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알랭 드 보통| 역자 정영목 | 출판사 청미래


친구!
자네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에 우선 축하를 해 줬어야 했네. 아니 난 분명 그 술자리에서 자네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꺼냈을 때 그자리에서 정말 축하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네. 자네 나이가 벌써 몇인가?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었겠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글쎄... "
"이 책 한 번 읽어봐. 난 이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
씩~ 웃으면서 내게 들이민 책이 바로 이 책이었지. 자식~ 오랜 방황끝에 제대로 좋아하는 사람 만났다고 들떠 있는 녀석이 책 한 권 가지고 사랑을 정의내려? 그치만 자주가는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 가판대를 통해 자주 접한 책이어서 그리 낯설지는 않았네. 더군다나 빨간 표지라니... 순정 소설 쯤으로 다가왔었다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 표현이 문자화되어서 떡 하니 있는데, 얼마나 구닥다리고 매력없게 다가왔겠는가!  

그로부터 몇 달이 흘러 나는 자네 생각이 나서 이 책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네.
결론에 앞서 그 날 그자리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자네가 이 책을 내게 소개해 줘 매우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 정말 책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을 휘벼 파더군. 그리고 '이제 그만~'하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사랑과 관련된 현상들을 들이팔 때는 정말 읽는 게 괴로울 때도 있었네. 그치만 두고 두고 오래 남을 책임에는 틀림없네. 물론, 자네가 말한 것처럼 이 책 자체가 사랑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지만, 한 순간의 사랑의 감정과 흐름을 정말 완벽하게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네.  

다시, 그 술자리에서 자네가 교제하고 있다는 여친에 대해서 설명할 때로 돌아가 보세나.


#낭만적 운명론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
나는 회의적 태도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자네가 사귀고 있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너랑 맞겠어?' 하면서 부정적으로 말했었지. 늘 이런 주위의 평은 자신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도 난 제 3자의 입장에서 훈수를 두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컨데... 자네에게는 전혀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어쩌겠나? 자네 눈에는 그토록 간절한 그녀였는데, 막상 내 귀와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비추천의 대상이었으니, 자네에게까지 내 의견을 왜곡시켜 말해야 했겠나?  


# 이상화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의 말이다. ...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안절부절이야?' 라고 내가 물었을 때 자네는 그냥 씁쓸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잔을 부딪혔지. 그래! 그 순간 자네가 진짜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다는 걸 알았어야 했지.
'내가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를 만나고 그랬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인거 같아'
자네가 했던 그 말이 퍼뜩 생각나더군.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자네는 기필코 그녀를 자신에 맞게 고치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자네를 잠못들 정도로 괴롭게 하는 이유들을 길게 오래오래 설명했어. 내 대답은 간단했다.
'너 왜 그런 여자를 만나냐? 난 이해할 수 없어'
돌이켜 보면, 자네가 원했던 그녀의 변화된 모습이란 어쩌면 자네가 지난 날 누렸던, 혹은 자행했던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자기부정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
어때? 자네와 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이야기를 하며 '솔직히,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두려움때문에 그들과 더 진득하게 섞여 놀았던 측면도 있을거야. 생각해봐. 난 시골에서 혼자 올라와 사는 어찌보면 외톨이 신세였다구'라고 말했고, 나는 '그런 니들한테 끼지 못해 얼마나 안타깝고 외로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에겐 그 진득한 추억이 없다. 니가 부럽다'라는 말을 하면서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지. 기억나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그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자네를 이렇게 만난 후 벌써 몇 개월이 흘렀네. 그 땐 후덥지근한 여름이었지.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이 책을 그리 침이 마르게 극찬했던 자네의 연애생활이 어찌 변했는지 궁금해서 먼저 전화를 했었네. 어떤가? 정말 시간이 그 답을 말해주던가?


# 이면의 의미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나랑 마주앉아 고기를 구우면서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자네는 한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네. 오고 가는 문자 속에 자네의 인상은 찡그려졌다 활짝 펴졌다가 정말 애 같더군. 순간,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나 싶었어. ^^ 물론이지. 그녀가 보낸 문자 몇 글자를 가지고 머리 속에서는 수십가지 상상을 자아냈던 때, 그녀가 지은 몇 가지 표정을 가지고 밤새 내내 뒤척이며 그 의미를 찾고자 했던 때가 분명 있었네.
'으이그, 그렇게 좋아?' 난 그냥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고 고기 한 점을 기름장에 찍어 우적 우적 씹으며 그냥 실실 웃으며 바라봤었지.
 

# 마르크스주의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천사]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 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난 솔직히 자네가 정말 그녀를 애타게 '사랑'(이젠 이 말이 전혀 무의미하게까지 들리는구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 나 싫으면 언제든지 떠나'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녀와 과연 '해피앤딩'(이 말도 말이 안되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해 80%는 부정적이었네. 아니 90% 정도는...
물론, 끝까지 밀어붙여 사랑을 '쟁취'(웃기는 말이지!)했다는 삼류 이야기는 많이 있으니 10% 정도는 그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세상이치에 대한 기본 예의였다고 생각해 주게나.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어때? 결혼 생활이 행복하냐?'
'행복하지. 사랑스런 아기도 있는데... 맨날 보고 싶다'
그러나 이 카뮈의 인용 구절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난 지금, 전체는 아니지만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공감가는 구절이라고 생각해. (사랑해서 그리되었는지, 그리되어서 사랑하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실제로 눈큰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내가 갖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졌다고 생각했거든. 예를 들어 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홀연 떠나구 이러는 '일탈'같은 걸 할 위인이 못돼. 근데 그 때 그녀는 정말 즉흥적이었어. 자유로와 보였지. 그런데... 결혼해서 생활해 보니 또 그것도 아니더라구. (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 화도 날 때도 있지만) 그녀 또한 나처럼 많이 주저하고 망설이고 그러는데, 그럴 때마다 '왜 자꾸 내 못된 특성을 닮으려고 해!' 하면서 구박을 주곤 하지.
그래서 말야. 자네가 그녀를 '12시까지 들어오게 하고' '전에 사귀던 남자랑 깨끗이 정리시키고' '유명 명품을 밝히는 폐단을 고치게 하고' 하는 등의 거창한 포부들, 아니 그 때 자네를 힘들게 하던 그녀의 특성이라는 것들 외에 자네가 그녀에게 정말 매료된 그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그 때 자네가 뭐라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렇다고 자네가 보여준 그녀의 사진에 대해 나 또한 특별히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거로 보아 외모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으니...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나? '야~ 비싼 데서 놀구들 있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깐 그녀가 새벽2~3시가 넘도록 전화를 안받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아 자네를 안달복달하게 만들고, 전에 사귀던 남자와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전화 통화 등을 하면서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놓게 만들어 놓게 하고, '내가 싫으면 언제든 떠나도 좋아' 하는 말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녀 이야기만 하면 일그러지면서도 흥분하던 네 모습 속에서, (버르장 머리 없이 나와의 단독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문자를 주고 받으며 기묘한 표정을 짓던 네 모습 속에서, 난 자네가 그녀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지를 알 수 있었어. 그녀는 그 때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너의 간곡한 문자에 답신을 보냈을까?
그래. 맞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단순하다. 나도 그런 체질이다. ^^;


#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우리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있었다. ... 왜 보통 친구들에게 하듯이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을 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
부모와 정치가들이 메스를 꺼내들기 전에 하는 낡은 말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두고봐. 난 걔를 꼭 바꿔놓고 말 거야'
자네가 이 얘기를 2~3시간의 술자리에서 몇 번을 읊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귀에 선한 것 보니 자네의 의지가 정말 강렬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네. 물론, 난 그렇게 누굴 바꾸는 게 사랑이냐고 항변을 했을 지도 모르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것 말일세. 그치만 자네정도로 집요한 의지는 아니지만 함께 지내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던' 시절과는 틀리게 자꾸 무언가를 상대에게 요구하는 나를 흔하게 발견하게 된다네.
우리 부부도 흔히 싸우는 게 '나니깐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야' 라면서 마치 균형의 추를 쥐고 있는 것마냥 눈큰이에게 충고를 해 줄 때였네. '나니깐' 이게 참... 그렇다고 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난 예측하기를 자네의 그런 의지는 어쩌면 부질없는 끝을 예고할 수도 있겠다 싶었네. 안그런가? 자네는 그 때 그녀의 현재를 갈망한 게 아니라, 변화된 그녀의 미래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네.
이보게, 이건 자네가 내게 추천한 이 책과도 너무 위배되는 이야기이고 계획이지 않은가?


# 사랑을 말하기
내가 하려는 말은 언어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이었다. 그 말이 가리키는 것에는 안정된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을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
사랑, 헌신, 홀림, 이런 단어들은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나는 감정적 의사소통의 돌이킬 수 없이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네. 난 눈큰이에게 '나를 사랑하는가?' 또는 '사랑이 뭐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네!
'사랑은 당신이야'
음~ 뭔가 썩 그럴싸한 대답을 했다고 그녀는 신나했지. 나도 딱히 뭐라 트집을 잡을 수 없었네.
'그럼 내가 당신에게 뭐야?'
눈큰이도 내 추천으로 며칠 만에 이 책을 읽고 요즘 즐겨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네.
'당신은 내 토스트야'
이 책을 읽은 자네는 아마도 키득키득 웃겠지. 이 책에서 왜 그 남자가 고민고민하다 클로이에게 사랑 고백할 때 그러잖아. '당신은 마시멜로야'라고...
 어쨌든, 자네가 추천해 준 책을 부부가 같이 읽고 나서 서로 나누는 표현들이 재미있어졌네. 그점에서 자주 지루해지는 요즘 일상에 작은 흥미와 변화를 가져오게 해 준 자네에게 감사해야겠군.  
다시 자네 문제로 가서 '왜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데?'라고 내가 안타깝게 물었을 때, 자네도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자네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자 노력했던 거라면, 그래서 쉽게 대답해 주지 못했던 거라면 정말 미안하이.  


#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는가?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아시스 콤플렉스가 완전한 망상인 것만은 아니다. 사막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 지평선에서 무엇인가를 본다. 다만 야자나무는 시들었고, 우물은 말랐고, 오아시스는 메뚜기로 뒤덮였을 뿐이다.

참, 일부러 드러내서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내 속의 은밀한 생각들을 마치 속에서 지켜 본 것마냥 까발려 쓴 것처럼 가슴이 싸해지고, 씁쓸해지게 하는 글들이 이 책에는 정말 많이 들어 있다네. 자네의 그 간절한 바람만큼이나 나도 분명 연애를 하면서, 결혼을 하면서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봤지. 안 봤으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
물론, 막상 생활하면서는 분명 우리가 상상하던 싱싱한 야자나무와 시원한 청량제를 듬뿍듬뿍 쏟아내는 우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건 시간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잘한 노력 때문일 수도 있고, 그리고 '적당한 포기' 때문일 수도 있네. 물론 귀찮은 메뚜기 때들은 매 순간 우리의 말없음 속에서나 너무나 답답해 뵈는 우리의 반복되는 일거수 일투족 속에서나, 내가 전혀 상대방에게 의식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때 언제든지 떼로 덤벼들지.
그런데 말일세.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네. 왜 자네가 그리는 그녀의 변화된 모습은 현재의 그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인데 왜 그녀에게서 그런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그렇게 힘들게 가고 있는 것인지.    


# 회의주의와 신앙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그래. 사랑의 이유를, 진실을 찾는 방법을 찾는다는 건 쓰잘데기 없는 짓에 불과해. 기껏해서 그 결과물이 나온다 해도 그건 보편적이지만 개개인에 적용할 수없는 존재치 않는 말장난에 불과할걸쎄.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의 단계를 지났다고 생각하는 지금.
잠이 많은 눈큰이가 먼저 잠든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내가 왜 이 여자를 사랑했을까?'라는 무거운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곤 하지. 그러나 그것보다는 말일세. 이제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든 그녀 옆에 누우면서 '그래. 이 사람이 나랑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구나'라는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하고 잠드는 경우가 대부분일세.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살아지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되지. 그것이 우리네 인생의 적절한 타협점이 아닐까 생각하네.
그런 지금의 내가 무모하게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강행하고 있는 자네의 심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그 시절이 그립냐구? 언제는 옛 시절이 그립지 않을 때가 있겠나? 그렇지만 현재, 지금 이순간 속에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라고 얘기할 수 있다네. 아니? 어쩌면 안토니오라는 새로운 행복과 짜릿함을 맛보느라 그런 무모했고, 온 몸이 떨렸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한탄할 시간이 없는 걸지도. (이것도 어쩌면 현재의 여정이 더이상 스펙터클하지 않기에 느끼는 자기 변명일지도 모르겠네^^)  


니체는 『선악의 피안』[1886]에서 마침내 핵심을 움켜쥐고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가운데 무엇이 진정 '진리'를 원하는가? …… 우리는 그 가치를 묻는다. …… 왜 비진리가 아니라 진리인가? 왜 불확실함이 아니라 진리인가? 심지어 왜 무지가 아니라 진리인가? …… 어떤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 판단에 대한 반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삶을 발전시키느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가장 그릇된 판단들이 …… 우리에게 가장 불가결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릇된 판단들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정제 등 온갖 약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어쩌면 옳은 판단보다는 그릇된 판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숱한 사연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몰라. 무엇이 가치있느냐가 중요한 것일세. 불확실함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주지. 그래서 나는 항상 안정을 추구하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을 즐기는 탐험가들도 분명 존재하겠지. 그들은 그 불확실성이 없으면 삶의 가치가 없을 것이네.
누가 옳고 그른 것이겠나? 그것이 진리든 그렇지 않든 그들 영혼이 살쪄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시대의 아픔에 등돌릴 수 없어 그에 맞서 싸운 것을 그 자신의 삶의 질의 고양으로 바라보고, 어떤 이는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렸을 때부터 가진 교사의 꿈을 이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고,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 삶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겠지. 여기에 진리가 개입할 여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의 말은 결국 아직 말랑말랑한 노른자와 흰자가 위태로우니 원하는 모양 틀에 넣고 쪄서 고체화시키겠다는 말처럼 들리더군. 근데 내가 든 생각은 그 고체화되는 순간 자네가 진짜 그녀에게서 느끼던 매력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였네. 물론 그보다 선행되는 의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과연 그녀가 자네가 바라는 대로 (자네를 위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겠는가이지만 말일세. 그러니 자네의 그 미망은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심각한 해를 입히고 나서야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네. 그러나 자네의 그 감정을 누군들 바꿀 수 있었겠나? 그건 끊이 끊어진 다음에야 냉정해 질 수 있는 일이었거늘...


# 나의 확인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그녀는 분명 자네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한 떨기 꽃이 되었네. 숨쉬는 것처럼 그녀를 그리면서 그녀는 자네에게 단지 스쳐지나가는 '몸짓'이 아닌 '꽃'이 되었겠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빛깔과 향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는 자네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 근데 문제는 자네가 그녀에게로 가 그녀에게 '꽃'이 되었는지를 난 자신할 수 없었지. 물론, 자네도 확실히 자신하지 못해 초조해했지만 꼭 그 '꽃'이 될 거라구 술김에(?) 확신을 했지.
이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런 걸세.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자네가 이전부터 '나에게 각인되었던' 자네 형태를 잊어버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었네. 그녀 얘기를 꺼내다 좋아 죽을려구 하구, 신나하다가두, 또 똑같은 그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인상을 잔뜩 쓰면서 답답해하고 화를 내기도 하구. 정말 꿈틀거리고 있었지. 발정난 아메바처럼. ^^ 어쩌면 자네의 눈에는 자네의 '불붙은 사랑'이라는 현상앞에서 냉정함을 가장하여 비판한 내가 이미 생명활동을 멈춘 아메바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군. 상당부분 굉장히 느려졌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네.  


# 마음의 동요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품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모든 선택[아무리 멋진 선택이라고 해도]에 따르는 불가피한 상실로 인한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
미지의 존재에는 거울이 달려 있어, 거기에 우리의 가장 깊은, 가장 표현할 수 없는 소망들이 모두 비친다. 미지의 존재란 방 건너편의 처음 보는 얼굴이 항상 이미 알고 있는 얼굴보다 신비하기 마련이라는 숙명적 명제와 다름없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갈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할 때에는 무한정 뻗어나갈 수가 없다.
......
나는 상상 속에서만 클로이를 배반했던 것이 아니다. 종종 따분하기도 했다. 호화로운 호텔이나 궁전에 사는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사람은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한동안 나는 클로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을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내 삶의 일상적인,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이 되어버렸다.

이건 올인을 하고 있던 자네 때문에 옮겨 놓은 글이 아닐세. 얘기중에 미안하지만 이건 순전히 '(결혼을 했든, 안했든) 오래된 연인'중 하나인 내가 공감하는 불편한 이야기이기 때문일세. 정말 이 알랭 보통이라는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누군가를 우연히 사랑하고 갈구하고, 또 사랑을 얻고 나서는 오히려 그녀의 자잘한 행동과 복장을 불평하고, 심지어 이렇게 스치듯 만난 타인을 갈망하는 곁눈질까지...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그러나,
누군가에게 올인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나는 살고 있고, 지금도 나는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있네.
즉 에너지 총량으로 따졌을 때 내가 쏟는 에너지를 올인할 당시 상대에게 90퍼센트 쏟았다면, 지금은 정확히 측정할 수 없지만 상당히 줄어들었음에 틀림없네. 지금은 그 외의 문제들이 우리 둘의 혹은 나 스스로의 관심사가 되고 있네. 아마 그녀에게 쏟았던 에너지의 반만큼이라도 곁눈질에 쓰인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글쎄... ^^;
물론 눈큰이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지만, 곁눈질은 더 이상 올인할 때의 에너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부분이 되어 버린단 말일세. 오히려 새로운 삶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나타나기가 쉽다네. 여기서 작가는 소설 주제로서의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그 에너지의 투입영역이 삶에서 바뀌어 간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네. 여기서는 작가가 모든 주변 상황을 증발시켜 버리고 그, 그녀, 그리고 삼각관계를 만드는 제 3자로 단순화시켜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지만, 그래서 그 에너지 발산 영역이 엉뚱한 제3자로 가지만, 현실에서는 (나같은 경우에는) 아이에게, 그리고 (내가 정말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길 찾기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걱정이 많아지는) 부모님에게, 건강에게, 살림 문제에 분산된다는 말일세.
물론, 이 소설에서처럼 제 3자의 등장으로 두사람의 관계가 파멸에 이른다면 정말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곁눈질을 통한 갈망의 충동은 부정할 수는 없겠지.
무슨,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것 같군 그래. ^^
자네는 (그녀의 말로는) 헤어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연락을 취하고 있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더 초조하고, 더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 오죽했으면 자네가 직접 헤어진 그에게 전화해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윽박질렀겠는가? 나까지 참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구먼.


# 수축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자네가 그녀의 이러저러한 면 때문에 괴로와 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당시 주장했던 것처럼) 그녀와 헤어지지 못하고 더욱 빨려들어갔다는 것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를 사랑하냐구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자네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

'잘 지내?'
'어~ 너는 어떻게 잘 지내냐?'
'나야 뭐 늘 그렇지. 저번에 추천해준 알랭 드보통의 책 잘 읽었다고 얘기해줄려구 전화했어'
'하하! 읽었냐?'
'엉. 그나저나 나랑 만난 지 석달이 넘어서고 있는데 그 고통많은 연애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냐?'

함께 듣는 음악은 Shostakovich의 "The Jazz Album"(1993) 중 Jazz suite No.2 (Suite for Promenade Orchestra)의 'Ⅵ. Waltz 2'이다. 13번 트랙이다.
Peter Masseurs가 트럼펫을,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로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Riccardo Chailly (리카르도 사이)가 지휘를 맡았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