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선우 / 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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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눈큰이가 서점에서 소설책 두권을 사왔다.
"갑자기 왠 책들야?"
"어~ 이 소설책들이 한겨레21하고 시사인에서 모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어 있어서 샀어"
"그래?"
그 두 권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 『나는 춤이다』였다.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주말이었을게다. 우연히 저녁에 누군가 켜 놓은 KBS 방송에서 한 춤꾼에 대해 방영하는 것을 잠시 본 적이 있다. 꽹과리 소리가 울리고 대역으로 나온 춤꾼이 현란하게 춤을 추어대던 모습, 아마도 하얀 고깔을 쓰고 하얀 저고리를 입었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 때, 최승희라는 일제시대, 세계를 놀라게 한 춤꾼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첫 장을 열기 전까지도 내가 알고 있던 최승희는 이 정도 지식으로 머리속 어느 구석퉁이에 쳐박혀 져 있는 이미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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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삼분의 일 정도를 읽었을 때인가? 실제 최승희의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책 초반부부터 모든 삶의 고단함으로 지칠대로 지친 한 예술가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려내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제 식민지 - 해방 - 분단과 전쟁 등 워낙 가팔랐고 그래서 숨 쉬기도 힘들었던 세상에서 춤을 위해 몸부림쳤던, 그리고 이젠 그 세상과의 연도 모두 끊어버린 듯한 한 여인의 지워질 듯한 모습을 왜 독자에게 먼저 보여주었을까?

# 꽃을 먹다
빠르게 중얼거리는 그 말투는 자신의 몸속 어딘가 미세하게 무너지고 있는 담벼락 같은 것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기타로는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내부에서 시작된 균열은 곧 외부의 징후를 숨기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 초반부의 소설 읽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최승희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저 여인 최승희가 도무지 초점에 잡히지 않으면서 자꾸 흐릿흐릿해지는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책을 읽는 도중 인터넷을 검색해 그녀의 실물사진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 삶의 고단함, 그리고 시대가 안겨준 갈등 등을 그녀의 실물 얼굴을 통해 읽게 되면 훨씬 이 소설이 수월하게 읽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본 그녀의 사진들 속에서는 이 소설에서 그려나가는 삶의 균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시대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험난한 풍경들은 그녀의 사진들 속에서 찾을 수 없었다. 도도했고, 너무나 부족함이 없게 느껴지고, 그래서 심지어 거부감마져 일게 만드는 그런 사진들 속에서, 난 소설 전반 내내 힘겹게 읽어가야 했던, '식민지에서 최초로 무용을 시작한' 그녀의 운명 같은 일종의 한에 어린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 꽃을 먹다
"... 이 최승희가 아니어도 어느 날엔가 또 다른 최승희가 나와요. 살아보니까, 알겠는걸요. 그렇다면 나는 그때,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한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최선이 항상 옳았던 것만은 아니니까." 

선입관은 무서울 수 있다. 작가는 이 최승희를 그리기 위해서 최승희와 관련된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속에서 그녀의 삶 하나하나를 재구성하려고 무던히 애썼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노력에 상관없이 내가 저 첫인상과 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그녀의 친일행적에 대한 간단한 정보만으로 이런 끊임없는 내적 시련과 상처를 안고 살아갔을 리가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은 또 얼마나 못된 짓거리일까! 

# 추락과 도약
자신에 대한 도도한 긍정. 오만에 가까울 만큼.

작가가 표현했던 이 한 구절이 어쩌면 내가 그 사진속에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해 주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의 사진을 검색해서 보지 말았어야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힘들더라도 소설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어야 한다. 작가의 감정의 선을 따라 세밀하게 그려진 글을 읽으며 상상 속 그녀의 모습을 그려나갔어야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의 문장들과 내 감정은 계속 엇박자를 냈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이 소설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왜 이 소설작품이 이렇게 인정받아야 하는 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결코 쉽게 쓰여진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문장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너무나도 세밀한 감정의 묘사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꽤 유명한 시인인가보다. 눈큰이 또한 이 소설을 접하기 전에도 이 김선우라는 작가가 시인으로 꽤 알려졌 있었고, 시는 읽지 않았지만 자기도 시인으로서 김선우를 들어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일까? 한 문장 한 문장 결코 예사롭지 않은 묘사에... 언뜻... 신경숙이 떠올랐다. 몇 권 읽지 않았지만 10년도 훨씬 전에 읽었던 『깊은 슬픔』에서 경험했던 지독한 세밀함에 읽는 내내 힘들었던 그 느낌이 이 소설 전반부 내내 이어졌다. 

# 나비의 나라
박하사탕을 깨문 것처럼 목울대 안쪽이 환해지던 어머니의, 미소.

그냥 감탄이 나오는 문장이었다.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이렇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는 꽤나 오랜 시간 글을 썼다 지웠다 했을 것이다. 한 편의 시로서도 손색이 없는 글들이 이렇게 곳곳에 등장하는 것 또한 그녀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 『나는 춤이다』는 최승희의 춤의 인생, 그 불타오름과 사그라짐의 오랜 몸짓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한 조선 기생 '예월'과 그 여인의 아들 '민'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진다.
물론, 그 외에도 최승희와 그 남편 '안'과의 관계, 또는 최승희에게 춤을 가르쳤던 '이시히'와의 관계 역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실 이 부분은 작가가 오랜시간 모았을 최승희에 관한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어 이들과의 관계속에서 그려지는 작가의 글들은 전반의 세밀한 묘사와는 달리 서사적인 묘사가 훨씬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예월'과 '민'은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들이고, 그러기에 작가적 상상력 또한 바로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단연 돋보인다. 최승희가 일본 전열도에 알려지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어가는 사이 이들 모자는 조선 식민지의 질곡의 역사를 그대로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일본군인의 아내가 되고, 일본제국을 위해 군에 가야하는 등), 투박하게 말하자면 조선 민족을 상징하기 위해 설정한 인물들이다. 모질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최승희의 춤은 희망이자, 삶의 힘이 되어 주었고, 최승희 또한 이 '예월'이 진심을 담아 전달한 금낭을 힘겨울 때마다 꺼내 보면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기반한 것 뿐이고, 실제 최승희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보다는 오직 춤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도도하고 오만'해질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조선의 춤을 보여주었던 '예월'또한 어쩌면 민족이니 뭐니를 떠나서 자신을 대신해 진정한 '춤'을 추는 그녀를 지켜주고 응원해주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나는 춤이다
조국? 이 몸, 이 몸이 내 조국이야! 내 춤이 내 조국이라구!
......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그녀의 춤을 무기로 해서 잠시나마 조선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남편 '안'과 선전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북조선'을 향해 그녀의 입을 빌어 표현한 작가는, 얼핏 잠깐 동안의 친일 행적을 가지고 섣불리 쉽게 의심의 눈초리로 최승희라는 인물을 삐딱하게 바라본 내게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기술된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이 여인이 춤을 위해 오랜 시절 짊어져야 했을, 그래서 무거웠을 인생의 짐을 상상속에서라도 한 번 저 봐'라고 말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글을 쓰며, 읽은 지 보름도 지난 이 소설을 다시 되새김질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 책을 덮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여운이 이 글을 쓰면서 생겨나니 이상한 일이다. 내가 찾지 못한 이면이 또 있을것 같기도 하다. 다음의 구절처럼...

# 나는 춤이다
생의 모든 순간은 그것이 희망의 편에 있더라도 절망의 이면 없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걸 여자는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함께 듣는 음악은 Anne Ducros의 『Close Your Eyes』(2003)앨범 중 1번 곡 "You've got a friend"이다.


                                           


ps.
# 추락과 도약
인간의 뼈가 놓이는 자연스러운 방향을 근대무용은 비틀고 왜곡한다. 이사도라는 이 왜곡에 대해 맨발로 저항하며 자유를 선택했지만, 여자는 이 비틀린 왜곡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틀 느꼈다. 신체에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단련하는 것. 이것은 기묘한 도전의식을 충동했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을 거부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미에 중독되는 것처럼 추에도 중독될 수 잇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어 왜곡하는 추를 거쳐 미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위에 적은 글들과는 맥락상 관계가 없지만 춤에 대한 작가의 언급중에 기억이 나는 구절이라서 옮겨보았다. 일전에 송두율교수의 석방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에 우연히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행사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현대무용가라는  한 젊은 분이 나와서 혼자서 꽤 오랜 시간 춤을 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본 현대무용은 그 공연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 때는 그 춤이 도무지 춤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부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동작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몸짓과 동작을 보여주면서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저게 무슨 춤야?' 물론, 그 행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춤이 끝나고 무용가가 무대를 떠났는데도 '설마 저게 끝은 아니겠지?' 하며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사회자가 나와서 박수를 요청해서야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이 책을 읽고 그 때 그 무용가의 춤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쩌겠나? 벌써 몇 해 전 일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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