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 / 역자 노진선 / 솟을북(2007) 


아는 누나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TED 강연을 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링크걸어놓고 이 책을 소개한 글을 봤었다. 영어로 무언가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했지만, 이 누나를 비롯해 여러사람들이 정말 감동적인 강연이라고 하면서 호평을 했다. 
이 책은 지난 4월에 접한 책이다. 눈큰이가 이대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안토니오와 내가 들렀던 리브로 서점에서 이 책을 골랐다.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책이 참 '맛있게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면서 그렇지 않냐고 물어보니 모두 그저 그런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은 이 표지 못지않게 상큼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이 표지를 보는 누군가 바로 눈치챘을 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모 대기업에서 핸드폰 광고를 하면서 우리의 삶은 세가지로 요약된다고 하면서 대박을 쳤던 문구 "Talk, Play, Love"의 아이디어도 시기상으로 봤을 때 아마도 이 책 제목을 보고 떠올렸을 거라는 아주 신빙성 있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이 책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이미지가 있다. 물론 이 책 도입부에 잠깐 기록되어 있기도 한 데, 한 여인이 욕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런 이미지가 반영된 이 여인은 아이를 키우다 문득 힘들고 지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울컥 울음이 터져나온 여인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슬픔으로 깜깜한 절벽에서 잡을 것 없이 추락해 가는 여인일 수도 있고, 그리고 이 저자처럼 그냥 갑자기 자기 생의 모든 게 뒤틀려 버렸다는 것에서 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낯섬  때문에 두 무릎에 힘이 빠져버린 여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나의 추측일 뿐이다.  

# 내 안의 멜랑콜리한 기질과의 싸움
이 모든 절망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심리적인 걸까(엄마와 아빠의 잘못?), 그냥 일시적인 걸까, 일종의 '슬럼프'처럼(이혼이 끝나면 우울증도 사라질까?), 유전적인 건가(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멜랑콜리한 기운이 몇 세대에 걸쳐 우리 가족의 몸 속을 흐르고 있는 걸까? 그것의 슬픈 신부인 알코올 중독과 함께?), 문화적인 건가(단지 갈수록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높아지는 도시 세계에서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포스트 페미니즘 세대의 미국 커리어 우먼이 갖는 부산물인 걸까?), 별자리 때문인가(내가 슬픈 이유는 불안정한 쌍둥이자리의 지배를 받는 민감한 게자리여서?)예술가적 기질 때문인가(창조적인 사람들은 늘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너무도 초예민한데다 특별한 존재이므로?).
그렇지 않으면 진화적인 걸까(우리 종이 지난 천 년간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데서 오는 잔여 불안감이 내 안에 있는 걸까?), 카르마 때문인가(이 모든 슬픔의 발작이 단순히 전생에 나쁜 짓을 한 결과인가? 해탈하기 전의 마지막 장애물?), 호르몬 때문인가? 다이어트? 철학적인 건가? 계절을 타는 걸까? 환경적 요인? 지금 내가 신을 향한 보편적 열망에 빠져드는 건가? 몸이 화학적 불균형을 이루고 있나? 아니면 그냥 섹스를 안한 지 너무 오래돼서? 
 
타인이 봤을 때는 멀쩡하게 번듯한 직장에 멋진 남편과 함께 살던 그녀가 어느날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 원인에 대해서는 뚜렷이 '이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남편과의 어떤 문제가 생겼던 것 같은데(이혼과정에서의 남편과의 끔찍한 매듭짓기에 대해 꽤 오랜동안 이야기한다) 사실 그건 이 책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지금도 도대체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쪼~끔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 
그녀가 문득 훌훌 모든 걸 다 털어버리고 훌쩍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떠나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낯선 공간 속에서 그녀가 이전에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신 속의 보물같은 무언가를 계속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모든 평범한 일상, 직장에 나가 자신이 맡은 일을 매몰차게 해치우고, 집에 와서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며 가끔 남편과 함께 멋진 외식도 하고 또 머지않아 아이(들)를 낳아 그 한 생명이 커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과정에서 맞는 행복과 아픔도 느끼고... 이런 모든 예정되어 있는 그런 삶의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예측을 어렵게 떨쳐버린 그녀.     

# "사실만을, 사실만을, 사실만을 말해"
내겐 가정을 꾸려야 할 책임감이 있지 않을까? 아, 이런, 책임감(responsibility). 그 단어가 무겁게 가슴을 누르며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 단어를 뚫어지게 바라본 결과, 그것이 두 개의 단어로 나누어지며, 바로 거기서 이 단어의 진정한 정의가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임감은 능력(ability)과 반응(response)의 조합이며, 다시 말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궁극적으로 반응을 보여야 할 대상은 내 존재의 마디마디가 이 결혼을 끝내야 한다고 외쳐대는 현실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의 인생이라는 광활한 대륙 위에는 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라고 썼다. 그 글에 따르면 검을 중심으로 한쪽 땅은 전통과 관습, 질서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바른" 곳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경계를 건너 전통을 따르지 않는 삶을 선택할 만큼 정신나간 사람이라면, 검의 반대쪽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곳이다. 정상적인 과정을 따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울프는 검의 그늘을 건너는 일은 여성에게 흥미진진한 존재 가치를 부여하지만, 위험이 따르리라는 사실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
고대 인도의 요가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는 불완전하더라도 자기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 완벽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흉내내며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난 지금 나만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불완전하고 서투르게 보일지라도 이제 그건 나를 빼다박은 듯이 닮아가고 있다.

조금은 개인주의에 흠뻑 젖어있는 매력적인 한 미국 여성의 이기적 결정과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찌보면 그녀의 이런 황당한(?) 결정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질감을 갖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천성적인 낙관주의와 아무 거릴낌없이 써내려가는 솔직함 때문일까? 나의 경우에는 금방 이 책의 주인공인 저자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같이 웃고, 격려해 주고, 공감해 주고, 새로운 사랑을 만났을 때는 '우와~' 박수쳐주면서 말이다. 

책 제목의 각각의 단어는 순서대로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일들, 또는 생각들을 함축해서 표현해 주고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쾌락(eat), 자기를 찾아나가는 명상(pray), 그리고 또다시 맞딱트려지는 운명적인 사랑(love)이 이 책의 세 가지 색깔의 맛이다.

# "난 이탈리아를 사랑한다"
라티오팀의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 
내 첫 번째 축구관람은 내게 있어서 이탈리아어의 맛있는 향연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온갖 종류의 새롭고, 재미있는 단어들을 경기장에서 배울 수 있었다.
내 뒤에 앉은 한 할아버지는 경기장의 선수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환상적인 욕의 화관을 엮어나갔다.
......
야, 야, 야, 알베르티니! 좀 잘해봐…… 그렇지, 그래, 잘한다, 완벽해, 최고야, 최고…… 어! 그래! 계속 가! 가! 골을 넣어! 그래, 그래, 그래, 잘한다. 아이고, 이뻐라, 그렇지, 그래, 그거야-아아아아악! 가서 뒈져라! 이 개자식아! 머저리! 저 등신! 역적 같으니! …… 성모님……저럴수가, 왜, 왜, 왜, 저런 머저리, 부끄러운 줄을 알아……부끄러운 줄……개판이군……배짱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알베르티니!!!! 에라 이 사기꾼아! 저봐, 삽질이나 하고……그래, 그래, 야, 그래……좀 낫다, 알베르티니, 훨씬 낫네, 그렇지, 그래, 그래, 잘했어, 예술이다, 끝내줘, 아, 최고야, 이제 실력이 나오는구나……골로 만들어, 골로 만들어, 골 - 뒈에에져라!!! 
 
이런 걸 책에서 발췌했냐 싶겠지만, 난 책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가끔 이 글을 큰 소리로 따라 읽어본다. 한 콧수염 난 노인이(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가 떠올랐다.^^) 그 맛깔진 이탈리아어로 저런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큰 소리로 한 번 흉내내 보시기를... ^^ 

# 로마의 단어는 섹스, 나의 단어는?
"모든 도시에는 그 도시를 정의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어가 존재하죠. 어떤 도시건 거리에서 당신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그들 대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그게 무엇이건 간에 그게 바로 그 도시의 단어예요. 만약 내 개인적 단어가 그 도시의 단어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난 그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거죠."
"로마의 단어는 뭔데요?"
"섹스"
......
"바티칸은요?"
"거긴 달라요. 바티칸은 로마가 아니죠. 그곳 사람들은 다른 단어를 가지고 있어요. 권력이죠"
......
"뉴욕의 단어는 뭡니까?"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결정을 내렸다.
"그 단어는 동사예요. 성취하다"
(이 동사는 로스앤젤레스의 단어와는 미묘하면서도 엄청나게 다르다. 역시 동사인 로스앤젤레스의 단어는 '성공하다'이다. 나중에 나는 이 이론을 스웨덴 친구인 소피에게도 들려주었고, 그녀는 스톡홀름의 거리에서 들리는 단어는 '순응하다'라고 말했다. 우리 둘 모두 그 사실에 실망했다.)
......
"당신의 단어는 뭐요?"

건축가 황두진은 도시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미학적인 측면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역으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스스로 알지 못할 정도로 깊이 박혀있는 삶의 아비투스가 그대로 도시의 미학적인 측면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에서는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갈수록 고개를 더 위로 젖혀야 한다. 빽빽한 차들과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것조차 버거워하며 잰걸음을 걷는 사람들 속에 나 또한 바삐 움직이며, 누군가 말을 걸어올라 치면 굉장한 경계심을 갖게 되는 곳이 서울이다. 그래 내가 서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건 사람이건 건물들이건 '삭막함' 그 자체이다. 
그렇담 나의 단어는? 막상 여러 도시의 단어를 떠올릴 때는 재미있었다가 한 순간 멍해지게 만든 저 질문 '당신의 단어는 뭐요?'에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누군가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 하다가) 떠오른 단어는 '머뭇거림'이다. 늘 쉽게 결정을 못내리고 머뭇거리는 성격, 차라리 누군가 나를 리드해 가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나.    
먹거리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조각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깍여진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탐욕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한 저자가 결국 깨달은 삶의 의미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
즐거움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한 개인의 인간성에 닻이 되어준다

이제, 인도로 가보자. (떠나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렇게 훌쩍 훌쩍 떠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곳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에서의 탐욕스런 쾌락을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이어간다. 끝없는 고요함과 '만트라'라고 기억나는 수행자들의 성가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동요하고 깨닫는 일을 반복해 나간다. 생각의 길은 너무나 가슴아팠던 과거에서부터 너무나 달콤했던 순간까지 극과 극을 달리하며 펼쳐지고 그 길을 다시 되걷는 과정에서 어느 새 지금 이 순간의 그녀를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 구루가 내게로 왔다
산스크리트인 요가(Yoga)는 '합일'이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원래 어근인 유즈(yuj)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멍에를 씌우다'라는 뜻으로 무소와 같은 우직함으로 당장 해야 할 일에 스스로를 함몰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가에서 말하는 당장 해야 할 일이란 합일을 도모하는 일이다. 몸과 마음 간에, 한 개인과 그 사람의 신 간에, 우리의 생각과 그 생각의 근원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심지어는 우리 자신과 뻣뻣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이웃들 간에도.
......
요가 철학자들은 인간의 불만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한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그저 두려움과 결함, 분노,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보잘것없는 인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우리의 한정된 작은 자아가 우리 본질의 전부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보다 신성한 특질을 깨닫지 못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영원히 평화로운 최상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 최상의 자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아울러 보편적이고 신성한 자아이다.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언제나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 요가 철학자들은 말한다. 이런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까칠한 발언인 "이 한심한 사람아, 그대는 내면에 신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구나"를 친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번주부터 등록해서 다니기 시작한 헬스장 윗층에는 요가 학원이 있다. 나의 직장 동료인 한 선배의 초등학생 딸도 다이어트를 위해 그 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듯, 요가는 한국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하게 대중화된 일종의(특히, 다이어트를 위한)  체력단련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충 요가는 명상을 위한 수행의 한 방법이었다는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요가의 정신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자기 내면에 있는 신을 찾기 위한 명상의 방법인 것이다. 과연, 그 근본이 빠져버린 우리의 요가 문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에도 요가에 대한 욕구가 가끔 생기는 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 펴지지 않는 나의 신체, 경직된 나의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욕구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세상에, 요가 뒤에 '철학자'가 이리 쉽게 붙는다니...

# 마침내, 명상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다
마음에게 정신이 하는 일을 좀더 너그러운 관점으로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나도 그저 한 인간, 그것도 정상적인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인정할 순 없을까? 여느 때처럼 생각들이 떠올랐고-좋아, 그러라지- 그러자 부수적인 감정도 일어났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적이고, 못마땅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외로움과 분노를 느꼈다.
......
갑자기 가슴속에서 이 모든 실없는 소리들을 잠재워버리며 한 마리의 사자가 포효했다.
......
넌 내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제일 흔하게 갖게 되는 생각들이라서 옮겨 봤다. 난 늘 나 자신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다. 난 그냥 이 세상에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잠깐 찍혔다 사라질 아주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나를 떠올리면 사라지지 않는다. 이 패배감은 도대체 어디서 기원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준 상처들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이 가장 역동적인 나이에 가고 있어야 할 길이 아니라는 무력감 때문에? 어떤 꿈도 없이 그냥 이렇게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잠깐잠깐 들여다 보며 자위하고 있는 열등감 때문에? 떠나면 나도 그 포효를 들을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터져나갈 정도로 벅차오르게 하는 그 포효를?  

#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의 항구가 되지 않을 거야
'난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의 항구가 되지 않을 거야.'

# "신은 네 안에 머문다, 네 모습으로."
 
나의 신은 과연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의 생각을 지배하고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결단케 하고 또는 머뭇거리게 하는 나의 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인도가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그녀가 만난 한 이빨 다 빠진 '점쟁이'의 말을 통해서, 그리고 그와 함께 하면서 깨닫게 되는 그녀의 내면의 소리에 의해서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완전히 내것화하는 '얻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다는 '지적 학습'정도라고 해두자. 이 책을 덮은 지 5개월이 넘어가는 나는 지금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를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 갈리메노 섬에서의 완벽한 열흘간의 휴식
성 안토니는 사막으로 침묵 수행을 떠나 온갖 종류의 환영들에게 공격받은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길 침묵 속에서 때로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를 만나기도 하고, 악마처럼 보이는 천사를 만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럼 천사와 악마를 어떻게 구분하냐는 질문을 받자, 성자는 오로지 그 대상이 떠나고 났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에 따라서만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면, 방금 만난 건 악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그건 천사다. 

좀 사이코 같겠지만, 가끔 화장실에 들어가 상반신 전체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난 갖가지 표정을 짓는다. 가끔 내가 인간의 탈을 쓴 무시무시한 악마라면 어떤 모습일까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 거울의 모습에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런 한편 어떤 의식도 없이 가만히 나를 들여다볼 때 나도 모르게 편안한 웃음이 지어질 때도 있다. '잘 하고 있어 4시 신데렐라!'하며 응원하고 있는 거울속의 나를 발견할 때면 괜히 멋쩍어져서 오래 들여다보지를 못하곤 한다. 
방금 전 소개했던 그 늙은 점쟁이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정의 또한 위의 인용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어디'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임을...  

# 행복은 개인적 노력의 결과
"나는 여섯 가지 명상법과 각기 다른 목적을 위한 많은 만트라들을 알고 있지. ... 예를 들면 위로 갈 수 있는 명상법."
"위로요? 위에 뭐가 있는데요?"……
"위로 일곱 단계를 올라가 천국으로 가는 거야."
......
"천국에 가본 적이 있어요, 끄뜻?"
"물론 가봤지. 천국에 가는 건 쉬워. ... 거긴 모든 게 아름다워. 사람들도 모두 아름답고, 먹는 것도 모두 아름답지. 모든 게 사랑이야. 천국은 사랑이야. 그 반대로 밑으로 내려가는 명상법도 있어." 
"첫 번째 명상법이 천국으로 가는 거라면 이건……" 
"지옥으로 가는 거지." 
......
"지옥은 어떤 곳이에요?" 
"천국과 똑같아. ... 위로 가나 아래로 가나 결국엔 똑같아." 
......
"그럼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뭐죠?" 
"가는 방법이 달라. 천국은 올라갈 때 일곱 개의 행복한 장소를 거쳐. 지옥은 내려갈 때 일곱 개의 슬픈 장소를 지나야 해. 그러니까 올라가는 게 좋은 거야, 리스." 
......
"그러니까 행복한 장소를 거쳐서 위로 올라가는 편이 낫다는 말씀이세요? 목적지인 천국이나 지옥은 어차피 똑같으니까요?" 
"세임 세임야. 결국엔 똑같아. 그러니까 가는 동안 행복한 게 낫지." 
"그러니까 만약 천국이 사랑이라면 지옥도 ……" 
"사랑이지" 
......
"젊은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언제나 어려운 과제지!"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쉽게 생각하는 이 늙은 점쟁이와의 만남,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삼색 여정에서의 마무리로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만남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이탈리아와 인도를 거쳐 마침내 (남편에게서든, 가족에게서든, 일에서든) 바람처럼 자유로운 자아를 느끼고 영혼이 한없이 가벼워질 때 그 누구를 만났어도 그녀는 그 만남에서 이런 깨달음을 스스로 얻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이 여정에서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한 말...     

# 내 몸에 완벽하게 편안한 펠리페 
왜 전에는 사는 게 그다지도 힘들게 느껴졌을까? 

늘 한 고민이 매듭이 지어지면 다시 몰려드는 또다른 고민들 ... 우리의 일상의 삶은 어쩌면 이러한 고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린 쉽게 입버릇처럼 '아휴! 왜 이리 사는 게 힘들지?'라는 말을 하고 또 듣는다. 내가 아는 한 교수님은 하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다 힘들다 하니깐 아예 자신의 별명을 '괜찮아'라고 지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를 때만이라도 힘이 되고자 하신다. 

자신을 끔찍히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이 생을 살아가면서 과연 그녀처럼 나 자신을 오랜동안 그리 대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 질문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읽는 내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저자가 부딪치고 깨달아가면서 삶에 대한 찬사를 쏟아 부을 때 그 감동에 깊이 몰입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밍밍한 감동을 느끼곤 했다. 

# 행복하고, 건강하며, 균형 잡힌 삶 
예전에 내가 읽었던, 불교신자들이 믿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다. 그들은 떡갈나무를 탄생시킨 것은 동시에 두 가지 힘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첫째는 나무의 시발점이 되어준 도토리다. 모든 약속과 잠재력을 담고 있는 이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는 데 다른 힘도 존재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바로 어서 빨리 세상에 존재하고 싶은 마음에 도토리를 도와주는 미래의 나무다. 그 미래의 나무는 도토리에서 빨리 싹이 트도록 밀어주고, 묘목이 위로 쑥쑥 자라도록 끌어주며, 무(無)에서 성숙함으로 진화하도록 이끌어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신자들은 떡갈나무가 탄생한 도토리를 창조한 것은 다름 아닌 떡갈나무 자신이라고 말한다.
 
미래의 나는 지금 어떤 길로 나를 인도하고 있을까? 끄뜻의 표현대로 그 길은 '세임 세임'일 수도 있다. 그래. 연습을 하자. 내가 아름답다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아름답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도 아름다운 길이라고... ^^

#
눈큰이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긴 했어도 좀 저어되었다. 분명 이 책은 그녀가 참고 있는 여행에 대한 욕구를 다시 불살를 것이리라. 역시나 한 밤중에 오랜동안 이 책을 조용히 보던 그녀가 책을 탑~ 하며 덮던 순간 나에게 쓰러지며 한 말은
"자기야~ 나! 떠나고 싶어~ "였다.
다행히 다음날 그녀는 늦잠을 잔 나와 안토니오를 깨우고 아침상을 차려놓고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 ^^

함께 듣는 음악은 Anne Sofie Von Otter와 Elvis Costello가 함께 만든『For The Stars』앨범(2001) 중 7번 곡 "The Other Wo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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