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다행히 왼쪽 다리가 다쳤기 망정이지 오른 다리였다면 나의 갑갑한 휴지기는 더 길어졌을 것이다. 사실 회사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이 마당에는 은근히 이전의 감금된 생활이 더 그리워지기도 하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뒹굴뒹굴거리는 호사생활이 현대 직장인들에게 어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시간이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일주일이면 족할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널부러진 시간 또한 내 의지대로 주어담지 못하는 법. 결국 노동이다. 인간의 기본권인 노동말이다.

그래서 오늘, 그러니깐 한달 하고도 열흘만에 출근한 이틀째의 오늘은 그 강도를 벗어나서 내게 간절하고 소중한 하루였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과 마음은 더 일찍 이 세상에 적응한다.

다리를 다친 것이 작년 8월. 그 이후 똑같은 길을 따라 출퇴근을 해왔다. 똑같은 아침과 저녁 풍경. 가령 꽉 막히는 신당역 부근 길을 지나 구간 구간마다 신호등에 걸려 정차하는 을지로, 그리고 잠깐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엑셀을 밟아 도망치듯 지나가야 하는 시청 광장 도로와 일방로인 덕수궁 돌담길...

오랜만에 출근한 오늘도 퇴근 후 차를 몰고 오면서 딴 생각을 잠깐 했나보다. 갑자기 생각이 돌아와 보니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최종적으로 기억했던 장소보다 한 500미터는 더 지나간 후였다. 말이 500미터이지 실제로 퇴근길 교통체증으로 인한 소요시간까지 합치면 약 2분은 훌쩍 넘겼을 시간동안 난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면서도 엄한 정신세계 속에서 있었던 것이다.
 
생각한 것이야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다. 부모님께 맡겨둔 아기가 음악을 좋아하긴 하는데, 집에 시디 플레이어가 없어서 빨리 사다가 컴퓨터 대신 음악을 틀어줘야겠다는 생각, 그러자면 아기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아야 하는데 피아노 위에 놓아야겠지? 하는 생각, 그러려면 플레이어를 살 때 연장선도 함께 사야겠구나 하는 생각...  왜 운전을 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황당한 잡생각에 푹 빠져있었을까?
세상에 이런 생각으로 체증이 심한 도로에서 멍하니 몇 분이나 엑셀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생각하니 웃음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이런 경험이 한 두 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무척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이다.
이전에 회사 생활이 정말 싫었을 때, 나와 눈큰이는 집에 와서는 일체 회사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보통 헬스 클럽에 가서 달리고 땀을 흘리면서 애써서 그 날 회사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들을 잊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 질 쯤 달리면서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단편적으로 막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바로 무의식의 세계 속에 빠져든다. 빠른 속도로 런닝머신을 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함께 따라서 달려오는 생각들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 때가 지나면 훨씬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 이순간 오른다리를 내뎌야 하나 왼다리를 내디뎌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럼 영락없이 다리가 꼬이면서 러닝머신에서 튕겨져나오는 위기를 맞곤 했다.

이젠 그 러닝머신 대신 차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멍한 세계에 빠져든다는 것이 썩 기분좋은 일은 못된다. 다시 깜짝 놀라 눈을 현실세계로 돌렸을 때는 마주오는 차들이 뿜어대는 헤드라이트들과 나도 모르게 놀라 밟은 브레이크와 뒷차의 경적소리... 미안하다고 깜빡이를 켰지만, 그 깜빡이는 사실 나에 대한 경고등이었다.
500미터를 망각 속에서 잘도 운전하고 왔는데, 막상 의식을 차린 순간 사고를 낼 뻔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도 사실은 이런 때가 많다. 그냥 하루하루 아무 생각없이 잘 지내다가 '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순간 모든 게 막막해지고 깜깜해지는 순간이 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 되버렸다. 정신 차리지 마! 그냥 멍~하니 가면 돼.

문득, 망각을 강요하는 세상에 내가 다시 내던져진 게 아닌가 겁이 덜컥 났다.

함께 듣는 음악은 Karen Carpenter의 "Karen Carpenter"(1996)앨범 중에서 4번 곡 "Making love in the afternoon"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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