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태인을 생각하면 격렬한 한미FTA 반대자로서의 관심보다는 함께 청와대에 있던 사람으로서 힘든 노무현 정권에게 비수를 꽂는 조금은 비열한 비호감의 사람으로 내겐 기억되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또는 그가 쓰는 글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다.
얼마 전 장하준 교수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이번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에서도 정태인 편을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도 반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미 FTA를 통해 벌어질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정말 명쾌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전문가들이 모든 걸 감안해서 잘 협정을 맺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들이 한 번도 빈부격차에서 오는 소외감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질적 삶의 격차가 가져오는 극심한 소외감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확실히 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국정 최전선에 있던 이가 내지르는 사자후는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아찔하게 다가왔다.


#1.
전 세계 통상전문가가 주목하는 소송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유피에스(UPS)가 캐나다 우체국을 제소한 것입니다. 유피에스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는 세계적인 특송업체입니다.  ... 한미 자유무역협정 조항에 택배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체국은 정보통신부 소속입니다. 똑같이 택배를 하는데 한 놈은 정부에서 국가 보조금을 받고 한 놈은 안 받으니 불공정 경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만일 유피에스가 이기면 세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유피에스에도 국가에서 우리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유피에스만 주면 되나요? 페덱스, 티엔티, 디에이치엘, 그리고 국내 회사도 차별하면 안 되니까 택배회사 직원들 모두 공무원이 되는 거예요. 두번째는 포기하는 거예요. 우체국이 택배를 안 하는 겁니다. ... 택배 안 하면 우리나라 우체국은 할 일이 없어요. 우체부 아저씨들 전부 정리해고 해야 됩니다. 세번째는 민영화입니다. 따로 떼어내서 파는 거예요. ... 결국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 직접 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영화해도 나쁠 거 없죠. 택배도 여러 개가 경쟁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골 오지에 가는 택배 요금이 높아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민영기업들끼리 경쟁해도 교차보조(Cross subisdy)는 불가능하니까요. ......
철도, 전기, 수도, 가스 등이 모두 망 산업입니다. 망 산업의 특징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비용이 올라갑니다. 시장원리에 맡기면 멀어질수록 돈을 더 내야 되지만, 현재는 안 그렇죠? 시골의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이나 철도요금이 서울의 그것과 비슷해요. 그것은 국가가 요금을 매길 때 저쪽에서 남는 돈을 가지고 이쪽에 보조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차보조금이고, 유피에스가 문제 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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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으로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것이 건강보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 외국 민간보험들이 들어와 있어요. 우리나라 보험제도는 보험증이 있으면 전국 모든 병원에 다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강제 지정제, 또는 당연 지정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지 않아요. ... 미국은 병원이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습니다. 병원이 크면 많은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겠죠. 그래서 만일 가고 싶은 병원이 있으면, 그 병원이 계약을 맺은 보험회사에서 파는 보험을 사야 됩니다. ...
그 잘사는 미국에서 아무런 보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려 4천7백만 명입니다. 비싸니까요! 누구나 천만 원 내느니 병원에 안 가는 해도 많으니까 보험을 안 들게 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은 보험 안들죠. ...
문화방송 프로그램 중에 최윤영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더블유(W)>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중에 2006년 7월쯤에 <세계 최고의 약값, 한국에 몰려온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이딩>이라는 미국 다큐멘터리를 조금 소개했는데, 한 흑인 여성이 손가락이 곪았어요. 그런데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병원에 못 가요. 결국 계속 곪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물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칼로 잘라버립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이미 민간보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인천 경제자유구역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여기에서는 건강보험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싼 민간보험을 산 사람만 그 병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 대학과 미국 병원을 유치한다고 하잖아요? 미국에서 훨씬 장사가 잘되는데 왜 오겠어요? ... 세계적인 병원들이 비영리 법인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법인으로 바꿔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다음에 돈 벌면 미국으로 부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 .한국 환자도 받게 해주겠다는 것이 세번째 약속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약속이 무서운 겁니다. 건강보험 환자를 안 받게 해주겠다. 건강보험 환자를 받으면 돈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누구를 환자로 받아요? ... 송도에 세워지는 미국 병원이 병상이 6백 개인데, 다 1인실이라고 합니다. 부자들만 갈 수 있겠죠. ... 이 부자들이 불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건강보험료도 내요. 건강보험료는 강제니까. 그것도 누진이니까 이 사람들은 돈을 많이 내요. 그러니까 건강 보험에서 빼달라고 이야기하겠죠? ... 그래서 부자들을 빼주면 우리나라 건강보험 체계 자체가 무너집니다. ... 이것이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밖에도 자유무역협정 후의 투자자 제소권, 자동차, 농업, 전자, 의류, 첨단기계 및 정밀화학, 제조업 등에서 이 협정의 영향을 두루 설명하면서 한미FTA이후에도 몇몇 잘 나갈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분야가 왜 정체되거나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아니 미 시장에서 뒷걸음질 할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둘의 사례만 보더라도 문제는 양극화이다. 돈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한미FTA가 된다 하더라도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질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나는 특권을 더 많이 누릴 것은 명확히 예측되지만, 평범한 이들은 경제적 타격외에도 지금보다 더 현격한 소외감을 곳곳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
여러분이 상위 10퍼센트에 드는 계층이라면, 조약 맺자고 '예스'하십시오. 여러분의 아이들도 10퍼센트에 들 자신이 있다면 '예스'하십시오.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10퍼센트에 들게 할 자신 있으면 '예스'하십시오. 우리나라가 이미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가 됐어요. 과거에는 교육이 신분상승의 통로였지만, 이제는 신분상승을 가로막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10퍼센트가 아니면, 아이들도 아닐 확률이 99퍼센트입니다.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그 확률이 99퍼센트입니다. ...
지금 우리나라에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양극화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대기업은 국내에 투자를 안 하고 외국에 투자하거나 소비하고, 소비자들은 돈이 없으니까 소비를 안 해서 성장률이 떨어졌어요. 이럴 때 오히려 분배를 제대로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갖게 되면, 국내 소비는 확실히 늘어나요. 부자들은 돈이 많이 남아도니까 해외에서 소비하잖아요. 분배가 제대로 되면 국내 소비가 늘어납니다. 그러면 소비를 많이 해주니까 내수산업에 도움이 되고 기업들이 살아나겠죠. 그러한 간단한 분배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회사 같은 부서 사람들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때 한 동료직원이 이명박이 잘 되도록 비판적 지지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서 술김에 막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보세요. 이명박은 선성장 후분배론, 즉 먼저 대기업 중심의 고성장을 한 후에 그 이익으로 빈곤층과 청년실업률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데, 요즘 한국 산업, 특히 대기업은 이미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벗어난 지 오래야. 많은 규제 완화로 그들이 성장을 한다 해도 그 부의 분배범위는 더 좁아지면 좁아졌지 결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의 분배가 이루어진다거나 취업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환상이라니깐?"
며칠 전 신문 1면에 났던 기사가 떠오른다. 작년 한 해 동안 대기업은 더욱 많은 매출을 올렸지만 정작 그 기업의 취업자 수는 전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성장보다는 취약한 분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지금 내수가 꽉 막힌 한국경제와 청년실업률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이런 거대한 국가적 정책을 두고 얘기를 할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여하튼 이 정태인의 강연에 많은 부분 한미 FTA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단지, 이미 통상무역국가로서의 운명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가 실제로 미국에 의존하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의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있을까라는 대안부분에 있어서는 그의 강연에서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는 못했다. 단지 한미FTA를 안해도 우리 경제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의 설득만 당했을 뿐...

그럼에도 이번 총선이 끝나면 가장 먼저 암울한 뉴스가 "한미FTA의 의회 승인"이 될 것 같다.
뭐 파란나라야 이미 예견될 일이지만... 흑흑.

함께 듣는 음악은 Pablo Milanes의 "Antologia"(1995)앨범 중 3번 곡 "Yolanda"이다.
이 가사 중 이런 게 있다. "때때로 내가 패배했다고 느낄 때마다, 그래서 아침의 태양을 보고싶지 않을 때마다, 그 때 조용히 당신이 가르쳐 준 기도를 외워봅니다. 욜란다~ " 아~ 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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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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