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퇴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다. 병원에 있을 때 처음 알게 된 방송인데 옛날 80년대말부터 90년대 참 좋아했던 노래들이 디제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자주 나온다. 대부분이 시끄러운 코너를 만들고 청자들은 즉석 문자를 편하게 날리고 디제이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주절대는 청소년 용 프로인데 반해 이 디제이는 말 한마디 할 때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말하고, 무엇보다 음악을 많이 틀어준다. 이 방송을 직장 동료들한테 소개해주며 들어보라고 했더니 한 직원이 딱 한 소리 한다.

"그게 선배가 나이들었다는 증거예요"  

오늘도 디제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어제 일을 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 나오더군요. 근데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계속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나 행복해서 계속 틀어놓고 일을 했죠. 힘든 야근시간이 디제이님이 틀어주는 음악들로 인해 행복하게 느껴졌답니다. 그 순간은 정말 제가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요. 내가 듣고 싶은 음악만 계속 흘러나오는 그런... "

투르먼 쇼... 나에게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이기도 하다. 투르먼 쇼의 주인공은 물론 이 청취자의 즉흥적인 감상에 젖은 설명처럼 행복하지만은 않은 인물로 기억된다.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것은 자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투르먼 쇼의 장면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니, 장면 장면이 떠오른다기보다는 내 일상의 반복이 바로 투르먼 쇼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로 출퇴근을 한다. 퇴근 때는 워낙 다양한 경로로 차가 밀려들어오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재미있는 건 출근할 때 아파트 입구를 나서서 도로에 접어들면 어제 봤던, 그제 봤던 혼다 SUV차가 때로는 내 앞에, 때로는 내 바로 뒤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때가 많다는 거다. 똑같은 신호를 매번 받고 기다리고, 그런 똑같은 차를 이틀이 멀다하고 앞뒤에서 만날 때면 나는 가끔 투르먼 쇼를 생각하며 가당치도 않지만 내 차 내부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멀쩡한 하늘 저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옆에 같이 출근하는 눈큰이를 슬쩍 의심까지 해 본다.

정말 예리하리만치 현대 대도시인의 일상을 통렬하게 꼬집은 투르먼 쇼는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메트릭스의 화려한 영상이 아니더라도 오래오래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매일 똑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바로 화장실에 다녀오고, 업무 시작 전 봉지 커피를 하나 타서 책상에서 그 향기를 맡고, 인터넷을 열어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메일을 확인하고 게시판을 확인하고, 즐겨찾기에 해 놓은 음악 블로그에서 아침에 어울리는 연주곡들을 듣고 어제 하다 만 서류들을 다시 들춰서 끄적 끄적 거리고 다시 화장실에 가고, "기획실 잠깐 회의합시다"하면 모여서 도무지 모여서 해결될 일도 아닌 이야기들로 인상을 쓰고 앞에 있는 업무 수첩 백지에 몇 자 끄적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끄적 거리던 일거리에 종지부를 찍고 "식사 맛있게 하세요"하며 자리를 뜨는 동료 직원에게 "맛있게 드세요" 하며 집합하라는 점심 밥 멤버의 메세지를 기다리다 메세지가 뜨는대로 엉덩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와 으례히 '구내식당'이라고 부르는 곳에 가서 식사를 하며, 흐르는 정적이 난감하여 금방 잊혀질 몇 마디를 웃으며 하고, 나도 모르게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다시 계단을 올라가 자리에 앉아 음악 시디를 컴퓨터에 꾹 집어 넣고 어제, 그리고 그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읽다가 졸음이 올라 치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회사 옆 공원을 살짝 돌고, 다시 오후 ...

정말이다. 일주일에 5일은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의 동선이 나무걸상에 못으로 긁어 패인 선처럼 선명하게 정해져 있다.

선택이라야 '오늘은 양치질을 할까 말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말까'정도? 지금 막 떠오르는 게 이것뿐이다.

어떤가? 투르먼 쇼보다 더 지독하지 않은가?

여기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접하는 광고와 매일 보는 거의 똑같은 뉴스까지 가세한다면...  

그래서, 여행과 일탈은 현대인에게 꼭 필요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제의(ritual)가 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개인적인 여백이 없어져가는 현대 대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느끼고 싶어서, 깨어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고, 잠시 일상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 일상... 가장 소극적인 몸부림이 아닐까.

퇴근길 눈큰이와 나는 오늘 핸들을 무작정 틀었다. 전혀 낯선 길로 가서 처음 가보는 식당에 들어가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시켜서 먹으면서 잠시 숨을 들이키고 약간 긴장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다 하고 눈큰이가 내게 말한다. "오늘 같이 한 달에 한 번씩 이러면 좋겠어."
순간 눈큰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당신도 투르먼 쇼의 주인공이었구나. ...
미래에 구속되어 있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되어 있는 이 숨막히는 정육각면체에 갖혀있는...

조만간, 정말 눈큰이와 여행을 가야 할 것 같다.

함께 듣는 음악은 Valensia의 "Valensia"(1999)앨범 중 11번 곡 "Gai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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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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