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비카스 스와루프 | 역자 강주헌 | 출판사 문학동네 (2007)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한 선배를 만나 맥주를 한 잔 마신 적이 있다. 작년부터였나? 그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재미있는 책 좀 추천해 달라고 엄청 졸라대곤 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책을 고르는 방식을 전환하고 난 이후부터는 연락이 뜸해졌지만, 여전히 그 선배가 추천하는 책은 정말 재미있다. 이 책 또한 선배의 추천으로 구입해서 읽은 책이다.
그나저나, 그 선배 곧 결혼식을 올린다던데... 이전보다 책 적게 읽으면 어쩌나? 나의 책 저수지였는데. ^^;

금년 남은 한 달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소설책을 읽을 지는 몰라도 올해 최고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책을 꼽고 싶다. 비카스 스와루프라는 작가를 통해 처음으로 인도작가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게 된 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아마도 지금도 역시 소설가가 아닌 외교관의 신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정규 업무를 하며 두 달만에 집필했다'는 이 책은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글에 거침이 없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집에 기숙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의 아이가 폐렴에 걸렸는데 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만들었고, 그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
그날 저녁 비하리는 하얀 수의에 싸인 아들의 시신을 안고 별채로 돌아왔다. 술에 취해서 비틀대며 걸었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공용수도 옆에 내려놓고 별채 사람들 모두를 불렀다. 그리고 한탄과 독설로 가득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정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 전체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궁전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부자들을 욕했다. 환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탐욕스런 의사들을 욕했다. 허울좋은 공약만 남발하는 정부를 비난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방관만 하는 우리 모두를 욕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난 그의 자식까지 욕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그 자신을 욕했다. 불공평한 세상을 만든 신에게도 욕을 퍼부었다. 한 많은 세상과 타지마할, 샤자한 황제를 욕했다. 언젠가 난헤이(죽은 아들)를 감전시켰던 그의 집 밖에 걸려 있는 전구는 물론 공용수도까지 그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다.  
"넌 쓰레기야! 정작 필요할 땐 한두 방울밖에 주지 않았어. 하지만 내 아들하고는 두 시간 동안이나 잘 놀아주었지. 그래서 아들이 폐렴에 걸렸단 말이야! 널 뿌리째 뽑아버릴 테다. 지옥에 던져버릴 거야!"
이렇게 소리치며 비하리는 수도꼭지를 발로 걷어찼다. 거의 삼십 분 동안이나 끝없이 화를 내고 고함을 질러대던 비하리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부짖고 통곡했다.

처음 소설책을 집어 든 순간부터 책을 덮는 순간까지 가독성은 무시무시하다. 물론 중간에 약간 지루해질려는 부분이 있으나 그건 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인도의 한 빈민촌(집단거주지)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18세 바텐더가 인도 전역에 방송되는 퀴즈쇼에 출전하여 10억 루피, 그러니깐 우리나라 돈으로 3백억원을 거머쥐게 된다. 최하층민이고 고아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 바텐더가 어려운 열두문제를 모두 맞추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방송사에서는 그가 뭔가 사기를 쳤다고 하며 경찰에 고발해 그를 잡아들이게 한다. 모진 고문속에서 결국 억지 자백을 하려는 찰라 한 아리따운 여자 변호사의 등장, 그리고 나서 풀려가는 수수께끼들...

한 문제마다 그에 얽힌 그의 성장기를 단편씩 모아 총 열두 꼭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속에 인도 사회의 문화, 부조리와 가난, 그리고 하층민들의 끈질긴 삶에 대한 저력 등을 그려나가고 있다. 읽는 도중에 어느 순간 조세희 작가의 '난쏘공'이 퍼뜩 떠오르면서, 전혀 무겁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느낌을 받은 게 이상하다 생각되었다.
어쨋든, 고아에 대한 처우, 인도 종교의 부패, 도시 속 암적인 존재들과 그들에 희생당하는 어린이들, 창녀로 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기구한 삶, 빈민촌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 등에 대한 묘사에 한물 간 영화배우의 고독한 삶과 외교관의 부조리, 살인 청부업자의 이야기 등 전자들의 경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섞이면서 기가막히게 재미있는 인도 소설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인도라는 독특한 곳의 분위기가 있어 호기심이 더욱 생기지만 결코 우리나라 밑바닥 인생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욱 비참한 생각은 든다.

너무 순식간에 읽었던 나머지 여기에 옮길 구절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사실 딱히 인용할 만한 구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 시간을 미루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까지 소설의 끝을 보고서야 잠들었고, 끝을 대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 

위의 인용 구절처럼 슬프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 안슬프냐고? 또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람 모하마드 토마스'의 고아로서의 비참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일궈 나가는 성장기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매 문제마다 그 문제를 맞출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독특한 삶의 궤적을 보는 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반전, 반전... 그리고 기가 막힌 해피엔딩!

어찌, 처녀작이라고, 그것도 두 달 만에 쓴 작품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방금 눈큰이가 다 읽었다면서 내게로 온다. '정말 올해 최고의 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네' 하면서 옆에서 박수를 치면서 '별점 다섯하고도 플러스!'라고 한다. 

누군가 세상 살기 지루하고 따분하고 의미없다고 한다면 난 이 책을 선뜻 소개해 주리라. 적어도 이 책에 묻혀 있는 동안은 그런 생각을 잊을 수 있을테니... 

함께 듣는 음악은 옴니버스 앨범인 "Viva Cuba Libre"(2000) 앨범 중 3번 곡 "Hasta Siempre"(체게바라여 영원하라)라는 곡이다. Carlos Puebla가 불렀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