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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새벽 3시다. 아이를 재우다 그냥 잠이 들었나보다. 젤을 발랐던 머리, 양치질 하지 않은 이, 닦지 않은 발 ... 온몸에서 찝찝하다고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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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가 서울로 올라와 함께 생활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나와 눈큰이의 생활은 오로지 안토니오의 안정적인 서울생활 정착에 있었다. 그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하루종일 함께 지냈던 안토니오는 이제 잠자는 밤시간을 제외한 하루 온 종일을 어린이집에서 보낸다. 그것도 전혀 일면식이 없던 교사와 아이들과 부데끼면서...
성인인 내가 예상하기에도 안토니오가 받을 물리적, 심리적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부부에게는 안토니오의 이러한 변화를 강제한 장본인들로서 미안함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직장생활만 제외하고는 안토니오에게서 몸과 마음을 온전히 쏟아붇는 생활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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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안토니오는 약간의 세간살이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 대신 엄마 아빠와 하루종일 함께 지낼거라는 생각에 안토니오는 그다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신나했다.
3월 9일과 10일. 눈큰이가 휴가를 내고 안토니오와 하루종일 함께 있었다. 오전 10시 정도에 눈큰이는 안토니오를 데리고 어린이집에 갔다. 낯선 곳에서 많은 또래 아이들과 부딪치는 경험이 결코 안토니오에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가 옆에 있으니 크게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전 어린이집에서 하는 나들이를 함께 다녀오고 잠시 눈에 익을 정도로만 있다가 다시 점심식사 전에 일찌감치 집으로 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3월 11일과 12일. 이번에는 내가 휴가를 내고 안토니오를 어린이집에 적응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이틀 지내고 난 안토니오는 나름대로 담당교사의 별명을 부르며 제법 잘 어울렸다. 오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담당교사:  "이제 집에 가 계세요. 점심식사 먹고 난 다음에 데릴러 오세요"
나 : "안토니오. 아빠 집에 가서 잠깐 안토니오 약 챙겨올께"
안토니오는 별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잠깐 아빠가 자리를 비우는 거겠거니 하고...
집에 도착하니 걱정이 되셨는지 지방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올라와 계셨다. 주변 시장을 함께 둘러본 후 점심을 먹으러 한 식당엘 들렀다. 점심메뉴가 깔리고 밥을 막 뜨려는 찰나 전화가 울린다.
담당교사 : "안토니오가 잘 놀다가 아빠를 찾는데, 조금 일찍 와 주실 수 있으세요?"
(멀리서, 안토니오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 : "아! 지금 아버님과 함께 식사를 막 하려던 참이었는데요. 식사 빨리 하고 갈께요."
전화를 끊자마자.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그런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냐고 혼자 먹고 있을테니 어여 가서 데려오라고 하신다. 끙~~ 
어린이집까지 걸어가기에는 시간이 꽤 걸리는 거리여서 택시를 잡아탔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안토니오는 교사의 품에 안겨 어린이집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이튿날인 12일은 한 번 떨어진 경험이 있어서인지 어린이집에서 한순간도 내 품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결국 전날보다도 더 일찍 어린이집에서 안토니오를 데리고 나온다.
3월 13일 금요일. 안토니오를 위해 우리가 휴가를 사용하기로 한 마지막 날이다. 그날은 눈큰이가 다시 휴가를 냈다. 그러나 결국 눈큰이도 일찌감치 안토니오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막막했다. 다음 주부터는 하루 온종일 안토니오를 맡겨야 했다. 결국 지방에 계신 할아버지께 SOS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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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함께 보내고 이제 본격적으로 아침 8시에 안토니오를 자전거에 태우고 어린이집을 향했다. 서럽게 울어대는 안토니오를 교사에게 안기고 돌아서서 페달을 밟자니 '참~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이 강강술래하는 모습을 보더니 베시시 웃으며 "나도..." 
그래서 같이 했어요. 뛰기 하고, 손치기도 하고, 고사리 꺾고, 남생이 타령에 개고리 타령까지 다~ 참여했어요. 
강강술래 끝나고 다시 울음 ... 낮밥 준비하는 동안 울먹이며 오리(교사 별명) 뒤를 졸졸...
낮밥은 싫다해서 억지로 먹이지 않았어요. 세 번 정도 권했더니 응가하고 싶다해서 화장실에 앉아 있었죠. 
그랬더니 "졸려..." 그래서 12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 잤어요. 
깊은 잠이 든건 아니지만 2시간 정도 쉴 수 있었을 거예요. 
                                                                           - 교사가 적어주는 날적이(3.16.) 중에서 - 

예상대로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문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발생했다. 할아버지가 안토니오를 이틀 정도 오후에 데릴러 가서 우리 퇴근시간까지 함께 있게 되면서 다시 할아버지에 대한 의존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와 살지 않겠다고, 할아버지와 함께 109동(할아버지, 할머니 아파트)에 가겠다고 계속 울어댔다. 결국, 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오시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2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토니오와 함께했는데 안토니오가 힘들어 하는 모습때문에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하셨다. 
"너네 생각만 하고 애 생각은 못하냐? 너네는 안토니오가 어린이집에 빨리 적응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애는 그 짧은 적응동안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 말고 내가 3월 말까지는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안토니오 보면서 서서히 적응시킬테니 그런 줄 알아라." 
결국, 몇 번을 설득한 끝에 아버지께서는 그런 우리를 서운해 하시면서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도움을 먼저 요청하고, 다시 '당분간 오지 마시라'라는 말을 꺼내야 했던 나나 눈큰이 마음이 여간 괴롭고 미안한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어린이집에 데릴러 오지 않자, 안토니오는 며칠 동안 계속 109동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안토니오에게 주말에 할아버지 집에 가자고 약속을 하고 결국 주말에 안토니오가 그토록 가길 원하던 지방으로 내려갔다. 근데 주말을 기다리며 이녀석 말하는 게 보통 작심한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서울로 가져왔던 일부 세간살이도 이번에 내려갈 때 가져가야 한다고 얘길 하지 않나, '다시는 서울에 안 올꺼야'라는 일종의 배신감을 부모에게 표현하지를 않나, 잠깐 동안 내려갔다 올라올거라는 말에는 콧방귀도 안꿨다. 
그러니 데리고 내려가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마음은 안절부절일 수밖에...
역시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도착해서는 눈큰이와 나는 더이상 안중에 없었다. 할아버지한테 착 달라붙어 있었고, 잠조차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에 가서 잤다. 눈큰이와 나는 그런 안토니오에게 어린이집 생활과 서울집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면서, 지레 불안하여 '안토니오! 주말에만 잠깐 있는 거야. 우리 어쩔 수 없이 함께 서울 올라가야 해'라고 이야기해주면 안토니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댔다. 
그렇게 떠나야 할 일요일 오후시간이 다가왔다. 낮잠을 자고 있는 안토니오가 깨나면 바로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서울 가자고 하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울거란 예상에 둘 다 초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낮잠을 푹 자고 깨난 안토니오는 우리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까지 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하며 의젖하게 작별을 하는 게 아닌가!  속으로는 할아버지 집에서 다시 지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을 텐데도 그걸 꾹 참고 다시 엄마, 아빠를 따라 서울로 '끌려가 주는' 안토니오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정말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한참이고 꼭 안아주고 싶었으니깐. 

어린이집 입원 원서용 증명사진




그렇게 지방에 다녀온 이후 안토니오의 적응 속도가 빨라졌다. 할아버지는 그런 보고를 받고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할아버지 집이 사라져버린 줄 알았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다 예전 집에 그대로 있고, 자기 물건들도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한 안도감' 때문이라는 아주 고차원적인 해석까지 하셨다. ^^ 
매번 울면서 아침에 헤어졌었는데, 3월 24일(화) 아침에는 어린이집 마당에서 자전거에 타고 있는 안토니오를 내리는 데 불쑥 "아빠는 이제 다시 장갑끼고 회사 가! 주빈이가 혼자 (어린이집) 들어갈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순간 가슴이 찡~ 

오늘은 요리 활동 있는 날 ... 딸기 찹쌀떡 만들었죠. 낮밥도 한그릇 다~ 먹고 자기전에 응가를 아~주 많이 했어요. 
안토니오 녀석 이제 적응했는지, 뺀질~ 뺀질~ 
요리활동하게 장난감 정리하고 손씻고 오라 했더니... 오리 마주보며 장난감 퍼즐만 계속 맞추고... 
불러도 대답 없는 안토니오...
"이제 완전 적응한거야. 엉엉" 했더니 
"헤헤헤" 웃는 거 있죠. 앙~ 
                                                                           - 3.31. 날적이 중에서 -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흐른다. 
일어나자마자 안토니오의 "엄마! 회사 가지마!" 울음 섞인 칭얼거림을 들으며 식사를 입으로 하는 지 코로 하는 지 모르고, 엄마와 울며 떨어지는 안토니오를 자전거에 태워 어린이집에서 또 울며 떨어지고, 출근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조마조마 지하철에 올라타고 (회사일도 덩달아 신경쓸 일들이 많아졌다), 퇴근시간 되자 마자 얼굴에 철판 깔고 휑 내달려 안토니오를 데릴러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먹고 잠시 안토니오와 놀아주다가 씻기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이제는 밤 9시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씻고 내 할일도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안토니오를 재우다 동시에 잠든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새벽 어중간한 시간에 눈을 떠 찝찝한 기분으로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몸을 씻는 일이 잦다. 그리고 잠시 그 새벽 거실에 멍하니 앉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멍해 하다가 다시 방에 들어가 자고...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다행히 오늘이 주말이라 이렇게 기록할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안토니오와 함께 있고자 서울로 데려왔지만 정작 하루에 안토니오를 제대로 껴안고, 이야기하고, 놀아줄 시간은 세시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전혀 엉뚱한 이유인지 몰라도 난 이제서야 나의 노동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혀 노동강도와 상관없는 이유로...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 어떤 아빠, 엄마도 이렇게 아이와 더 오래 놀아주고, 함께 하고픈 마음이 없겠는가! 'Job Sharing'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그만큼 임금은 줄이고, 대신 직원을 더 많이 채용하여 그 시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라면 난 그리 많지 않은 현재의 급여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환영이다.
아침 쌀쌀한 기온속에 자전거를 급히 몰아 어린이집에 향하지 않아도 되고, 땅거미 지는 시간이 아닌 낮시간 안토니오를 데리고 인근 놀이터를 찾아가 환하게 웃는 안토니오의 모습도 오래오래 보고 싶다. 그 시간에 더 많이 껴안아 주고 ... 


안토니오의 등원으로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네요.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민되고 하지만...
함께 하기 때문에 슬기롭게 지낼 수 있겠죠. 안토니오의 마음을 다~ 얻지는 못했지만 밝게 웃어주는 안토니오가 고마워요. 
또 이런 만남을 갖게 해 준 두 분께도 감사하구요. 
                                               - 3.13. 날적이 중에서 - 

아침에 안토니오가 심하게 울었다고. 지금 기분좋게 놀고 있네요. 걱정 놓으시라고...^^   - 4.2. 9시 28분 문자 메세지-

이런 안토니오, 아니 우리 가족 모두의 새로운 적응기에 정말 큰 힘이 되어주는 분들은 이곳 어린이집 교사들과 부모들이다. 교사들은 이렇게 진심이 담긴 날적이를 정성스레 써주고, 다른 원아의 부모들은 진정으로 새로 들어온 안토니오와 우리들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고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잦은 부모들과의 만남과 이것저것 조금은 색다른 숙제(?)를 해야 하지만서도 이렇게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만큼 신뢰가 쌓이게 된다. 부모들은 언제든 어린이집을 방문할 수 있고, 그곳에서 부모들이 번갈아 가며 하루 교사활동을 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청소를 하는 등 다른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매일 찾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 모두 부모의 별명을 부르며 반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로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게 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매개로 해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이러한 분위기가 반가운 한편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큰 맘 먹고 이사를 결정하고, 안토니오와 새롭게 출발한 3월 한 달! 
아직은 우리 생활이 적응기의 어수선함을 겪고 있지만, 안토니오, 눈큰이, 그리고 내가 '함께 하는 공동육아'로 인해 지금보다 더 즐겁고, 세상을 긍정하는 풍요로움을 갖게 되기를 기대해 볼 만 하다. ^^ 

함께 듣는 음악은 Tim Rice와 Andrew Lloyd Weber가 공동제작한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1992)음반 중 1CD 5번 곡 'Everything's Alright'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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