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 나는 9개월 가까이 차고 다니던 보조기를 풀었다. 보조기 없이 걷다보니 꼭 다리가 다시 꺾일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 왼쪽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날 나는 청계천에서 있던 미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눈큰이와 같이 참석했다. 청계광장에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과 함께 2시간 가량을 서 있으면서 자유발언대에 나와 분노와 걱정을 표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단체가 아닌 인터넷 카페가 주축이 되어서 치러지는 행사에서는 이전처럼 운이 딱 들어맞는 구호보다는 "미친소 너나먹어라" 라는 식의 약간은 형식화되지 않은 생경한 구호들이 주를 이루었고, 자유발언대에서는 어눌한  말들이지만 격한 투쟁의 구호가 벋겨진 진솔한 호소가 사람들을 웃고 분노하고 머리 숙이게 만들었다.

오늘 다시 시청광장엘 찾았다.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행사시작 전부터 일찌감치 무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소년들이 많이 참석했던 이전 촛불집회보다는 점점 집회가 회를 더할수록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와 눈큰이 오른쪽자리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 두명이 앉아있었고, 내 왼편에는 혼자 온 양복쟁이 직장인이 가죽 가방을 품에 안고 털푸덕 앉아서 행사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오늘도 이야기는 자유 발언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이전과는 달리 전농, 민교협, 민언연 등의 단체 대표 또는 소속 회원 등의 조직을 가진 이들의 발언이 많아졌다. 이전까지 개별개별로 집회에 참여를 했다면 이젠 이 집회들이 점점 조직화되어 조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시부터 9시 10분가량까지 참여하면서 너무나도 논리정연한 글을 써와서 읽어 혀를 내두르게 했던 재수생,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하여 살면서 미국에서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던 미주주부모임싸이트에서도 촛불집회를 응원하며 미국 소 수입을 막기 위해 리본달기 운동을 하고 있는 미국한인주부들의 활동을 소개한 젊은 주부, 안티이명박카페에서 활동한다던 논객 '매국노처단자'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의 이야기 등 다양한 계층의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함께 고함을 치고 촛불을 높이 들어올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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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은 이미 인터넷 언론에서, 그리고 방송 교양프로에서 생생하게 그 문제점을 드러낸 미국쇠고기 수입의 위험성에 대해서 분개하는 내용은 아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문제를 나 또한 외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또한 우리 가족, 우리 아이의 생존에 언제 갑작스레 쳐들어올 지 모르는 광우병의 위험성을 진저리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면 재협상을 하라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자 기회가 될 때면 광장에 나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대학원을 진학할 때 원래 나는 집합행동과 사회운동에 대해서 공부해 보고 싶었다. 물론 그 분야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도 항상 내 지향점은 '공동체'였다. 이번 두 번의 집회 참석을 통해 느낀 것은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집회의 참여 양태의 변화였다. 지난 6일 참여한 집회에서는 그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의 부글거림이 확연히 느껴졌다. 정화되지 못한 아마츄어적 부글거림이랄까?
그동안 각종 집회양식을 보면 플랭카드 내용만 바뀌었지, 늘 나오던 운동가들이 플랭카드 뒤에 도열하여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다. 언론에 비춰지는 그러한 시민사회운동형태들은 그 사진 자체로 이미 바닥에서 끌어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이미 화석화된, 철저하게 제도화된 운동양태가 되었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뿌리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무언가 운동진영도 아주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변화의 출발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이번 집회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게 하는 현장, 그리고 그런 바람들이 집합적으로 표출되는 이 현장에서부터 그 액기스를 고스란히 끌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 출발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젠 단순한 제도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근접성의 원리'를 살린 운동조직방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읽은 책 '굿뉴스'는 이런 나의 생각을 갖는데 크게 도움이 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운동방식인지 모르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이제 환경과 생존이 뗄래야 뗄 수  없는 화두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 책에 나오는 이들은 자연을 회복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먹거리를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결합해 새로운 삶의 방식, 경제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희망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말 그대로 '굿뉴스'가 아닐 수 없다.

우리사회의 운동은 언론에 기댄 한탕주의식 접근이 판을 치고 있다. 물론, 내가 구석구석 새로운 운동방식들을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언론에서 비춰지는 각 분야별 운동방식이 무늬만 달랐지 똑같이 플랭카드 하나 두고 몇몇 운동진영에서는 알려진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는 사진 찍고 해산하는 방식은 진부함을 넘어 이젠 그만 보고 싶은 장면들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번 쇠고기수입 장관 고시를 10일 정도 늦춘다는 발표를 오늘 했다. 그것은 조만간(10일 안에)  이에 대한 거센 반대여론이 사그라들지 않겠냐는 이명박 정권의 '일단 피하고 보자'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물론, 어쩌면 이 먹거리에 대한 들끓는 여론은 조만간 잠잠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집회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조직화되어가는 집회가 조만간 딱딱한 집회형식에 갇혀 일전에 찾아간 집회와는 달리 그 부글거림을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였다. 그리고 정권은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번 집회를 주도했던 많은 이들이 어떻게 이 부글거림을 잘 모아서 더 확산시켜 표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집회라는 일회성 행사 속에서 그것을 고민하기에는 나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비관적일지라도 나는 이런 집회방식이 얼마간 연기는 시킬 지 몰라도 결국 1% 특권층에 기대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재협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조중동과 기득권이 긴 역사를 두고 살아온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이번 사건은 국민들의 삶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올거라고 본다. 그것은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진 운명에 그들 스스로가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탄핵이나 이전의 이슈화된 반미 촛불집회의 성격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만큼 체험하면 체험할 수록 우리들 자신에게 절박하게 다가올 바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존의 문제로부터 우리들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나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희망이다.

앞서 소개한 굿뉴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책갈피 해둔 적이 있다.

우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사고방식이 우리를 구원할 사고방식과 같을 수는 없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

 ... 이 동물들(소, 돼지, 닭 등의 가축)의 개성은 무시하면서 사람 개개인을 존중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길 바랄 순 없습니다. 생명을 이윤 창출의 도구나 생산단위로 전락시키고 식물과 동물을 전자와 중성자와 유전자 덩어리로만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도 곧 플라스틱 인형이나 구리 부속품처럼 아무렇게나 쓰다 버리는 상품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유기농 목장을 운영하는 조엘 살라스틴 -

- '굿뉴스'(데이비드 스즈키, 홀리 드레슬 지음/조응주 옮김, 샨티, 2006) 에서 재인용 -


단기간에는 미 쇠고기가 문제가 되겠지만 한국에서도 구제역, 조류독감 파동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가축을 대하는 인간위주의 잔인한 사육방식이 초래하는 문제는 점점 심각해질것이다. 바로 인간의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태도, 삶의 방식의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생명 운동과 환경운동에서 삶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순전한 경제적 논리와는 다른 근접성에 기반한, 다시 말해 그들이 발 딛고 서있는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적 생활방식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측을 하게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난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봐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방향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해야 할 지는 이 막막한 서울 대도시속에서 월급쟁이로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고민과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절박함을 담아 촛불을 함께 올리고 함성을 함께 질러대는 것 그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지만, 더 깊숙한 갈증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묻고 또 묻는 촛불집회였다.

함께 듣는 음악은 Dee Dee Bridgewater의 "in montreux"(1990)앨범 중 2번 곡 "How Insensitive(Insensate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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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youtube에 해당곡이 없는 관계로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다른 곡을 링크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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