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 사상사(2008)

강준만의 글은 신문을 통해서나, 혹은 인터뷰를 통해서 잠깐잠깐 접했던 기억만 가지고 있다. 오래 전, 손호철 교수와 김대중 정권을 두고 대립의 각을 세웠던 때가 있었는데, 아마  그 때가 강준만이라는 인물을 처음 내 머리속에 담았던 순간이었을게다.

이 책은 작가가 "씨네21"과 한국일보 등에 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최근 쓴 글부터 앞면에 배치하여 편집한 책이다. 일전에 조국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더이상 이런 묶음집은 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각개약진공화국"이 풍기는 묘한 냄새에 이끌려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각각의 짧은 글들 속에서 교육, 경제, 정치 등 다양한 한국사회영역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나름 내걸고자 하는 방식으로 글들은 묶여 있다.

원인 분석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 해결지점도 동의한다.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일극체제가 근본 원인이라고 작가는 온 지면에서 강조한다. 정치도 서울 여의도 정치의 일극 중심, 경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일극 중심, 교육도 서울 중심, 대통령 한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 서울 청와대의 대통령 일극 중심, 언론도 서울에 있는 조, 중, 동 일극 중심, 그리고 심지어 대항 언론도 서울 중심, 시민운동도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활동해야 인정받는 일극중심...

맞다. 모든 게 한 극으로 치우쳐 있는 데서 원인을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 대안도 결국에는 이 일극중심체제를 극복하는것, 곧 말그대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확산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가 실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 또한 언론의 기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운동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그러자면 탄탄한 실천과 공동체의 지지로 무장한 '시민있는 시민운동'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자면 언론 또한 중앙 집권적 언론이 아닌 지역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지역의 대안활동들이 소개되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꼭 어떤 정치적 변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네 생명의 위기와 이 환경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작은 지역단위에서의 실천적 변화를 이끌어갈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모르겠다. 강준만 교수도 동의할까?

놀랍게도 대안은 대도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 대도시는 이미 땀흘려 노동하는 곳도, 그런 이들을 인정하는 곳도 아니다. 파편화되고, 오히려 자신의 진심과 감정을 숨긴채 지성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말과 글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살고 있다. 사람간의 연대의 감정은 온데간데 없고 하루종일 도시 상공에서는 돈과 계산의 법칙이 도시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일찌감치 치열한 경쟁속에서 숨돌릴 여지도 주지 않는 곳. 그곳이 바로 서울이다. 그런 곳에서 어떤 대안이 나올 수 있을까? 삶의, 공동체의, 환경의, 생명의 대안 말이다.  

# 한국사회의 '인터넷 콤플렉스'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광장을 활성화하자. 
                                                                        - 소설가 조선희 -


진보주의적 착각이라 함은 기존 거대매체를 보수세력이 사실상 장악했던 과거와 비교해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대안매체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이념적 '편 가르기'논리가 인터넷에 적용된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실명제'만 하더라도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 보수파였고, 반대하는 측은 대부분 진보파였다.

아예 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글을 쓰더라도 논쟁적인 글은 피하려고 든다. 실제로 그 어느 언론매체에도 기사회되진 않지만, 시사적인 글을 쓰는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으로부터 튀기는 '배설물'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배설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소신을 더 세게 밀고 나가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그것도 문제다. 아주 독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기계적 인간들만 제 목소리 내고, 나머지 대다수가 배설물을 피하려는 글만 쓰려고 드는 공공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건, 한국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콤플렉스 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최근 들어 아고라가 '민주화의 성지'라는 말을 한다. 상당부분 아고라의 토론광장에서 촛불의 정당성 논리와 참여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나 또한 아고라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너무나 예리하고 정확한 진단과, 그 상상력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또한 그동안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에서 '~카더라'는 말을 아무 힘없이 불편하게 접할 수 밖에 없던 수동적 독자였다면, 이젠 네티즌들은 오히려 그 기사에 대해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반박글을 쓰면서 동의를 얻기도 한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아고라나 오마이뉴스 등 여론 형성을 위한 장에서의 댓글문화는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댓글 문화가 상황을 양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좀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데 오히려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댓글을 통한 마녀사냥식 몰이도 그 폐해 중에 큰 폐해이기도 하다. 얼마전 100분 토론에 나와 촛불문화제의 불법성에 대해 말하는 서강대 여학생을 보면서 참 너무도 어리숙하고 자기 울타리 안에 갖혀있구나 안타까워했었는데, 그 방속이 있은 다음날부터 아니나 다를까 온통 이 학생의 동영상을 캡쳐하여 패러디를 하고 인격적인 모독을 하는 댓글들이 인터넷 각종 웹사이트를 휩쓸고 지나갔다. 순간... 비록 그 학생의 말과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학생의 신분으로 단지 토론장에 나와서 자기 의견을 밝힌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인터넷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은 그 학생 본인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테러였다고 생각한다.
 댓글제도를 없애고, 글에 대한 논리적 반박글이나 지지하는 또 다른 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한 논의가 보다 성숙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 이명박 정권의 '37번째 쇼'
3년 전 서울대 총장이었던 정운찬 씨는 "SKY 출신이 사회요직을 독차지하고 있다"면서 "형평성이나 양질의 교육을 위해 학생 수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구 2억 8,000만 명인 미국의 상위 10개 대학 총 졸업생이 매년 1만 명에 불과한데 인구 4,700만 명인 한국에서는 SKY에서만 1만 5,000명의 졸업생이 나온다"고 지적하면서, "효율적인 학교 운영이나 연구와 교육의 질 등을 생각하면 학생 수를 지금보다 많이 줄여야 한다"고도 했다. 정씨의 생각은 백번 옳았지만, 그에겐 그렇게 할 만한 힘이 없었다. 한국 엘리트의 인해전술, 신물이 나지도 않는가?

그 동안 서울대의 폐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 또한 전문 대학원화 또는 서울대 폐지 등의 생각만 해왔지 인원을 대폭 줄이는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대안은 상당부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맥을 통한 인맥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수를 줄여 그런 네트워크가 제한되어 작동하게끔 하는 방안도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서울대' 인맥의 거미줄은 직장을 다니는 어느 사람이건 실감할 것이다. 사실 그들이 유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그들의 인맥을 통해 부당하게 편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짜 '서울대'가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세계 속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서울대는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사실, 변하려 해도 기존 기득권에 안주해 있는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바꾸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꾸려고 하는 집단 또한 그 안주의 틀에서 벗어나 정말 혁신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신물난다. 그들의 모습과 행태에...  

#'포로수용소'에 갇힌 중산층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논객들의 글을 읽어보시라. 구구절절이 옳고 아름답다. 그런데 대부분 거대담론이다. 비분강개다. 비진보, 반진보 세력의 양심없음, 어리석음, 파렴치함을 공격하는 걸로 진보진영에 표를 주는 유권자가 늘 거라고 믿는 방식이다. ... 다양성은 진보파의 미덕이기도 하다. 옳고 아름다운 거대담론과 더불어 생활밀착형 담론도 꽃을 피우면 좋겠다.

촛불의 함성에 눈귀 가린 이명박 정권에 대해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말(言)이 아프다" 고... 이 책에 실질적인 대안이 나왔으면 내가 여기에 옮겼을텐데 그러지 않은 것 보니... '눈이 아프다' 그러나 진보진영에 대해서 이렇게 까놓고 얘기하는 같은 진보진영의 식자들도 드물다. 그들도 한솥밥?

# 여론조사는 범국민적 오락이다
1960년대에 프랑스 정치에 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dieu)는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여론조사가 '모든 사람이 의견을 갖고 있다' '모든 의견이 똑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에 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등 그릇된 전제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좌파 언론학자 허버트 실러(Herbert Shiller)는 "여론조사는 현상유지를 위한 매춘"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여론조사에 과도한 의존의 대표적 사례가 정당 내 여론조사 경선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국민대 교수 이명진은 "당원들이 해야 하는 후보 선출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은 정당정치를 포기한 얄팍한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서울대 교수 박찬욱도 "지금과 같은 정당의 후보선출 방식은 여론조사의 본질을 모르는 '조사 문맹(Research Illiteracy)' 현상이자, 정치적 선택이 가요인기투표와 같다고 여기는 포퓰리즘"이라며 "노선과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든 지지율만 높으면 된다는 풍조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무조건 유권자의 변심을 정당화, 미화하는 쪽으로만 치닫고 있다. 모두 다 '대중의 지혜'의 신봉자들 같다. 그렇지만 대중의 지혜는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구조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가진 자체적 힘(머릿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선거에서 과실을 챙긴 사람들이 앞 다투어 대중의 지혜를 역설할 게 뻔한데 말이다.

진짜로 코메디였다. 경선에서 여론조사를 반영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총선 후보들을 당외부 인사들을 불러다가 심사한다는 것 자체가 난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럼 정당은 뭐란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지난 총선 결과를 접했을 때 머리속은 그냥 멍해지는데, 방송에서는 "국민들은 정말 절묘한 선택을 했다"는 멘트로 총선결과 평을 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떠오른다. 도대체 모두 부를 쫓는 불나방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재개발되리라는 욕망을 안고 눈앞의 이익에 앞뒤 안가리고 표를 던진 국민들이, 성추행, 음주폭행 등으로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치인들이 고스란히 재당선되었는데... 뭔 절묘한 선택?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양화된 민주주의, 모든 걸 일대 일로 평등화 시키는 민주주의 선거라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날이 가끔은 있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의견이 똑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는 전제에 대해서 가끔 혐오스러움을 느낀다. ... 어려운 문제다.  

한편, 촛불집회가 진행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많은 언론인들이 그 촛불집회에 동감하는 멘트들을 많이 날렸었는데, 그런 언론인들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인간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제 동족의 살과 뼈를 갈아 먹여놓고선 그렇게 해서 병든 소를 '미친 소'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런 표현을 쓸 때 여러분들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부끄럽고, 당혹스럽고 그 표현의 잔인함에 몸서리 쳐지지는 않으신지요? '라고 말이다. 촛불집회에 가서도 '미친소'라는 구호를 들으면 왠지 따라 부르기가 어색해서 우물우물거렸다. 그럴 때마다, 인간이 너무나도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위해 그런 짓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는 인간이... 그리고 그런 가엾은 소에게 '미친'(mad)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하는... 으~~~


# 조직론으로 본 한국의 비전
우리의 5.16 쿠데타는 어떤가. 쿠데타의 주체세력이었던 육사 5기와 8기는 진급 적체 현상의 최대 피해자였다. 전쟁 때까지는 1년에 한 계급씩 올라갔었는데 종전(終戰)과 함께 7~8년씩 대령에 머무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5기생들은 수시로 모여 진급문제를 논의하게 되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쿠데타 음모로 발전했다. 8기생도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데는 8년이 걸리는 인사 적체에 시달렸기 때문에 "도저히 이대론 못살겠다"는 식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얘기라 옮겨봤다. 그러고 보니 이 5.16 쿠데타는 '박정희' 개인으로만 연관시켰지 이러한 군 전체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강준만이 쓴 '한국현대사산책'이 읽고 싶어졌다. 재미있고 색다른 해석과 기록들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연역적 개혁'에서 '귀납적 개혁'으로
연세대 교수 박명림은 "386세대가 너무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오만이다. 사회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목적으로 보는 인문적이고 사회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쟁과 연대가 공존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학생운동의 독서행태를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 달랐다. 1970년대 세대는 인문적 상상력을 소중히 여겼고, 소설을 많이 읽었다. 1980년대엔 강령이나 지침으로서의 독서가 주종을 이뤘다. 게다가 이 세대는 정치적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민주정부를 성립시켰고, 또 386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했다. 말하자면 정권 집행세력이 전혀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찰의 시간이 없었다. 이들이 주도한 한국 민주주의는 탈지성화, 탈인문화와 같이 갔다."

일전에 대학교 때 수업을 듣다가 한 교수님이 설명해주셨던 1970년대 운동집단과 80년대 운동집단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운동단체(?)가 지나온 과정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70년대 활동했던 미술가들이 모여서 80년대 초반에 이 단체를 조직했을 때는 다분히 "함께 있으면서 쌓이는 정" 등이 강조된 반면, 80년대 들어서면서 후배들은 그들에게 '낭만적 감성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다분히 혁명적 이론으로 무장하여 선배들을 가혹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왠지 이 박명림 교수의 설명이 뭔가 그 단초를 제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80년대 이론으로 무장한 386세대들이 대거 전면에 등장했던 노무현 정권이 왜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색다른 해석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본다.  

#영어광풍의 정체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포고령 1호를 발표함으로써 영어능력이 권력의 원천이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먼저 나온 신문은 국문신문이 아닌 영어신문이었으며, 좌익계열 신문인 조선인민보의 창간호(9월 8일)마저 1면에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를 실었다는 게 그걸 잘 말해주었다.
미군정 치하에선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른바 '통역정치'가 판을 쳤다. 그런데 영어 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는 거의 모두 일제시대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 해방 후엔 친미 노선을 취한 사람들이었다. 해방정국의 정치가 왜곡된 주요 이유중의 하나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은 영어와 미국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쟁 중인 1952년에 나온 '샌프란시스코'라는 가요는 "뷔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라고 노래했다.
......
경제개발기의 수출지상주의, 김영삼 정권 들어 외쳐진 세계화는 영어의 현실적 가치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1995년 2월 23일 정부는 1997학년도부터 초등학교 3~6학년생에게도 영어를 주당 2시간씩 정규교과목으로 가르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어린이 영어학원이 급증하는 등 1996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치열한 '영어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한국에선 애초부터 영어공부의 주목적은 실용성이 아니다. 내부경쟁용이다. ... 똑같은 대학, 똑같은 학과를 나와도 영어가 우열을 결정한다. .... 한 네티즌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우리의 현주소는 "당신 영어 잘하니까 해외 쪽으로 일하는 곳에 특별채용하겠소"가 아니라 "영어도 한마디 못해? 이거 저질이구만. 나가"라는 식이다.

마지막 구절이 참 아프게 다가오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평소에 전혀 사는 데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지고, 안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주일에 몇 번 BBC홈페이지에 들어가 기사를 프린트해서 읽고, 생활영어 홈페이지에 들어가 오늘의 영어를 힐끗힐끗 보면서 입을 오물오물거린다. 에잇~

# 책임윤리의 딜레마
오랜 민주화투쟁이 우리에게 물려준 한 가지 습속은 책임윤리의 과소평가다. 민주화투쟁은 책임윤리가 필요 없는 운동이다. 물론 지나치게 과격한 투쟁을 선동해 일을 망쳤다면 책임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 민주화투쟁은 옳은 일이라서 하는 투쟁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일은 없다.
우리 시민사회의 각종 결사체는 아직도 그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자신들이 볼 때에 옳은 일이니까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 정의로운 고발이야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만,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하려는 게 문제다. 그런 습속으로 인해 시민의 신뢰가 크게 상실되었는데도, 그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절대! 동의한다. 물론 이러한 민주화 투쟁의 한계를 가지고 과거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산화해가신 분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민주화운동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단지, 한계는 한계로 인정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새로운 사회운동'이라 하여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들어서면서 이젠 정치적 구호를 앞세운 투쟁의 운동방식이 아닌 민주시민들이 자발적 회원으로 가입하여 실질적 삶의 대안을 생산해내는 생활운동이 등장하리라는 기대를 많이 했으나, 많은 부분 아직도 그 구태의 운동방식은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이 바로 이 중앙집중적인 일극체제로 이루어져 있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인분석까지는 강준만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이상하게 해결방안을 이야기 할 때쯤 되면 어느새 강준만 교수또한 지역소외에 대한 한풀이와 푸념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다 지면의 제약을 받는 글들이기 때문에 그런걸까?

#고종석 : 진보주의와 '책임윤리'
그(고종석)는 자신이 '불순함의 옹호자'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좋게 말하면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광신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수파나 이물질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문을 연다. 그 문을 닫아놓는 길은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전유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흩어져 싸우는 개인들이란 결국 세계시민주의자들이고, 세계시민주의의 실천 전략은 불순함의 옹호다. 결론을 내리자.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아직 우리는 그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듯하지만."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해 그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고종석 자신도 영어공용화론에는 찬성한다고 그랬던가? 아마 그 이유에 대해서 강준만 교수가 옮겨 적은 글일게다. 음~ 고개가 일정정도 끄덕여진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멸시나 일국 중심주의적인 사고들 또한 어쩌면 고종석이 말하는 이 단일 언어가 빚어내는 '한민족'이라는 광신이 만들어내는 현상일 수 있다.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 참 멋진 표현이다. 설득력이 있다. 한편, 영어가 공용화된다면 고종석이 말하는 것처럼 다양성이 살아 숨쉬고 영어를 하는 모두가 세계시민주의자들이 될 것인가?

# 공지영 : 상처를 껴안는 법
공지영 씨의 상처 이야기를 하다가 멀리 나갔지만, 공씨에겐 장경동 목사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장 목사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 그의 아내는 이웃집 김장을 도와주러 갔다고 한다. 아내는 김장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일을 끝내고 내버려질 푸성귀나 가져가려고 했더니, 주인장 하시는 말씀이 "돼지 갖다 주려고 그래요?"였다나. 아내는 이 사건을 먼 훗날에야 털어놓았다고 한다.
 장 목사는 세 가지 교훈을 말했다. 첫째, 말을 조심하자. 둘째, 별 생각없이 상투적으로 한 남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셋째, 말의 때를 알자.
...  비판을 많이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건 첫 번째와 더불어 세 번째 교훈일 게다. 장 목사는 아내가 그 일을 즉시 말했더라면 자신은 돈 버는 길로 나섰을 것이라며 말의 때가 중요하다고 했다. 비판도 마찬가지다. 심사숙고와 공부가 필요하다. 생각을 익힌 다음에 발설해야 한다. 나는 그간 개혁, 진보 담론을 이기적으로 사용해온 건 아닌지 새삼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다.
......
"우파들은 내가 좌파 성향인 거 같아 싫어하고, 좌파들은 나보고 운동 팔아먹는다고 싫어했지요. 남자들하고 우파들, 이제는 권력을 얻은 좌파들 심기를 모두 건드린 거지요. 그러고도 사랑받기를 바라면 너무한 거 아닌가?"
"아직도 못 잊어요. 한 평론가가 '고등어'를 두고 '운동을 핫도그처럼 팔아먹는다'고 했지요. '햄버거'라고만 했어도 그렇게 충격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공지영을 두고 문장이 거칠거나 예술적 자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1980년대 변혁운동이나 1990년대 페미니즘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변혁운동이나 페미니즘을 팔아먹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 앞에 문제로서 가로막혀 있는 변혁운동에서 받은 상처라든가 가부장적 현실의 질곡을 자신의 방식으로(물론 그 방식의 평면성은 문제 삼을 만하지만) 글을 써냄으로써 이겨나가려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굳이 그가 무엇인가를 팔았다면 그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글로 가공하여 판 것이리라."
(문학평론가 김명인)

미안해서 옮겨봤다. 나 또한 공지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는데도, 막상 몇몇 평론가들이 '운동이 다 지나간 것마냥 미화해서 상술에 이용한다'는 글을 접하고 나 또한 함께 묻혀서 그 작가를 매도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교훈적 끝맺음이 항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서도 작가 나름대로의 능력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없다.
언제였던가? 작가의 소설 "고등어"를 엉엉 울면서 본 후 얼마되지 않아, 한 여름 장마비가 억수로 내려 한 군대 막사가 산사태로 덮여 거기에서 자고 있던 군인들이 몰살당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뉴스에서 나온 때가 있었다. 그 때 그 흙더미 속에 어느 군인이 밤에 취침등을 켜고 눈물을 흘리며 읽었을 '고등어' 책이 반쯤 나와있는 장면이 카메라 앵글에 지나가듯이 잡혔던 순간이 있었다. 그 때 군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 하나로 그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내 슬픔이 더 컸었다.   

 
# 신영복 : 왜 신영복을 오독하는가?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보수에게 타격을 입힐 대안을 강구하는 것인가? 민중이 믿지 않는데도 진보의 비전과 대안을 역설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신뢰의 문제를 외면하고 벌이는 그런 '대안 노름'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砂上樓閣)은 아닐까? 신영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내서 자신이 신뢰 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직접 접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핵심적인 말이 "연대의 하방구조를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난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나 절실하게 다가왔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기본은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운동진영에 대해서건 아니건 이러한 신뢰집단이 더 이상 없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하방구조를 다시 짤 수 있을까? 어떻게 공동체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이 신뢰를 쌓아갈 수 있을까? 무거운 화두이다.

책 초반에는 나름 신선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더니 후반부로 갈 수록 푸념섞인 글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 읽을까? 생각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인물론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었다.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강준만 교수가 한 주제를 가지고 쓴 책을 접해보고 싶다. 과연 실천적 대안들이 숨어있는지 눈 부릅뜨면서... 일단은 그의 글을 맛만 살짝 본 셈이다.

함께 듣는 음악은 Savage Rose의 "Savage Rose"(1997, 시완)앨범 중 4번 곡 "Sangen for Livet"(인생을 위한 노래)라는 곡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