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에서 저자 진중권은 예술의 탄생과 미적 인식에 대해 어떤 정의와 해석이 이뤄졌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봤다면,『미학 오디세이 2』는 신체와 정신,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에 빠져버린 데카르트 이후,  주관과 객관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의 노력들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우리는 왜 서로 오해하고 상처받는 걸까? 당신은 A라고 말했는데, 나는 왜 B라고 곡해하는가? 왜 똑같은 사물과 현상에 대해 내가 인식한 것과 당신이 인식한 것이 다를까?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또 하나의 생각하는 주체이던 어떤 고정된 사물이던, 그리고 생각하는 주체의 머리속에 그려지는 무엇이던 이런 왜곡이 일어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는 곧 해방이요 신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해방을 맛볼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주관과 객관의 괴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질문일 수 있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지각의 한계를 극복하는 해방과 완전 소통이라는 순간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상가들은 이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에 대해 탐구하고 또 탐구해왔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08~1961)는 이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 정신과 신체가 미처 분리되지 않은 '원초적 지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봤다. 이는 기존의 데카르트의 신체와 정신,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한편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표상' 혹은 '이미지'로서의 직관을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감각을 넘어서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상태의 이미지로서의 직관이 가장 순수한 미적인 상태라고 보았다. 즉, 이때의 표상(이미지 또는 직관)이란 이미 감각의 수준을 넘어선 '정신적', '관념적' 표현expression이 된다. 표현은 우리가 어떤 감각 자료(각각의 인상impression)에 일정한 '형식'을 주는 활동이며, 바로 이 '형식'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학은 바로 이 무정형의 인상들에 형식을 부여하는 일상적인 직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주관과 객관의 괴리 문제를 인식하는 주체에 결부시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면, 주관과 객관의 관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그것을 관계주의라고 부르는데 예술작품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대상'과 '의식작용'을 모두 밝혀야 한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객관화된 정신, 말하자면 작가의 '살아 있는 정신'에서 빠져나간 내용이 물질 속에 들어가 하나의 대상이 된 거다. 즉, 물질적 바탕에서 정신적 내용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에 투영하는 순간 죽은 정신이 된다. 이 정신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바로 이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조자의 정신이 필요한데, 곧 살아있는 정신에 힘입어야 부활할 수 있다. 시간적인 흐름상에서 이해하자면 과거에 씌어지거나 창조된 작품 텍스트를 현재의 우리가 읽을 때 바로 과거와 현재의 '지평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써 작품은 '이해'된다. 

가다머는 예술을 일종의 미메시스(모방)로 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예술은 사물의 본질적이며 의미있는 측면, 즉 사물의 은폐된 참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입체파의 회화 속에는 파편화된 현대 세계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비롯된 대상의 통일성의 파괴라는 현대 사회의 본질적 특성이 재현되어 있다.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켜 예술의 본질을, 진리를 추구하는 내용이 아닌 감각적 쾌감을 주는 '형식'으로 환원한 칸트의 미학에 대한 형식주의적, 주관주의적, 쾌락주의적 노선은 서구 미학의 주된 노선이었는데 가다머는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예술작품을 접한 독자는 이 작품과의 일종의 '놀이'를 통해서 그 속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끄집어 낸다고 보았다.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전체적 지평과 개별적 이해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완전해 지는 것이다. 이를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이저(W.Iser, 1926~)는 이를 발전시켜 '불확정성'을 갖고 있는 텍스트를 독자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어떻게'구체화하느냐에 바로 미의 본질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 텍스트의 '효과 구조'와 독자의 '반응 구조'가 상호 작용을 하게 되고, 이 두가지 구조가 함위하는 힘이 바로 문학작품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2009-11-27 18;59;03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네가 이 텍스트를 볼  때와 내가 이 텍스트를 볼 때, 그리고 다른 C, D, E, F... 가 똑같은 텍스트를 볼 때 서로 각각이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질텐데 어떻게 예술적인 작품이라는 공통적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인가?' 버려진 변기 하나를 두고 예술작품이라고까지 하는, 더이상 '예술과 사물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는 이 황당한 상황을 미뤄 볼 때 '하나의 사물을 예술로 만들어어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사회학적인 요인을 끌어들인 비트겐슈타인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은 예술계의 인정이며 이는 곳 예술작품을 만들어주는 게 그 사물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제도에 있으며, 결국 예술의 본질은 제도를 뒷받침하는 '관습(코드)'에 있다.    

나아갈수록 아리송해지다가도 감탄하다가 또 다시 아리송해 진다. '아! 이거다' 하는 순간, '어! 그래도 뭔가?' 하는 순간 이러한 예술에 대한 입장차이에 머리가 띵하게 아파온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현대 미술이라는 장르까지 들여다보면 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올 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에코는 이러한 현대예술의 혼란스럽고 다가치적이며 다의적인 작품의 세계를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예술작품은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현대사회의 위기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가다머의 입장과 일견 엇비슷해 보인다.

저자 진중권이 『미학 오디세이 1』에서 에셔의 작품들을 예로 들어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패러독스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면,『미학 오디세이 2』에서는 마그리트의 예술 작품들을 예로 들어 주체와 객체의 구분에서 연장되어 나온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지난한 사상의 궤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자!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거울에 비친 당신은 당신입니까? 확실합니까? 책임질 수 있어요? ^^


함께 듣는 음악은 João Gilberto의 『João Voz e violão』(2000) 앨범 중 1번 곡 "Desde que o Samba É Samb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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