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프란시스 무어 라페 | 역자 우석영 | 출판사 이후

87년 6월 항쟁이 끝난 후(그것이 승리든, 종국적인 패배든지간에)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논의가 답보 상태인 것만은 확실하다. 바로 '선거'에서의 민주성과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논리로 민주주의 논의를 종결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표현 속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해체되어가는 공동체도 그렇고, 격차가 심해져 가는 경제적 이익획득 양상도 그렇고, 암울해져 가는 이곳 서울의 대기 오염과 무분별한 아파트 재건축 현장을 들여다 봐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갈팡질팡이다. '질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즐겨 쓰기도 하지만 그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저마다 얘기하는 것이 다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민주주의를 정의내려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 책은 이러한 갈망에 대해서 각론속의 실천적인 사례를 재해석해나아가고 그를 전체적인 틀 속에 아우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결국 '앙상한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내가 일전에 읽은 '굿뉴스'나 '세상을 바꾸는 80인의 대안기업가'의 책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 책을 접한 건 바로 전에 쓴 글의 주인공 '허아람 선생'이 강의 중에 거의 포스트 잍을 가득 붙인 이 책을 들어올리면서 꼭 읽어보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 강의가 끝나고 집에 가다 꼭 사서 읽으세요. 만일 서점 문이 닫혀있으면 문을 두드려서라도 읽으세요"라고 열변을 토하면서 추천했다. ^^
바로 당일날은 아니지만 그 다음날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론서적은 아니다. 이론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근원에 있는 생각의 틀이 너무 제한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생각의 틀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일종의 주변의 사례를 통한 영적 각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이미 세상은 판이 다 짜여있다는 자포자기 심정, 그리고 그런 판에서는 결국 인간은 공멸로 향해 갈 수 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각 개인 스스로는 대처하지 않는 집단적 공포상황을 명확히 들여다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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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사람들이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보게 하려는 데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일들 말이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보이긴 하는데 그게 거대한 이 자본주의의 파고를 이겨낼 만큼 충분해 보이지 않기에 자꾸 그 큰 파고를 보고 한숨을 지었던 게 아닐까?


1.  속박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왜,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혐오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가?

물론, 어떤 이들은 단지 우리 인간만이 문제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 당신이 원죄라 부르든 단순한 이기심이라 부르든, 문제는 바로 '우리'다. 또 다른 이들은 누군가를 향해 비난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전 지구적 위기들의 근원적 원인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있다. ... 또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증명된, 전 지구적 시장경제 법칙에 이제는 순응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더 나쁜 고통의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
무력함을 느끼며 우리는 에너지와 창조성을 잃어버렸고, 우리의 마음은 공포와 절망을 향해 있다. 세계건강기구(WHO)는 '좌절감'이야말로 건설적인 삶의 실패로 이끄는 네 번째 주요 원인(15년 후면 원인의 두 번째가 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세계건강기구는 또한 전 세계의 자살율은 지금 (인간에 의한 인간) 살해율을 50퍼센트 정도 앞지르고 있다는 점을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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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도 현황을 분석할 때 대내외 환경을 분석하여 전략을 만드는 SWOT분석이라는 걸 한다. 이 책에서도 출발은 현재 우리가 어떤 인식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절망을 계속해서 구축해 나가는지를 이 표 하나로 잘 보여주고 있다.


# 선거 그리고 시장,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이런 생각의 근본적인 전제는 "결핍"(사랑도, 직업도, 주차 장소도,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딱 한 가지 종류의 인간만 번성할 수 있다. 결국 인간들은 부족한 것을 얻으려고 거대한 쟁탈전 안으로 서로를 밀치는 경쟁적인 물질주의자로 진화해 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 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단지 두 가지 문제, 즉 선거로 구성된 정부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하며 성장하게 되는지 그 이유가 쉽게 드러난다. ... 나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뼈만 남은 2인조의 '앙상한 민주주의 Thin Democracy'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또한 이 '선거로 구성된 정부와 시장경제'라는 담론으로 민주주의를 논의한 결과 지금 현재, 갈증은 더욱 커져 가지만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는 벽에 봉착한 것이다. 학계도, 시민사회 진영도... 정권을 잡은 보수주의자(아니지 이젠 '극우주의자'라고 써야지)들은 틈만 나면 '우리나라에 이젠 민주주의는 다 되었어. 무슨 민주화운동야?'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댓구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바로 위의 '앙상한 민주주의'의 틀 안에 갖혀 버렸기 때문이리라.


# 부의 집중
이곳 미국에서 1979년과 2001년 사이에, 소득 수준 상위 5퍼센트에 속하는 이들의 수입은 81퍼센트 증가한 반면, 하위 20퍼센트 가구의 소득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미국의 평균적인 최고경영자의 보수와 평균 노동자의 봉급 격차는 한 세대 만에 열 배로 늘어났는데, 오늘날 최고경영자들은 일 년 중 첫째 날 점심시간까지, 최저임금 노동자가 일 년 내내 버는 만큼의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 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을 소유한 부자들의 숫자는 폭증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946명에 이르는데, 세계 경제보다 여덟 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이들이 소유한 부를 모두 합하면 중국의 국내 총샌산량보다 거의 40퍼센트나 더 많다고 한다.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옛말처럼 돈은 모은 사람들에게는 하염없이 늘어난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에게는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경쟁상황에서는 어쩔 수없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분배를 이야기하면 시장주의 경제질서,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에  위반된다고 눈을 부라린다.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 들어선것마냥 그 틀 안에서 돈을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쓰고 베푸는 행위는 정신나갔거나, 아니면 자신을 희생한 고결한 행위로 간주받는다. 그게 인간세상이라고. 몇몇 거액기부자들의 뉴스를 접하면 '세상에 저런 별종도 있구나' 희한해 하고, 좀 더 괜찮은 양반은 빈부의 차는 어쩔 수 없으니 내가 많이 벌어서 나도 저들처럼 기부하리라 꿈꾼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 앙상한 민주주의의 함정들
민주주의의 자유는 안전하지 않다.
만일 민간 자본 세력이 민초들의 민주 국가, 그 자체보다
강하게 되는 지점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용인한다면,
그것은 그 본질상, 파시즘이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eland Roosevelt, 1938 -

...... 
홀로코스트는 미친 독재자와 몇몇 새디스트 간수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대해 말해 주는 게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적절한" 조건들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드러내게 될 사악함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것이다... 고상한 사람들도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는 사악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잔악함을 생성시키는 조건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일련의 사회 질서 안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는, 극단적 권력 불균형이다. 이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앙상한 민주주의인 것이다. ...... 앙상한 민주주의의 가치 파괴적인 물질주의와 집중화된 부는 분노와 모욕감을 맛본 소외된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 기여한다.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감정들은 어떤 사람들을, 높은 도덕적 근거를 내세우고 그 추종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약속하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종교집단과 세속적인 집단 양쪽에서)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
앙상한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점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많은 국가들의 최초의 열정이 시들어 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2000년과 2005년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3분의 2는 자신들이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2000년과 2005년 사이에 아프리카 열 개 국가에서 진행된 여론조사는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무너져 없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탄자니아에서는 거의 절반 가까운 이들이 이와 같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 멀리 쳐다볼 필요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끽하며 정권을 몇 번이나 갈아엎고 있다. 그러나 '뉴타운', '내 집값', '가치보다는 경제'라는 구호들에 혹하여 모두 남 몰라라 자신의 표를 던졌다. 끊임없이 살기 어려워졌다는 경제논리에 휘둘려 지금, 우리나라는 ('앙상한 민주주의'라는 말을 알기 이전의) 민주주의의 혜택으로 참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어찌보면 노무현 정권 때 막을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끝없이 커진 빈부격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모욕감'을 맛보았고,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세력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전과 14범에게 도대체 무슨 도덕적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단 말인가? 나름 이 책의 글을 따라 명분을 찾고자 해도 안되니 더 답답하다. 어쨋든, '앙상한 민주주의'(나는 오히려 '허접한 민주주의'라고 쓰고 싶다)의 한계를 우리는 분명 현재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라페가 이야기하고 있는 '살아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2. 새로운 시선들 
'살아있는 민주주의'(삶의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위해 부과되는 어떤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 '살아 있는 민주주의'는 단지 형식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영역에 묻혀 있으며, 그 가치는 (이것이 중요한 지점인데) 정치적 삶만큼이나 경제적인 삶, 문화적인 삶에도 적용된다. ...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하나의 고착된 시스템이 아니라 핵심적인 인간적 가치에 의해 형성된 특정한 속성을 지닌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경험을 통합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투표장에서 그리고 시장에서만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의 영역에서(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끊임없이 갈망되고 재정의되는 진화하는 개념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의 생태학, 그 다섯 가지 특징 
민주주의는 진보이지, 변하지 않는 조건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쉽게 사라질 수는 있지만,
완전한 형태로 성취될 수는 없다.
- 윌리엄 헤스티William Hastie 판사.

따라서 우리는 어떤 정해진 틀(선거, 시장경제 등)에서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 숨 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새로운 민주주의 틀 속에 재정의하면서 지속적으로 진전시켜 나가자는 것이 필자의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리고 실상 들여다 보면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중 열에 아홉은 연방 최저임금을 올리기를 바라로 있고, 열에 여덟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셋 중 둘은 비록 세금이 인상된다 할지라도 모두를 위해 정부가 의료보험을 보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 공정성, 포용, 그리고 상호 책임성.

맞다. 우리들은 서로 동의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즉각적인 행동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기 집값 올릴 생각을 하고 있고, 내가 환경지키미가 된들 세상이 변하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고, 내가 정부를 어떻게 믿고 연금을 내야 하냐구라고 억지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료를 내는 사람들 모두 굳건한 상호 신뢰의 연계망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권력이 되어 행동할 수 있다. 일례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유럽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유해한 폐기물질을 생산하는 가전업체 등은 제조 뿐만 아니라 폐기까지 의무화되어있다.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 벤츠는 한 해 엄청난 액수를 쏟아부으면서 재활 병원을 지원한다. 유럽에서는 유전자 변형식품이 발붙일 시장이 없다. 자! 어떤가.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이 세계 일반이 생각하는 오늘이 아니다. 왜 우리만 서로를 못믿고 이리 치고박고 살아야 하는가!
작가인 라페는 끊임없이 기존의 틀에 갖힌 용어들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재정의를 하고 있다. 그 중 몇가지...

# 권력의 창조
"할 수 있다to be able"를 뜻하는 라틴어 'posse'의 어원을 생각해 보면, 권력power은 간명하게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 배분에 대해 지금보다 적게 말해야 하며, 권력의 창조(우리의 문제 해결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이 말해야 하는 것이다. ... 살아있는 민주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확대한다. 그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권력을 확장한다.
......
# 모든 곳에 존재하는 민주주의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은 우리 자신을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관계들의 네트워크에서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렇다면 기업은 관계 네트워크 조직을 위해 우리가 창조한 채녈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것은 기업들이 우리에게서 독립해 있지 않다는 것, 혹은 변치 않는 모놀리스(Monolith, 하나로 통제된 조직체를 일컫는다.)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생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력에 눈뜨는 것은 물론 기업체들을 모양 짓고 삶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수많은 방식들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일전에 광우병 쇠고기를 졸속 수입하는 협정을 맺어 MB정권이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먹거리에 위협을 느낀 주부들도 들고 일어섰고, 그 과정에서 일부 정부정책을 의도적으로 옹호하고 촛불민심을 비판하던 신문들은 그 신문에 광고를 대는 기업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매운동에 직면했었다. 불매운동은 자신 또는 집단이 지향하는 가치와 맞지 않는 기업에 대해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불매운동을 주도하는 네티즌들을 무슨 간첩 찾듯 경찰이 색출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자! 이젠 느끼는가? 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 줄 핵심이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비난하기만 하는 정치 영역, 정치권력을 변화시킬 때 가능한 일이다. 물론, 라페또한 정치 권력, 즉 선거를 통한 변화를 가장 강조하지만, 단순히 대립적인 투쟁의 양태로 이 지구상에 겹겹이 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귀기울임, 대화, 설득의 지난한 과정 그렇게 해서 진정 기업도 변화의 동반자로서 끌어들이는 방식이 진정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먼저냐라는 논쟁에 휘말리기 전 그러한 변화는 우리의 일상 영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나야 한다. 좀 황당한 전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기회가 된다면 (나쁜 뉴스에 절망한 이들을 위한)『굿뉴스』라는 책을 꼭 일독하시길 부탁한다.  물론 이 책 『살아있는 민주주의』에도 여러가지 사례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이라 충분히 울림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굿뉴스』는 그런 면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의 사례마다 여기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전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다 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자는 끊임없이 늦었다, 되돌릴 수 없다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무한한 희망이 남아있다고. 당신이 결정하면...  


# 풍요의 전제, 희망의 소용돌이
나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결핍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세계 곡물의 3분의 1과 콩류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축을 먹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 ... 이러한 비합리성이 건강에 해롭고 비효율적임에도 세상에 적용되기 시작한 까닭은 하나의 규칙이 지배하는 경제가 식품을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이 경제가 곡물 가격을 너무 싸게 만들어 동물들에게 많은 양을 사료로 공급하는 것이 더 이로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나는 알게 되었다.
......
독일의 에너지 전문가 헤르만 쉬어Hermann Scheer는 태양, 바람, 파도, 물, 그리고 바이오매스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화석연료와 원자력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1만 5천 배 더 많은 "하루 에너지 사용량"을 제공해 준다고 말하고 있다. 스탠포드 나사Stanford-NASA의 어느 연구서는 바람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중 5분의 1만 전기로 전환된다고 해도, 전 세계 에너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풍요에 대한 자각은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경쟁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을 막고, 우리가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선함(인간의 복합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거부할 수 없는 선함(근원적인 곳에서의 긍정적인 욕구와 능력을 포함한)을 재조명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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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말했듯이, 이 책의 대부분의 사례는 책 구성상 매우 짧게 짧게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몇 몇 사례들은 짧은 구절이지만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아홉 가지 특성
1993년 브라질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벨루 오리존치Belo Horizonte는 질 높은 식품에 대한 접근권을 인권으로 재설정했다. 이러한 태도 전환은 어마어마한 파문을 촉발시켰다. 시의 식품안전보호국이 도시 상공인, 시민, 노동조합, 종교단체, 대학,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질 높은 식품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12개의 시민조합을 만들어 낸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소집했던 것이다.
 이들의 이례적인 혁신안에는 도시에 40개의 지역 농부들이 공급하는 공정 가격 상품 판매소 설치, 1만 2천 개의 보조 식품을 날마다 공급하는 야외 레스토랑 설치, 가장 저렴한 가격의 생필품을 소비자에게 알려 주는 시 후원 라디오 방송 개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병원, 식당, 거대 구매자들을 직접 지역의 소규모 유기농 생산자에게 연결시켜 주는 "초록 바구니 프로그램Green Basket program"을 창안해 냈고, 과학과 환경 교육을 위한 "살아있는 실험실"이 된 40개의 학교 정원과 수많은 공동체 정원을 만들어 냈다. ... 시의 혁신 정책들은 아동 사망률(기아 측정의 최고 수단)을 10년만에 56퍼센트까지 감소시켰다.
이 모든 일에 들어간 비용은 시 재정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대로 우리 삶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리고 짧은 안목으로 보자면 지금의 MB정권에서 이런 놀라운 일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무엇보다 현 정부는 경제논리에 입각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보다는 기업이 흥하는 정책, 그것도 일부 대기업이 흥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지 않는가?
허아람 선생은 오바마가 당선되기까지 미국에서 이런 작가와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집단들이 대안적인 행동과 변화를 일구었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감이다. 훗날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아래와 같은 비전을 선포하는 날이 올수 있을까? 있겠지? ^^ 그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다. 독일에 여행을 갔다온 한 동료직원이 그런 말을 했다. 독일에서 정치교육을 하는 한 기관의 담당자를 만났는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에 대해 그가 얘기하기를 "민주시민 없이 민주주의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정말 인상적인 말이었다. 남탓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우리의 사고 틀 안에 갖혀 지금 이런 정부, 이런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니까.

헌법에 있는 "우리 국민은we the people"은 물론, "우리 진짜 국민we real people"을 의미한다. 기업은 미국 헌법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기업이 언급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복지를 말하는 마당에서다. 인류에 봉사하는 대리 기관으로서 기업은 법적으로는 어떠한 본래의 권리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권리는 오직 인간만이 소유하는 것이다.
......
'지역의 살아 있는 경제'는 지역 산업이 경제 권력을 분산시키고, 에너지 폐기물을 줄이며, 공동체 결속을 진작시키고, 지역 시민들이 지역 산업을 지지하는 덕분에 생겨나고 있다. ... 지역인 소유 업소에서 지불된 1달러는 대기업 체인에서 지불된 1달러보다 지역 경제 활동에 세 배 이상 기여할 수 있다. 아는 사람에게 상품을 구매할 때 생기는 공동체적 유대감이나 공급 체인을 단축시키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환경 혜택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저자는 세계 도처에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중 몇가지 큰 변화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의사소통과 지식 혁명
리눅스(Linux, 오픈 소스 실행 시스템)를 창시했으면 오픈 소프트웨어 운동을 시작한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은 소프트웨어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독점 기업을 떠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 세계에서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첫 번째 단계가 이웃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협력적 공동체는 금지 사항이다. 소프트웨어의 독점적 소유권을 지닌 이들이 만든 규칙은, '만일 당신이 당신 이웃과 공유한다면, 당신은 해적이다'였다."
그래서 스톨먼은 그 반대로 상호 도움과 상호 배움을 독려하는 소프트웨어 규칙과 문화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소프트웨어는 지금 "뜨고 있다."
......
# 생태주의 혁명
지역 대 국내, 국내 대 국제, 이러한 틀은 우리를 아무 곳에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국내적 · 국제적으로 규정된, 우리 경제와 정치에 대한 규칙들은 지금 민초들을 지역적으로 분할하고 강탈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는 이러한 규칙들이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을 공동체에서 적절히 변화를 경험할 때만 공정한 것으로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확신하게 될 것이다. 닭도 달걀도 따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만 한다. 

여기서도 결국 해결책은 지역 중심의 풀뿌리 자치이다. 이것만이 대세이다. 강준만 교수가 강조하는 것도 기실은 서울 일극체제가 대기업 중심의 국가 운영체계를 만들고, 재벌 언론 중심의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격파할 희망은 서울, 이 날고 뛴다는 사람들이 부평초처럼 살아가고 있는 서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땅과의 근원적 친밀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사회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체적인 진단과 틀을 짠 이후, 라페는 이제 개개인 입장에서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공동체도 좋고, 집단도 좋지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근원적인 출발점은 바로 개개인의 의식 변화속에서 찾을 수 있을테니까. 물론, 그것은 주변 사람들과 그리고 세계와 자아가 연결되어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의식의 변화는 또한 관계 속에 그 답이 있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권력
사람들은 "권력"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그건 나쁜 거예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건 무력함이죠!
- 마가렛 무어Margaret Moore, 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민간사.

우리가 권력을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한, 권력은 조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권력은 조작, 강제, 그리고 파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아무 힘도 없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한, 권력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하지만 권력은 간단히 말해 '우리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 이러한 렌즈를 통해서 보면 우리 각자는 권력을,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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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네트워크의 두터운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모든 선택이 일정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잇는 것은 세계를 변화시킬지 말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라페가 계속해서 대안적인 희망찾기의 성공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그러한 변화를 책으로, 눈으로 보는 것조차 읽는 이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잘한 행동과 말 또한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라페에 의하면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진 진리이다.

# 우리 뇌 안의 거울
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때도, 행동을 하고 있는 원숭이와 똑같은 부위의 뇌의 신경이 작동했던 것이다.
"원숭이는 본다. 고로 행동한다." ... 우리 인간들은 가까운 관계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관찰할 때 우리 두뇌는 동시에 관찰당하는 누군가가 하고 있는 경험 중 적어도 일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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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자 그대로 시시각각 서로를 경험하고 서로를 창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남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희망의 원천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정신 상태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작용을 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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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가장 비슷해지고 싶은 사람이나 모임, 그룹에 속하는 것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점점 비슷하게 될 터이다. 우리가 누구를 친구나 파트너로 선택할 것이냐, 누구와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은 아마도 아주 중요한 선택들일 것이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대면 접촉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인터넷에서 목격하는 것, 우리가 읽고 상상하는 모든 것은 우리 뇌에서 거울 신경을 반응케 하고 우리를 주조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는 일종의 신뢰와 기대치, 라페는 이것이 모여 문화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젠 절대 불변할 거라 생각하던 문화를 변화시켜 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몫이 된다.

# 권력의 기술
문화는 일정한 기대치의 모음이다.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동료 시민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사람 사이의 일상적 상호작용에서 자동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우리가 쉽게 가정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규칙이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 문화는 신뢰를 건축하는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문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페는 이 민주주의 문화, 즉 신뢰를 구축하는 그 출발점으로 요즘 유행하는 '평화적 커뮤니케이션'의 출발단계인 '잘 듣기'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 듣는 것이 바로 큰 힘이다
매사추세츠 대학 영문학과 피터 엘보Peter Elbow교수 ... 피터는 우리 문화가 창조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 어떤 주장에서도 결점을 찾아내도록 배운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하면 최고로 좋은 생각까지 나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뛰어난 장점을 지닌 창의적 생각은 단지 그것이 일반적인 지혜에 두 동 진다(모순된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이것이 풍요롭게 발언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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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특별한 종류의 적극적인 귀 기울임, 즉 불신不信에 대한 일시적인 지연이다. 우선 문제점부터 알아내려는 습벽習癖을 없애는 일은 창조성을 자유롭게 풀어 준다.

사실 우리 일상에서 이렇게 잘 듣기만 해도 풀리는 갈등 상황은 상당히 많다. 여러 세계관을 인정하는, 아니 인정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상대방의 주장을 귀기울여 주는 그 기본 자세에서부터 신뢰는 싹튼다. 그러나 말이 쉽지 정말 내가 청년실업에 신음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요즘 젊은이들은 도전적이지못하다. 지방 중소기업 아르바이트라도 해야한다."고 하는 뻘소리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을까? 물론, 오랜 연습을 통해서라면 가능하기는 하겠다. ^^; 

# 창조적인 분쟁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좋은 아이들"에 대해서 으스대는 부모들, 혹은 아주 순종적인 학급을 유지시키는 교사들을 칭찬하는 학교장, 혹은 상을 받을 이는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이들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사장들의 정서적 태도에도 우리가 분쟁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드러나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거스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분쟁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창조하는데 열쇠가 된다.

오랜 교육을 통해 우리는 갈등을 일으키는,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한 것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공공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교육을 받았고, 그 원인을 캐어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상상하는 것을 금지당해왔다. 노동조합의 파업, 비정규직의 파업 등에 대해서는 파업 자체가 갈등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공공질서를 흐트러뜨리는 행위로 배척하게끔 교육받았고 그 절박한 사연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 갈등, 또는 분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부정적이 되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라페는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또는 잘못 사용되고 있는 단어를 적극적이고 대안적인 용어로 바꾸는 일을 의식적으로 펼침으로써 그 대안용어를 대중화시켜야 하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이 곧 표현이요 행동이 된다.
책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안 용어를 몇 가지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세계화인가, 세계적 기업 권력인가?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세계화와 그 불만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세계화를 "전 세계 국가와 사람들이 더 가까워지게 되는 통합"이라고 정의한다. ... 퓰리처상을 받은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현단계 세계화가 "세계를 작은 것에서 훨씬 더 작은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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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계화"라는 말은 행동 영역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말이다. 이 단어는 누가 그 행동을 통제하는지 묻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누가 이득을 얻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해서 "세계화"는 권력에 대한 질문을 뛰어넘어 버린다. 세계화를 옹호하는 이들은 점차 커지고 있는 상호 의존성(권력 관계에서의 상호성을 의미하는)에 대한 황홀경에 젖어 있다. 그러나 하나의 규칙이 지배하는 경제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현실은 의존성만 더 키우고 있다. 이것은 곧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다국적기업 이사회에 의해, 기업 관계자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통화기금(IMF)에서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의사 결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정대로 살아가도록 강제되는 것이며, 그러면서 커지게 되는 권력 불균형을 뜻한다. ...... "기업 세계화" 혹은 "세계적 기업 권력", 이 두 용어는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더 잘 포착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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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를 후배에게 보내줬더니 당장 프린트를 해서 의식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한다. 음. 그러고 보니 나의 작은 행동 하나도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확실하군. 안그런가? 00 후배?^^
이젠 라페는 이러한 희망과 우리 본연이 가지고 있는 솔직한 내적 욕망을 가지고 행동에 옮길 것을 주장한다. 용기를 가지고... 용기내지 않는 무력함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았는가!

 # 용기
나는 공정함, 타인과의 의미 있는 결합, 효율성, 그리고 가치에 대한 욕구를 말했다. ... 보통의 노력으로 타인과의 연결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이 사회에 포함되었다(우리의 정체성이란 외재적이니까)고 느낄 차선책을 선택한다. 사회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만족시킬 만한, 혹은 우리에게 어떤 지위를 가져다 줄 직업을 선택하면서 말이다.
권력을 향한 우리의 열망 역시 왜곡된다. 권력은 앞서 지적했듯 우리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우리는 대신 남을 통제하는 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일터나 집에서 자신이 힘없는 존재라고 느낀다면, 아무도 자기 얘기를 들어주지 않고, 보지도 않는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다른 것(아마도 아이 혹은 배우자)을 제압하고자 시도해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만다. 권력에 대한 내적 욕구가 묵살당할 때 나타나는 극단적 반응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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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사용되는 가짜 방법들은 욕구 충족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 나쁜 것으로 만든다. 먹는 것에 중독되면 우리 몸을 망치고, 쇼핑 중독은 생태계를 망치며,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저항과 공포를 양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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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굶주림을 만들지 않는다. 굶주림은 인간들이 만든다!

아까 위에서 나도 불평했지만, 이러한 작고 느린 변화가 과연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세계화 아니 '세계적 기업 권력'이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상황에서 도대체 뭘 변화시킬 수 있겠냐고. 그러나 잊지 말기를 그러한 생각 또한 위에서 표로 보여준 무력함의 소용돌이의 틀 안에 갖혀있는 것이라고 라페는 다시 한 번 지적한다.  

# 건강한 세계는 이미 작동 중이다. 
어떤 이들은 시간 그 자체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해결책을 만들고 민주주의 기술과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로 사람들을 이끌 시간이 없다, 지구는 이미 끝장났다고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런 말을 듣는다. 상명하달식 전략은 효과적이라고. 비록 그  전략이 우리를 지금 같은 혼돈으로 이끌기는 했지만, 진정한 해결책이 의존해야 할 창조성과 참여 네트워크를 짓누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또 여전히 이런 말을 듣는다. 민주주의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고. 우리가 서로를 향해 좋은 관계를 만들지 않고 지구와 좋은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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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전제에서 보면 우리는 끝장난 존재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희소성을 실제로 창조하고 있는 신념체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어두운 관점과 함께 우리는 단순한 도그마에(거대한 "주의ism"에, 신화적인 "자유시장"같은 절대무오류의 법에, 독재자와 아야톨라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의 형식적 덫과 같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직에 우리 운명을 맡길 것을 부추기고 있는) 쉽게 물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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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생존은 그러므로 우리가 단절을 이우러 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내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풍요로움을 긍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 문제는 새롭게, 삶에 더 기여하는 세계관이 지금 (적어도 아마도) 출현하고 있다는 점을 믿는 일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매혹적인 잠언이지만, 아마도 잘못된 말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보자. 인간에 관해서라면,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다른 방식의 삶이 우리 주위에서 실제 형태를 갖추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금융위기는 더 이상 (결핍을 강조하는 식으로 계속 강화된) 성장 중심의 신고전주의 경제학파 이론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를 갖게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젠 많은 사람들이 (기업 권력에 좌우되는) 국가 지도자들의 말에, (월가를 좌지우지 하는) 다국적 대기업 CEO의 말을 진리라고 보지 않는다. 아울러 이 참에 세계 경제 체제를 이제 우리의 갈망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힘을 얻고 있다. 적어도 '오바마' 또한 비전으로 그러한 연설을 줄곧 하지 않았는가? 이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이다.

# 알기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들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그러한 투명성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녹고 있는 빙하, 죽어 가는 펭귄, 쓰러지는 열대림, 우리가 만나 보기도 전에 날마다 멸종되는 종, 인종 학살 전쟁에서 무장한 아이들, 우리가 곡물 3분의 1 이상을 가축에게 먹일 때조차 기아로 죽어 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 이 모든 것이 충분히 인식되고 있고, 우리 중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바로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지금이 바로 강력한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이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운명은 막혀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중에서도 가장 부끄러운 조상이 될 위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사랑할 이들에게,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지는, 질 낮은 세계를 물려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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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자연의 근본법을, 그 법을 무시했을 때의 치명적인 결과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연이라는 테두리를 받아들일 때 이는 혼돈을 야기하기보다는 거대한 위안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어떤 테두리가 필요하다면, 아마도 우리 모두 그러한 테두리의 필요를 느끼리라. 자연은 우리에게 생생히 살아있는, 제멋대로가 아닌 어떤 지침을 주며 우리가 그 자연에 우리를 조화시킬 때(우리 자신 자연의 일부이므로) 우리는 더욱 위대한 조화 상태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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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속'하려 하고, "영향"을 주려 하는 깊디깊은, 타고난 욕구를 신뢰할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공포와 함께 걸을 수 있는 우리 능력을 신뢰할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안의 최고의 것을 발휘하는 한편, 우리 안의 최악의 것에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사회를 구조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세계를 바라보는 오래된 방식을 포기하는 능력을 신뢰할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는 수십억 지구인들의 창조성, 경험, 참여(전염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괜히 마음 상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럴 것이 아니라, 일단 희망을 갈망하고 실제로 작은 실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할 것, 마음가짐부터 '~이 부족해'라기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넘치는 자원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것,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말의 근원을 따져나가 잘못된 말은 나 스스로 바꿔 사용하려고 할 것 등...
내 작은 변화가 과연 작은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거봐! 아직도 넌 무력함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어. 어서 나오라고!)

함께 듣는 음악은 Angelo Branduardi의 『Best of』(1998)앨범 중 7번 곡 "La Demoiselle"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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