 그럼 이번에 한 번 못 내려오냐?"
"아~ 그게... 어머님! 제가 눈큰이랑 한 번 의논하고 한 번 뵈러 갈께요."
"무리해서 그러지는 말구. 그래도 안토니오도 귤밭 한 번 구경해야지"
"바쁘시죠? 귤 따시느라..."
"그래. 날씨 좋은 날에는 하루종일 밭에 있다."
"네... 죄송해요. 어머님. 간다구 그래놓구선 이렇게 되서..."
"어쩔 수 없지. 회사 일이 그렇다는데..."

12월 들어 무거운 마음이 자꾸 쌓여만 갔다. 자주 뵐 수도 없는데, 첫 외손자가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안고 내려가고 싶었다. 결국 눈큰이와 이야기를 하고 26일 하루 휴가를 내고 25일부터 27일까지 안토니오를 데리고 제주도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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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성탄절, 오전 11시 30분.
저가 항공사인 제주항공을 이용해 제주도로 향했다.
안내원들은 모두 산타모자와 붉은 사슴뿔 머리띠를 하고 승객들을 맞았다. 즉석으로 우리는 그 안내원을 안토니오에게 '예쁜 사슴 이모'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안토니오는 창가에 얌전히 앉아서 '아빠 언제 날라, 언제 날라?' 하면서 이륙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처음으로 탄 작은 항공기라 맘이 조금 불안했지만, 비행기는 가뿐히 멋지게 날아올랐다. 약간의 진동과 함께...
안토니오는 이륙하는 느낌이 좋았는지 비행기가 붕~ 떠오를 때 씩~ 한 번 웃어보였다.
크리스마스라고 비행기에서는 산타모자를 쓰고 기념촬영도 해 줬다. 
이륙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구름 위 하늘은 너무 눈이 부셨다. 안토니오 옆에 있는 창문을 닫아주었다.
"안토니오~ 눈감고 한 숨 자면 제주도 외할머니께서 '안토니오~'하고 맞아주실거야'
안토니오는 너무 기특하게도 눈을 억지로 감았다. 잠시 후 살짝 보니 벌써 곯아떨어졌다. 가볍게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렇게 오전과 오후를 가로질러 제주도에 도착했다. 오후 12시 30분.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 쪽을 살짝보니 안토니오 외할머니께서 출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기다리고 계신다.
안고 있던 안토니오를 내려놓는다.
"저기 외할머니 계신데, 안토니오가 함 찾아봐"
공항 출구쪽으로 안토니오를 밀어세웠다. 어머님은 안토니오를 보자 출구쪽으로 달려오시다가 앉으시고 손을 뻗었다. 안토니오도 오랜만에 본 외할머니를 알아보고 잰걸음으로 외할머니쪽으로 달려가 안긴다.
뒤에서 앉아계시던 아버님도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셔서 안토니오를 번쩍 들어올리신다.
거의 5개월만에 만남이다.
뒤에서 보고 있는 나마저 가슴이 시큰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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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귤밭을 식구들이 함께 갔다. 이미 나무에서 귤 따는 일은 모두 끝나있었다. 짙은 녹색 잎들만이 나무마다 가득 달려 있었고, 간간히 따지 않은 귤 한 두개 정도가 보일 뿐이었다.
안토니오에게 주렁주렁 걸려있는 귤나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와는 상관없이 안토니오는 귤밭에서 사용하는 수레를 타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한다. 
과수원 내에 있는 창고 정리를 끝마치고 그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를 꺼내서 안토니오 재롱을 보면서 식구들이 환하게 웃었다. 참 평화로운 한 때이다. 




점심 시간이 다가와 집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는데, 너무 신나게 놀았는지 안토니오는 금새 곯아떨어졌다. 
어머님, 아버님이 잠자는 안토니오를 보고 아쉬워 하신다.
"왜요? 어머님?" 
"안토니오에게 보여줄 게 있었는데, 잠들어 버렸네?"
"뭔데요?"
"할 수 없지. 너희들이 내일 와서 안토니오랑 같이 따라." 
어머니는 또 다른 귤밭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눈큰이는 잠들어 있는 안토니오를 안고 있어서 내릴 수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귤나무 사이를 헤치고 어머님을 따라 조금 가다 보니 내 눈앞에 환한 귤 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우와~" 
말 그대로 귤들이 주렁주렁 가득 달려 있었다. 유독 그 한 그루만이 오롯이 귤로 가득 차 있으니 하나의 작품 같았다.
"안토니오 데리고 온다길래, 우리가 제일 맛난 귤나무 손도 안대고 이렇게 남겨뒀다. 내일 너네들이 와서 안토니오랑 다 따가지고 가라."    
아기를 기다린 마음이 이 귤 나무 하나에 그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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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수확하는 노동은 정말 즐겁지 않은가?
전지가위를 들고 정신 없이 귤을 따면서도 힘들기는 커녕 마음속에 에너지가 솟구쳤다. 간만에 내 오감이 정말 생산적인 노동의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서울 빌딩 숲 한 구석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면서 일이랍시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보람.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어졌다. 안토니오도 눈큰이 옆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귤 몇 개를 수확한다. 푸른 하늘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고 우리 가족은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득 달려있던 귤들을 다 따고 나니 노란 플라스틱 박스 2개가 조금 넘게 모아졌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결혼식이 있어 외출하셨다가 잠깐 들러 결국 안토니오를 데리고 가셨다. 아마도 주변 분들에게 '내 외손자다'라고 자랑하고 싶으셨을 거다. '가면, 놀이터 있어. 안토니오!'라고 눈큰이는 공갈을 쳤고, 안토니오는 그런 엄마를 믿고 신나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정작 그곳은 잔치집이었고 주변에 놀이터가 없었나보다.
배신감을 느낀 안토니오는  결혼식장에서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부르며 울어재꼈던 모양이다. 30분이나 지났을까? 얼마 안되서,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부랴부랴 다시 오셨다. '아이고~ 얼마나 울어대던지 국수도 못먹고 와쪄'하면서 울음범벅이 된 안토니오를 놓고 다시 잔치집으로 가셨다. 엄마, 아빠를 보더니 금새 울음을 그치고 평온을 되찾는다. 
"안토니오! 왜 그렇게 울었어. 가서 인사 잘 하구 그래야지" 
안토니오를 달래는 눈큰이는 속으로 뜨끔했을거다. ^^ 


28일. 
눈깜빡할 사이에 사흘이 흘러가버렸다. 그 사이 제주집은 안토니오의 재롱으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다시 제주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안토니오~ 지난 번 제주도 올 때처럼 눈 꼭 감고 한 숨 자면 할아버지께서 '주빈아~'하고 부르실꺼야'
역시나 또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잠든다. 
안토니오는 달콤한 꿈을 꾼 듯 그렇게 바다를 건넜다. 
오랜만에 맛본 수확의 노동은 지금 손가락을 움직이며 자판을 쳐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 노동의 기쁨을 나는 점점 잊어가고 있는걸까? 
안토니오도 당분간은 도시생활을 해야하겠지만, 맛난 귤만큼이나 상큼하고 행복해지는 이 노동의 참맛을 많이많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함께 듣는 음악은 Maria Del Mar Bonet의 『Maria Del Mar Bonet』앨범(1974) 중 1번 곡 'Sonet'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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