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근길 우박을 동반한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렸다. 도저히 촛불문화제에 나갈 엄두를 못내고 집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확인해보니 '관보게재를 유보'하겠다고 하고, 재협상 논의가 점점 힘을 얻어간다는 뉴스를 접했다. '휴~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정부의 목덜미를 징하게 잡을 줄은 예상못했다. 일전에 촛불 문화제는 참여하지만서도 이런 집회방식으로는 도저히 정권의 고시철회를 얻어내지 못할 거라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정권은 결국 쇠고기 수입 고시를 강행했다.

그날, 난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집단적 분노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87년 6월 항쟁 때 중학생으로 지역에 살고 있었던 내가 본 거리의 주인공들은 대학생들이었다. 물론, 인도에서는 성인들과 나와 같은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이 몰려나와 구경 반 응원 반으로, 거리를 점거하고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들고 짱돌을 들고 행진하는 대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행진의 대열은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열은 주로 남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이 분노의 행렬은 연령, 성별, 계층으로 구분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잠든 아이를 업고 가는 부부에서부터, 나이 꽤 든 양복쟁이 아저씨, 손을 잡은 젊은 연인들, 고등학생, 중학생들, 대학생들, 하이힐을 신은 직장여성들, 엥 시위에서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지켜주겠다는 예비군복장의 젊은이들 등 특정한 계층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람들이 '고시 철회, 협상 무효'를 외치면서 앞 뒤로 끝도 없이 거리를 행진했다. 정말 앞과 뒤의 끝을 보지 못한 채 종로, 을지로, 광화문길을 걸었다.

그리고 내가 안토니오를 만나러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토, 일요일에는 더욱 많은 서울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청와대 부근까지 맨몸으로 진격하기까지 했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시민들은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란 길은 모조리 뜰쑤시며 돌진했다. 그리고 살수차를 뿌려대고 방패, 곤봉을 휘두르는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많은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보에 게재하겠다'고 했었다.

점심식사를 직장 동료들과 하면서 이미 이 국민적 저항은  쇠고기 문제를 떠나서 87년 6월 항쟁처럼 '정권 퇴진'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고 조만간 다가올 6.10항쟁 기념일에는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는 일까지 발생할꺼라고 얘기를 했다. 이명박의 지지율은 10%대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0%대로...     

그런데, 오후 7시 정부에서 관보게재 연기를 선언했다. 집에 와서 인터넷 뉴스를 보니 엄청난 폭우 속에서도 서울광장에는 2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고 평화행진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국민들의 힘에 드디어 독선적인 정부가 움찔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나와 눈큰이 또한 고무되어 있었다.  

나와 눈큰이는 오늘은 좀 여유롭게 저녁을 해 먹고 그동안 못읽었던 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밤 11시경 눈큰이가 일찌감치 곯아떨어진 후 나는 다시 컴퓨터를 켜서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입력하고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 새벽 삼청동 앞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한 여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전경들에 의해 목조름을 당하고 난 후 실신하였고, 경찰들이 인공호흡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조금 후에 봉고차가 와서 그 여자를 싣고 어딘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사망설'이 돌고 있는 것이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누군가의 유언비어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자꾸 마음 한 구석이 떨려온다. 당시 폭력진압의 사진 및 동영상을 보았기에 더욱 마음이 떨려온다. 그래서 지금까지 잠 못들고 이러고 있다.

사실이 아니겠지? 그렇겠지? 제발...

혹시 이놈들이 이 사실을 알고 나중에 발각될까봐 지금 갑자기 이런 저자세로 돌변한 건 아니겠지?

그냥 촛불을 든 전국의 국민들이 무서워서 이런 거겠지?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빨리 상황이 파악되기를 뭔가 잘못 전달된 루머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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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6월 3일(화) 새벽에 두렵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쓴 글이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 잠들면서도 그런 일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문제는 당시의 폭력진압 상황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나는 인터넷에서 이 여학생 사망설 소식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다시 눈큰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고 시청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다. 광화문을 끼고 서대문에 있는 경찰청까지 가서 폭력진압의 최종 책임자인 어청수 경찰청장은 물러나라, 폭력경찰 물러나라고 외쳐댔다. 자주 볼 수 없었던 대학 깃발들이 나부끼고, 민주노총 노조들의 깃발들도 오랜만에 펄럭였다.
그날도 함께 동행한 직장 동료로부터 '방금 전화받았는데 여자 사망한 게 진짜인 것 같다구 누가 그러네?'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이 사망설 소식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지 초조함을 가지고 지켜봐야 했다.

오늘 오후에야 경찰이 이 사망설 루머를 퍼뜨린 48세의 남성을 붙잡아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럼에도, 아고라광장을 비롯한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아직도 이 문제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요즘 세상에서 그런 사실을 은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들에는 적어도 백명 이상의 전경 및 경찰 관계자들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건 확실하지만, 만약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접했다면 3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새로운 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악성 루머일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쨋든, 천만 다행이다. 그렇지만 불안불안하다. 며칠째 잘 시간이 되면 그 어린 여학생이 진짜로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어쩌나 계속 마음이 쓰여 불안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아직도 인터넷 상에서는 분명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휴~  
그래서 나는 분노한다.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있는 각종 폭력진압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사람 하나 죽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저질렀던 폭력진압과 비슷한 장면들이 있는가 하면, 전경들 속에 파묻혀버리는 여학생의 일그러진 얼굴도 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수가! 2008년에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잔인한 만행을...
그렇기에 (지금도 루머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지만) 이런 글과 함께 게시된 명확하지 않은 사진들을 수만명의 사람들이 보면서 나처럼 '정권의 은폐가 있을 수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참 같지도 않은 무식한 정권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가는 요즘이다.

오늘은 지방에 있는 안토니오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 일찍 들어와 안토니오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고 안토니오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었다. "애기 아팠어, 그래서 애기 울었어"라고 조금 힘없이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안토니오 때문에 같이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왔다. 다행히 낮부터는 열도 내려가고 그럭저럭 잘 논다고 하고, 여느때처럼 10여곡이 넘는 노래를 메들리로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촛불 문화제에 계속 참여하다보니 집안이 엉망이었다. 내 담당인 청소를 거의 3주만에 했다.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적어서였는지 3주 치고는 걸레가 이전처럼 더럽지가 않았다.

잠깐동안이나마 억지로 평상시의 일상으로 돌아온 하루였다.

내일도 촛불 문화제에 나가 힘을 보탤 생각이다.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속내가 훤히 들어나보이는데(예정된 '국민과의 대화' 생방송도 무기한 연장했다고 한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다짐이다. 이 문제는 어떤 정치적 타협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나의, 안토니오의, 가족의, 그리고 이 한반도에서 소박하게나마 하루하루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먹거리의 문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끝을 봐야 할 투쟁인 것이다.
 
함께 듣는 음악은 Jennifer Warnes의 "The Well"(2001) 앨범 중 9번 곡 "The Nightinga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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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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