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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글 / 길(2007)

일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회사의 입사 면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질문이 "무인도에 가서 살게 된다면 무얼 가져가고 싶은가?" 였다. 그 때 나는 "책을 가져가서 평생 번역하면서 살겠다"라고 했었다. 면접관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을게다.
이 블로그의 주소는 Simmel이다. 대학원 때 그의 글을 물론 영어 번역본으로 접했지만, 대학원 기간 몇 년 동안 그의 글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기본적 사회 현상들을 종국적으로는 개인의 영혼에 접목시켜 해석하는 그의 글은 다른 어떤 사회학 서적에서 접하지 못했던 뭐랄까 인문학적이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까지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 소설과 시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그의 문학적 글쓰기와 인간 영혼의 문제로 천착해 들어가는 고민의 흔적들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을 졸업해서도 내가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다면 그의 글을 평생 옆에 끼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더 없이 행복하리라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월급봉투 하나 바라보면서 일상에 찌들어 그런 생각을 했었나조차 스스로를 의심해보지만, 내 근원적인 욕망이랄까? 내면에는 계속 짐멜에 대한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김덕영 선생은 한국에서 짐멜에 대한 책을 매 해 꾸준히 출판하고 계신 전형적인 학자이다. 짐멜과 베버의 비교 논문으로 독일 국가교수자격증(하빌리타치온)을 딴 이론사회학자이다. 김덕영 선생이 처음에 한국에 오셔서 쓰신 몇몇 책들은 사실 오랜 독일생활로 인해서인지 전형적인 번역체로 이루어져 있어 딱딱하고 어려웠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선생님의 글은 이제 좀 더 친숙해지고 표현도 부드러워졌다. 그래서일까? 매년 꼬박꼬박 책 한 권 이상씩은 내신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의 반영인지 몰라도 한겨레 21에서 '상반기 추천 인문학서적'에 '베버! 이 사람을 보라'라는 선생님의 책이 뽑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 기뻤더랬다.

한 해 한 해, 짐멜 관련 서적을 내시는 선생님의 수고로운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짐멜에 애정을 가진 나같은 사람은 꼬박꼬박 읽고 갈증을 풀어나가야 했음에도 직장생활하면서 이론사회학에 대해 독서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선생님의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3만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나의 얇팍한 지식을 덧대는 일보다는 짐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을 정리해서 올려놓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글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여기 한국에서도 그의 글이 널리 읽혀지고, 현대 문명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영혼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더 깊이있고 다양한 논의들이 활성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뭐 꼭 저자 같구만ㅋ>

나 스스로도 내 블로그의 주소를 Simmel로 했으니 그에 대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블로그에 짐멜에 대한 글들을 올릴 수 있는 기쁨을 준 김덕영 선생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자 ... 그럼! 오늘은 짐멜 1탄 "돈"에 대한 내용이다.

#서문
한국의 사회학사와 사회학이론이 척박하게 된 데에는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 한국인들이 독일에서 쓰는 박사학위 논문은 주로 한국과 아시아에 관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의미가 없다거나 하는 식의 논리를 전개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 역시 궁극적으로는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지향해야 하고 나의 이론을 그리고 우리의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쪽에 대한 논문을 쓰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쪽의 이론을 강의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무언가 뒤바뀌지 않았는가? 무언가 거꾸로 되지 않았는가? 무언가 자가당착적이지 않은가? ......
아니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 이론에 대한 깊이 있고 장기적이며 체계적인 연구와 논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넘쳐나는 외국 이론에 피상적 수준에 머물다가 새로이 유행하는 다른 이론으로 재빨리 넘어가는 피상성과 천박성-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지적 풍토가 한국의 대학과 지성계를 영원히 외국 이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다. 진정으로 한국적인 이론-사실 이러한 표현 자체가 합당한지 모르겠다-을 원한다면 먼저 사회학적 사유의 초석을 다진 주요한 이론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
지적 노예가 되고 식민주의자와 문화제국주의자가 되며 지식 수입상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남을 제대로 모르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시적인 호기심과 지적 유희 및 유행으로 남의 이론을 바라보거나 무조건적으로 이를 배척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남을 제대로 알아야 남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이다.

뭐 내가 대단히 공부한 것도, 연구를 통해 밥벌어 먹는 것도 아니지만 지난 대학, 대학원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직딩이로서 가끔 접하는 학술적 내용이나 토론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학문풍토의 천박함에 대해서는 자주 글을 올렸었고, 자주 비판해 왔었다. 그래서 김덕영 선생이 안타깝게 문제제기하는 것에 절대 공감한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 게오르그 짐멜은 누구인가
영혼이란 짐멜에 의하면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정신적 영역과 능력의 상호작용의 총합을 가리킨다. 영혼은 말하자면 과정인 것이다. ......
사회-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사회화-를 인식대상으로 하는 짐멜의 새로운 사회학적 사고는 국가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국가과학과 사회과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그 당시 독일에서는 사회를 국가의 일부분 또는 구성요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자연스레 국가과학의 하위요소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도 사회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짐멜의 사회학은 지적 '반역'이나 지적 '혁명'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
짐멜이 제시하는 모더니티의 특성으로는 아마도 분화, 개인주의, 심리학주의, 상호작용 및 상대주의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대세계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분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
둘째, 현대세계는 개인주의 또는 주체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 그는 모더니티의 단편들을 다룰 때 언제나 이것들이 현대인과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숙명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는가를 따진다. 개인과 인격 및 개인법칙은 짐멜의 지적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개념이다.
셋째, 현대세계는 개인주의와 더불어 심리학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내적 세계, 즉 정신과 영혼이 점점 더 전면에 부각되기 때문이다. ... 심리학주의란 내면적인 세계의 체험과 해석, 그리고 영혼의 유동적인 요소에 의한 확고부동한 내용의 해체를 의미한다.

짐멜이 어떤 학문적 권력과 자본을 형성할 수 없었던 이유도 아마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학계에서는 이단아였고, 가히 인식의 혁명적 전환가였던 것이다. 그 당시 독일 사회도 산업화가 크게 진척된 상황에서 이렇게 그의 모더니티의 특성을 추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현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아젠다를 이미 짐멜은 정확하게 집고 있었다.

1. 돈
# 짐멜에게는 자본주의 담론이 없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은 합리적 화폐경제를 촉진했고, 이는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상호작용, 인간의 자의식과 인간과 세계의 관계, 개인의 내적-정신적 세계와 자유 및 인격 그리고 삶의 양식에-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짐멜이 추구하는 인식관심이다. 따라서 그의 화폐이론은 돈과 영혼의 관계를 축으로 전개되고 있는 자본주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짐멜에게서 돈과 영혼이 결합되는 논리는 베버에게서 자본주의와 정신이 결합되는 논리와 유사하다. 다만 베버가 문화사적-사회학적 자본주의 담론과 모더니티 담론을 전개한다면, 짐멜은 철학적-형이상학적 자본주의 담론과 모더니티 담론을 전개하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 돈이 현대세계에 대해 지니는 의미
"근대는 실제적인 삶의 내용에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객관성을 부여했다. 기술, 온갖 종류의 조직, 그리고 기업과 직업은 점차 사물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으며, 더 이상 개별 인격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는 마치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에서 점차 인간화된 특징을 벗겨내고 자연에 객관적 법칙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렇게 해서 근대는 주체와 객체를 상호 독립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양자는 더욱 더 순수하고 완전하게 자체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짐멜은 물질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대립, 지성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의 대립,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대립, 영속적인 것과 비영속적인 것의 대립을 언급한다. 이들 범주는 모두 "삶의 총체성"을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각 역사적 시기는 다양한 대립쌍을 그 시대의 삶에 적합한 방식으로 가공해 독특한 세계상을 구축한다.
......
돈은 경험적 세계에서 영원히 운동하는, 일종의 영구기관이다. 현대인의 삶은 "동요하고 열광하며 휴식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주는데, 돈은 이 같은 삶에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를 달아준다. 이 바퀴는 결국 삶이라는 기계를 영구기계로 만들어버린다."

" " 안은 짐멜의 글을 직접 인용한 부분이다. 꽤 오랜 시간, 그러니깐 1년이 넘는 기간동안 하루종일 앉아서 짐멜의 "돈의 철학"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글을 통해 나는 현대세계를 보는 일정한 시각이 생겼으며, 아직도 많은 사회현상을 볼 때 그가 제시해준 인식틀이 내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기술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 부분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는 거의 경탄에 경탄을 하곤 했었다.

# 돈과 영혼
돈에 대한 짐멜의 논의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이자 돈에 기반하는 문화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지적 작업이라면, 이는 돈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특성과 더불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특성을 내포함을 암시한다. 돈은 탈개체화시키며 탈인격화시키는 동시에 개체화시키며 인격화시킨다. 돈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며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 현대문화가 진행되는 일견 상충된 두 가지 방향... "첫 번째가 수평화, 평등화 그리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까지도 동일한 조건하에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더 광범위한 사회 영역을 창출하는 방향이라면, 두 번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을 성취하고 개인의 독립성 및 인격 형성의 자율성을 보존하는 방향이다." ... 사회과학적 논의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개념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과는 달리, 짐멜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개념의 틀 위에 모더니티 담론을 구축한다.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철학과 니체로 대변되는 개인주의 철학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현대인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고 결정하는 두 가지 기본원칙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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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성격이나 특성을 갖지 않는다. 많고 적음의 수량적 대소관계가 돈의 유일한 규준이다. 돈은 질적 차이보다는 양적 차이를 중시한다. 따라서 돈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이며 비인격인, 그리고 가장 비천한 존재이다. 이러한 돈은 개인의 주관적-인격적 특징이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든 인간을 단순한 수량적 관계로 환원시킴으로써 수평화하고 평준화하고 평균화한다. 결국 돈은 현대인을 탈개체화하고 탈인격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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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 돈은 현대인의 사회적 삶과 문화적 삶의 물적-경제적 토대가 된다. 돈이 가지는 양적 논리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서 질적 논리로 비약한다. 돈의 전형적인 논리인 탈개체성과 탈인격성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체성과 인격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역설적이지만 다름아닌 돈의 소유에 의해 주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돈을 소유한 개인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투쟁의 유물주의적 단계를 벗어나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주관적 삶의 양식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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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식관심은 어떻게 시민계층의 개인들이 단순히 자본주의적 세력과 질서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특유한 경제적, 사회적 강제와 요구로부터 영혼을 구제하고 인격을 발전시키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본질적인 자아에 복귀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나의 갈증은 그것이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과연 짐멜이 말하는 바 대로 '영혼을 구제하고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이 부분에서 나 또한 이 양반이 엄청 체제 옹호자, 또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보면 '경총'의 자본가들에게 자신들의 부의 추구에 대한 이론적 타당성을 제공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매달려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돈이 가져다 주는 '궁극적으로 본질적인 자아에 복귀'하는 것이 가능키나 하단 말인가? 오히려 소수 몇 사람들에게만 그런 혜택을 가져다 준다면 과연 내가 그의 글들에 이처럼 계속 매혹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뭐 이런 불만 요소가 아직도 있다.

# 자본주의의 차안과 피안에서 - 짐멜과 니체
니체는 문화와 국가 그리고 사회를 구분하는 바, 그중에서 문화란 특정한 시대나 민족의 창조적인 삶을 뜻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주권적 개인 또는 거리와 숭고함의 파토스에 터하는 귀족적 개인주의의 함양과 발달에 이바지하게 된다. 문화는 예술영역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이상적으로 발현된다. 이에 반해서 국가는 정치의 담지자로서 문화의 하부구조에 해당하며, 사회는 주로 물적-경제적 생산을 담당하며 정치의 하부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 중에서 정치는 문화, 국가 그리고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와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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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기능하는 근대 시민사회는 평등하고 평준화한 왜소한 인간들의 군집과 그들의 행위 그리고 관계에 의해 성립된 사회의 유형일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과학이나 교육도 이제는 자본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가치와 이상에 예속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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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근대 화폐경제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돈은 보편자로서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모든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무화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니체의 도덕이론을 수용할 때 짐멜이 가진 기본적인 지적 동기와 관심은 어떻게 현대의 시민계층적 개인들이 바로 화폐경제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물적-경제적 토대 위에서 니체가 설파한 인격과 질적 개인주의 그리고 숭고함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

돈의 철학을 보면 짐멜은 바로 이 니체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즉, 돈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평준화, 분업화를 통해 인간은 독특한 인간 개개인의 영혼을 드러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며 결국 '문화의 비극'(자기 영혼에 이르는 길이 거의 닫혀있다는 뜻에서)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짐멜은 그러한 돈을 통해서만이 다시 인간의 질적 독특성, 본질적인 자아에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 니체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래도 짐멜에게 니체는 사유의 울타리를 제공하는 스승이었음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돈과 영혼 그리고 자본주의와 정신 - 짐멜과 베버
직업으로서의 과학, 직업으로서의 정치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자본주의야말로 근대 시민계층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와 사회질서의 문화적-윤리적 기초를 이룬다. 직업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스스로 책임지고 행위하는 인간들에게 개인적 삶의 이상과 사회적 요구를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짐멜과 베버의 근본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간파할 수 있다. 짐멜이 보기에 현대문화의 물적 토대를 구성하는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 모든 인간을 단순한 경제적 역할과 기능의 담지자가 되도록 강요한다. 화폐경제와 더불어 직업이 대표적인 기제이다. 직업은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개인에게 객관적이고 외적으로 주어진 기능과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켜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점차로 증가하는 직업적 분화와 전문화는 개인적 인격의 무차별화를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한다. 직업세계에서 "특정한 기능이나 지위의 담지자"에 지나지 않는 개인의 인격은 마치 "호텔방 고객의 인격과 같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결론적으로 짐멜은 인간의 영혼을 말살하는 직업세계와 이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부동할 수 있는 세계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현대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회적-문화적 대안으로 간주한다.


일견 베버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과연 직업을 통해서 근원적 자아의 욕망이 해결되고 있는가? 일은 일로써 여기고 오히려 일 외적인 곳에서 자아에 대해 더 사색하고, 자아를 더 드러내려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이미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의 직업이란 개인에게 있어 베버가 말한 '쇠우리'와 같은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직업을 부정한다면 과연 짐멜이 이야기한 돈을 통한 종국적인 자아의 회복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다. 돈의 철학은 정말 명쾌하고 깊은 인간 상호작용에 대한 탐구, 인간 영혼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그 대안은 정말 깜깜하게 닫혀있다. 내가 공부한 짐멜의 글은 돈의 철학을 제외하고는 단편적인 짧은 글 몇 개가 대부분이다. 그 글 속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는데...  김덕영에 의하면 멜이 직업의 대안으로 밝히는 것은 '직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문화적 공간', 대표적으로 '친교, 사랑, 종교 그리고 예술의 범주'라고 한다. 확실히 직업 속에서는 그 대안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물론, 특수한 개개인들은 그럴 수도 있다). 오히려 짐멜이 말한 공간들, 예를 들어 현대의 각종 동호회 집단들, 인터넷 까페들 등에서 개인들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발산하고, 아주 본질적인 사교성을 발현시키면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낸다. 음... 연구해보면 참 재미있는 주제일 거란 생각이 든다.

함께 듣는 음악은 영화 "Tommy"의 Original Soundtrack 앨범(1975) 중 Disc 1의 17번 곡 "Pinball Wizard"이다. Elton John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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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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