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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제목을 달고 나니, 오늘이 양력 1월 2일이다. 글을 쓰기에 너무 늦은 감이 있나? 그래도 사람들은 '기축년''기축년' 말하지만 음력으로 설날이 되어야지 '기축년'으로 쓰는게 맞다고 아직은 '무자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면서 그냥 제목을 살려두기로 한다. 그래 아직은 쥐의 해다. 양력 1월 1일 0시, 보신각 앞에 많은 사람들도 아찔한 쥐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해 '쥐를 잡자'고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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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부부는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냥 건너뛰기로 했었다. 뭐,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지방에 있는 부모님께 맡겨놓은 이후인 최근 3년 동안에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보다는 그 다음날이 공휴일이고 그래서 성탄절 당일 아침일찍 안토니오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인파에 치이면서 손을 잡고 술렁이는 거리를 걷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 술 한잔과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잊혀진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눈큰이는 어떤 간단한 이벤트라는 걸 기대하는 눈치다. 그리고 나 또한 특별한 날을 핑계로 눈큰이를 깜짝 놀래켜주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 크리스마스 3주전쯤이었던가? 인터파크에서 연극공연 하나를 눈큰이 몰래 골랐다. 
『밀키웨이』. 사실 김명곤이 연출했다는 것 하나로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골랐으니 인터파크에서 공연 제목을 『김명곤의 밀키웨이』라고 한 것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
솔직히 몇 주전에 예매를 해놓고도 크리스마스 이브날 당일까지 공연예매를 해놨는지도 깜빡 잊을 정도로 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긴 막상 당일날에는 회사일로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지낸 하루였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눈큰이에게도 괜한 기댈 심어줬다 이브날 영 꿀꿀한 채로 극장문을 나올 것 같아 거짓말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줄거리도 잘 모르고 그런데, 공연관람평이 영 형편없더라구. 김명곤한테 낚였다고 다들 별점을 적게 줬어'
(인터파크에 올라온 관람평들은 다들 좋았다. 특히 김명곤의 연출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높게 꼽았다.)
'근데, 뭐하러 그런 연극을 골랐어?'
'이브날 남는 표가 여기밖에 없드라구!'
(사실, 다른 연극들은 별로 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으이그... '
'그래도 자기 몰래 이렇게 일찌감치 준비한 게 어디야~ 안그래?'
'하긴 그래. 고마워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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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7시 30분 공연인데 퇴근시간이 늦어져 시간을 거의 맞춰서 대학로 공연장 앞에 도착했다. 경기 불황이다 공연업계의 불황이다 하지만 이날만은 대학로가 젊은 사람들로 가득찼고,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 계단과 길은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평소 사람들이 많이 운집한 지역은 가길 꺼려하는 나이기에(촛불집회같이 연대의 틀로 짜여진 곳은 예외지만^^) 극장에 당도하기 전부터 괜히 이 번잡한 날에 연극을 보러가자고 한 게 후회가 되기도 했다. 대학로 4번 출구로 나오면서부터 연극을 홍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많은 인파들로 인해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연극시작 10분 전쯤에 도착해 객석을 확인해보니. 왠걸? 맨 앞자리였다. 지난 번 『늙은 도둑 이야기』를 볼 때는 좁은 간격때문에 다리를 한참동안 굽히고 있어야했고, 그러자니 끝나고 나니 다친 왼쪽 다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한결 편한 자세로 연극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연극에서 극중 관객을 불러다 연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고 하는데, 가능하면 이 연극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도 용기를 내어 한 번 무대에 서고 싶었다. (날 아는 사람들은 웃을 지 모르지만, 어렸을 적 꿈이, 아니 대학다닐 때도 해보고 싶은 것이 연극무대에 서보는 것이었다. ^^;) 
배우가 없는 무대에는 몇 개의 걸상과 책상이 조명이 꺼졌을 때 위치를 맞추기 위한 형광테이프 위에 놓여져 있었고, 양 무대 끝 벽에는 서랍장들이 세워져 있었다. 저예산 투입 연극이란 느낌이 들게 '매우' 소박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밀키웨이는 두 사람의 배우가 출연한다. 정은표, 이동국이라는 배우가 '밀키팀'을, 류태호, 정의갑이라는 배우가 '웨이팀'을 맡았다. 우리가 본 7시 30분 공연은 웨이팀이 맡았다. 뭐, 딱히 어떤 배우를 보고 선택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웨이팀의 열연이 눈부셨다. 
원제가 "은하수를 아시나요?"라고 붙어 있다. 독일 작품으로 2차대전 당시에 전사자로 되어 있던 한 인물이 살아돌아오면서 겪게되는 이야기를 이번 연극에서 김명곤은 '월남전'에서 돌아온 한 젊은이가 겪는 이야기로 각색을 했다. 
첫 장면은 정신병원의  한 당직의사 진료실, 그에게로 한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대본이라면 함께 연극을 했으면 좋겠다고 찾아온다. 한 때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던 그 의사는 며칠동안 이 극본을 본 후 정신병원 환자들과 의사들을 상대로 연극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니깐 이 연극은 연극에 연극을 입힌 이중적인 구조로 진행이 된다. 졸지에 관객은 정신병원의 환자들 또는 간호사, 또는 의사가 되어 버린다. 
연극 속 연극은  젊은이가 월남전에서 살아돌아와 고향땅을 밟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고향에서 그는 전사자가 되었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전답은 이장(과 아마도 군수가 짜고)이 꿀꺽한 상태이다. 결국 이장은 그의 신원 회복을 거부하고 그는 억울하게도 육신은 살아있지만 공식 정체성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마침 베트남전에서 한 전사자의 신분증을 빼낸 것이 있어 결국 그가 선택한 건 그 전사자의 신분으로 살고자 한 것. 그러나 그 또 다른 이름의 인간도 사기를 치고 수배중이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인생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져 살아간다. 술집에서 서커스 곡예단의 일원으로 목숨을 내걸고 극도로 위험한 연기를 맡기까지 등... 그는 그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부던히더 애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가혹한 현실 뿐.
그리고 그는 서커스 곡예에서 자신의 목숨을 팽개친 채 오토바이를 탄 채로 세상의 속도에 절망해 쇠우리 속을 돌다 그만 튕겨져 나가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결국 이곳 정신병동까지 오게 된다.
연극은 그렇게 이 젊은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모두 설명하면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은 이 젊은이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묵직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런 당신들은 진정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밀키웨이에 여러분도 함께 하자고 그가 환히 웃으면서 손짓하는 것 같다. 
그와 꿈을 찾아 떠나는 그의 여행에 동행하게 된 의사는 저 밀키웨이에서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누구를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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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 블로그에서는 익명으로 활동하지만 난 현재 평범한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종일 직장생활을 하고 돌아와서는 약간의 독서와 가끔 살을 빼려는 의도로 헬스장 런닝머신을 탄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 내 이름 석자가 박혀있고, 난 내 의지만 있으면 어디든 가고 내 신분증과 내가 가진 약간의 경제적 능력으로 내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럭저럭 할 수 있다. 그래. 그렇다고 난 진정한 나일까?
평생 책을 번역하면서 살고 싶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평소 관심을 갖던 한 NGO에 들어가 진정 내가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싶다. 더 이상 이 빌딩 숲 서울에 부평초 인생으로 살고 싶지 않고, 자연 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일을 하고 싶다. 그래, 언젠가는 나도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 꼭 연극무대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동화를 구현하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아이들과 같이 웃고, 뛰어 놀면서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난 아이들과 같이 놀때가 그 어떤 놀이보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또 다른 나의 꿈들 중 어느 것이 나인가? 
저 이름 없이 지내는 젊은이의 궤적을 쫓으면서 연극 내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극은 말한다. '당신의 꿈을 잃지 마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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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이의 역을 맡은 정의갑이라는 배우의 연기도 뛰어났지만, 정작 병원 의사, 고향 이장, 어느 회사 사장, 술집 주인, 서커스단의 동료 등으로 많은 역할을 놀랍도록 새로운 인물로 연기해 내는 류태호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정말 두 배우의 열연이 시선과 생각을 다른 곳에 두지 못하게 할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그 때 그 때 순간순간 그 앞자리에서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해 두고 싶은 욕망이 일 정도로 강렬한 대사가 있었지만 정작 그 배우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 결국 지금와서는 잊혀져 버렸다. 
한편으로는 연출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두 배우의 열연때문에 많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국판으로 설정했다고는 해도 어쩐지 우리 상황과는 뭔가 동떨어져 있는, 그래서 첫 고향이장과의 대면 장면을 빼고는 대부분 외국 작품을 그대로 가져온 작품같은 이질성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연극을 관람하는 데 크게 약점으로 꼽히지는 않았다.
얼떨결에 큰 고민없이, 그리고 그만큼 큰 기대 없이 택했던 연극이지만 많이 웃으면서도 또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주는 가슴 따뜻한 연극이었다. 

맨 왼쪽이 류태호, 맨 오른쪽이 정의갑 배우이다.




눈큰이가 오늘은 퇴근후 학원에서 수업을 들은 후 늦게 집에 왔다. 컴퓨터 그만하고 옆에서 밥먹는 걸 쳐다봐달라고 한다. 
어제 안토니오를 보러 부모님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오늘이 눈큰이의 음력생일이라고 하면서 직접 끓여서 솥째 주신 (국산) 쇠고기 미역국을 다시 끓여놓고 김치와 김 두가지 반찬을 꺼내놓고 늦은 저녁을 그녀는 먹는다. 난 글을 쓰는 걸 멈추고 그녀 옆에서 귤을 까 먹으면서 묻는다.
"자기는 '밀키웨이'에서 어떤 장면이 인상적이었어"
큰눈을 허공에 던지면서 생각하다가 베란다 쪽 컴컴한 창을 손으로 가리키며 '별'이라고 한마디 내뱉는다?
"왜 어린시절부터 바라본 별이 있다고 그 주인공이 그랬었잖어. 그 별을 계속해서 찾아 떠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그래, 우리에게 연극『밀키웨이』는 이 병들어가는 도시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별 하나를 되찾아 주었다. 고마운 2008년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오래 기억해야겠다. 

함께 듣는 음악은 뮤지컬『The Legend of Sara』(2000) 앨범 중 4번 곡 "Les Lignes De Ta Main"(레리네드따망)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이번 함께 듣는 음악은 원래 김동률의 『歸鄕』(2001) 중 4번 곡 "우리가 쏜 화살은 어디로 갔을까"를 선택했는데... 그놈의 저작권 때문에 결국 올린지 10분도 안돼서 음악을 바꿔야했다. 이것 참 이렇게 음반을 사서, 그것도 의도적으로 몇 년 묵은 음악들만 꺼내서 그 앨범 중 한 곡 올리는 것도 문제가 되니... 그렇다고 좋은 가요음반을 안 살 수도 없고. 참... 세상 사람들과 음악으로 공감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이 그리 큰 잘못인가?

 * youtube에는 The Legend of Sara 뮤지컬 음악이 없는 관계로 원래 듣고자 했던 김동률의 곡을 링크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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