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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4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떠나기 전 작은 아파트에 대해서 어떠한 애착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생각이었고,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며 눈큰이나 나나 하숙생활과 자취생활에 이리 저리 옮겨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였기에, 떠나는 전날 몇가지 짐정리만 하고 아침부터 있을 이삿일 때문에 일찍 잠들었던 것이 지난 주 목요일이었다. 
그치만, 지난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서로 모른 채 살아온 우리는 그곳에서 몸 부대끼며 서로를 맞춰갔으며, 가끔 식탁에 앉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으며, 거실에 같이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고, 침대에 누워 영화를 관람하며 눈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안토니오가 눈을 뜨고, 고개를 움직이고, 몸을 뒤집고, 기어다니고, 집고 일어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면서 행복해했다.
추운 겨울 총총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며 현관앞에 서서 따뜻한 실내온기를 접하며 '역시 우리집이 최고야!'하며 흐뭇해 했던 기억, 여름 휴일 아침 베란다 밖으로 내려쬐는 빛과 함께 요란하게 수다를 떠는 참새들의 지저귐에 잠을 깨면서 기지개를 폈던 기억들, 바람부는 날 베란다 밖 마주하던 절벽에서 푸르게 파도치던 잡풀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젖던 기억들... 기억들이 있다. 
늦었지만, 그 공간에 뒤늦은 감사 인사를 남겨둔다. 삭막한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에 나나 눈큰이나 그닥 어떤 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 자그마한 보금자리에서 우리는 4년동안 포근했으며, 행복했다. 
안녕!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이렇게 아무 감정없이 떠나게 되어 정말 미안해. 이것도 운명의 만남이었을텐데 떠나는 전날까지도 우린 하룻밤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처럼 무심히 잠들고 아무 흔적 남기지 않고 이렇게 떠나와 버렸어. 4년동안 우리를, 안토니오를 무탈하게 품어줘서 너무나도 감사하다는 말 뒤늦게나마 이제서야 마음으로 전한다. 

떠나기 전 떠나기 전마지막 날 담은 떠나기 전공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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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일찍 퇴근해서 지금처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다. 벨이 울리고 부동산중개업자가 젊은 부부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이사할 집은 찜해두었는데 정작 집이 안나가서 애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몇 번 우리가 안토니오를 만나러 집을 비운 사이 몇몇 사람들이 집을 보았으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심지어 집주인에게 사정조로 전세가를 내려서 내놓아달라고 애원하다시피 전화를 한 후였다.(세상에나! 요즘 같은 시기에 2천을 올리다니!)  난 부동산업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신혼부부에게 집 설명을 했다.
'4년 동안 평화롭게, 행복하게 지내온 집이예요. 아마 그런면에서 평화로운 아우라가 남아있을 겁니다'라는 우스갯소리부터 '비록 밖은 절벽이지만, 베란다 밖으로 끝없이 펼쳐친 아파트 단지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4월부터 11월까지는 절벽이 푸른 풀들로 덮여있어서 서울에서 이런 전망 갖기도 쉽진 않죠', '밖이 너무 조용해 아침에는 새소리에 잠을 깬답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결국 신혼부부는 집을 보고 나서 10분도 안되어 바로 계약을 했다. 남자는 집을 구경하기 보다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뭐하시는 분이세요?' 묻는다. '아! 네 그냥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결국 이사 당일 남자는 내게 명함을 건넨다. '혹시, 살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황했다. 우리가 이사올 때 우리는 전에 살던 사람들에게서 열쇠꾸러미만 받고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었다. 그리고 모든 집 관련 문제는 부동산을 통해서 해결했다. 그렇게 나는 익명성의 아파트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분명 그는 선의의 관계맺기를 원했는데 나는 머뭇거렸다. 부동산중개인도 당황하며 '아! 그런 집문제라면 우리를 통해서 하시면 됩니다'라고 제동을 걸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왜 그랬을까? 왜 우리 흔적을 남겨두길, 그리고 그의 적극적 신호에 당황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 익명의,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이 드리워져 있는 이 대도시를 증오하면서 나 또한 그 벽을 열심히 쌓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새로운 세입자 부부와 인사를 한 후,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짐을 나르는 걸 지켜보면서도 나의 그 망설임에 대해 생각하며 부끄러워졌다. 그날 밤, 나는 이사한 집을 대충 정리하고 떠난 집으로 다시 가서 변기며 욕실을 깨끗이 수세미로 닦았다. 변기에 남아있던 찌든 때들이 마치 나의 부끄러운 과오처럼 두드러져 있었고, 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구석구석 수세미로 닦고 또 닦았다. 



어머니; (쿵쿵 뛰어다니는 조카를 보면서 급하게 말리려다 환하게 웃으시며) '참 아래층이 없지? 맘대로 뛰어다녀라.' 
눈큰이: 재래시장도 요 가까이 있어요. 어머님. 자주 올라오셔서 시장도 다니시고 그러세요.  
형: 어~ 넓고 좋네! 
지방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우리 자식들의 성화에 못이겨 3년 전 20여년 살던 허름한 집을 떠나 산 속에 있는 조용하고 넓은 아파트 11층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곳에서 형네 아기와 우리 아기를 차례차례 키우셨다. 아기들은 거기서 걸음마를 배우고 쿵쾅 거리며 달리기를 배웠다. 그럴때마다 아래층에서 매일 올라와 항의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그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한결 편해진 아파트에서 생활하시면서도 도무지 살 곳이 못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지방에 내려가 있으면서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어서, 안토니오가 조금만 발소리를 내서 걸을라치면 뒷금치를 들고 걷는 시늉을 보여주면서 '안토니오~ 걸을 때는 이렇게 걸어야 해' 할 정도였다. 
이사온 것은 1층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연립주택의 2층이다. 무엇보다 아기들이 맘대로 뛰어놀아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 식구 모두가 잘 골랐다고 선택하는 1순위 이유였다.
거실도 이전 아파트보다 많이 넓어졌다. 이사 다음날 모두 모인 가족들은 모두 이사한 곳을 보고 흡족해들 하셨다. 나도 눈큰이도 쿵쾅 거리며 뛰는 조카와 안토니오를 보며 흐뭇했다. 
다음 날 집을 찾은 처제는 이전보다 집이 넓어져 황량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우리도 사실 집이 이리 넓은지는 몰랐다. 집주인이 살고 있을 때 거실과 방마다 가구와 책들이 가득 있었기 때문에 이전 아파트보다 조금 넓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들 짐이 빠지고 기본적인 세간살이밖에 없는 우리 짐을 들여놓고 나니 처제 말대로 황량하게 느껴졌다. 
'우리말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넓은 집을 선택한 것 같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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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비용, 복비 등 엄청난 돈이 하루 사이에 나갔음에도 우리에게 지름신이 제대로 강림했다. 이사한 이틀 후 우리는 주변 자전거포에 들러 오랜 고민 끝에 두 대의 자전거를 구입했다. 안토니오를 아침에 어린이집까지 데려다 주려면 걸어서는 좀 먼 거리여서 자전거를 사서 태워다 주기로 이미 결정했었지만, 눈큰이용 자전거를 살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사한 곳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어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한강 시민공원이 나오게 되어있다. 우리 둘 머리 속에는 안토니오를 뒤에 태운 아빠자전거와 그 뒤를 따라오는 엄마 자전거가 서로 다정하게 한강 강변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시민공원까지 가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나란히 달렸다. 
'갑자기 우리의 생활이 너무 급격하게 달라진 것 같아' 
눈큰이가 내 말에 웃는다. 
추운 바람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폼만 잠시 잡은 채 다시 마을로 되돌아와 몸을 녹이기 위해 마을 앞에 있는 작은 찻집을 찾았다. 이곳은 생협도 있고, 마을 공동체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마을이다. 몇 해전 그 마을에 있는 산을 헐고 개발을 하겠다는 정책당국에 맞서 주변 주민들이 산을 지키기위한 투쟁을 벌였고, 그 투쟁의 성과와 함께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마을 공동체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육아 어린이집도 몇 개나 생겨나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대안학교도 만들어져 운영중에 있다. 우리가 이 마을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물론 안토니오를 공동육아를 통해 기르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이곳 지역 공동체운동을 언론과 관련논문을 통해 접해왔고 이미 호감을 가져온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찻집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샜는데, 이 찻집의 커피 또한 공정무역을 통한 커피를 이용하고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또한 화학재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과일로 만들어진다. 마을 사람들끼리 안쓰는 물건을 기부하고 다시 되사가는 가게도 있고, 생협식품만을 이용한 반찬가게도 만들어져 있다. 찻집에 들러서 알게 된 일이지만 얼마전 마을극장도 생겨나 일반 대형 극장에서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나 지역 소식을 담은 영화를 지역주민들이 모여 함께 보고 작가와의 대화의 시간도 갖는 공간도 생겼다고 한다. 
조금 있으려니 그 마을극장이 끝나고 마을사람들이 뒷풀이를 한다고 우르르 찻집에 들어섰다. 아이들끼리도 서로 잘 알 뿐더러, 마을 사람들끼리 터울 없이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린 그런 풍경을 마냥 신기해하며 쳐다보았다. 그러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계속 밀려와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고 서서 차를 마신 후 튕겨져 나오다시피 나왔다. 서울에서 이런 마을 풍경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믿겨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며 집으로 향하면서 눈큰이는 말한다. 
'나 이 동네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자기는?' 
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익명으로 숨어 살아온 생활이 20여년 가까이 된다. 내가 동경하던 그런 사람냄새 나는 동네 가까이에 와 있으면서도 과연 내가 이런 공간에 적응할 수 있을 지 기대반 걱정반으로 복잡했다. 그렇지만, 이전에 살던, 끝없는 아파트 촌으로 가득 둘러쌓였던 그 삭막한 공간보다, 높지 않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 서로 살갑게 다가서는 것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이곳 동네 풍경은 우리에게,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젠 이번 주 일요일이면 안토니오가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안토니오는 어린이집을 처음 방문하게 된다. 안토니오에게는 분명 엄청난 변화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젠 떨어져 지내야 되고, 익숙했던 산과 들을 떠나 삭막한 도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어린이집 선생들은 아마도 안토니오가 이런 큰 환경변화 때문에 한 번 정도 심하게 앓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일찌감치 몇 주 전부터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와 떠나서 서울에서 아빠, 엄마와 함께 살고, 아빠 엄마가 회사 가 있는 동안 안토니오는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생활하게 될 거라고 자주 말해줘서. 선생님 별명도 다 외운 상태다. 일종의 예방주사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지난 주 토요일에 잠시 할아버지 할머니와 왔다가 당일날 헤어져야 했던 안토니오는 울먹울먹 거리며 '싫어! 여기서 아빠, 엄마랑 살거야'라고 보채기도 했는데... 안토니오도 안토니오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는 상태라서 헤어지고 나면 한 차례 앓으실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 가족 모두 무사하게 이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잘 견뎌내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안토니오! 그럴 수 있겠지? 화이팅하자!
자주 찾아뵐께요. 그리고 자주 오세요. 아버지, 어머니!  



함께 듣는 음악은 Eric Burdon & War의『Best ofl』(1995) 앨범 중 10번 곡 "Paint it Black"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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