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미술관,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문학동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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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가 받아들여야 할 몫을 미루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제시간에 받아들이는 모습은 보기에 좋습니다. 씩씩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이른바 '낮은 수준의 생각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로 중요하게 할 일은 은근히 외면한 채 책상이나 서랍 정리에 집중한다거나 고지서 납부를 꼼꼼하게 챙기는 등 사소하고 단순한 일에 몰입하는 것이지요. 외면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씩씩함은, 건강한 매력의 근원입니다.


#2.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는 그렇지 못한 배우에 비해 평균수명이 사 년쯤 길다고 합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마라토너 이봉주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똑같이 42.195Km를 완주했음에도 우승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는 몸의 회복 속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남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진심으로 자기를 인정 혹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내밀하게 만나는 일을 하다보면, 의외로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나'를 아름답다고 마음 깊이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너'를 긍정하는 일에도 예민할 수 있습니다
.



#3.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몰두할 만한 무언가를 찾거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거나, 자신을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등의 공격적인 '마음 대응'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대응 방법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어려움을 겪고 난 일이 년 후에 몸의 건강이 나빠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심리방어기제를 채택했던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울 때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얘기 중 하나는 '넘어지려고 할 때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는다'는 역설 같은 순리였습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슬픔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야 마지막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4.
어두운 밤길을 가던 도중에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에게 "방금 전에 당신 앞서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빨리 쫓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풍습을 가진 시골 마을이 있다지요.
그런 검박한 풍습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렇게 위로를 받으면서 살고 싶은 우리의 속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린 어차피 진행을 멈출 수 없는 삶의 도상에서 서로를 만나고 있는 중이니까요.



#5.
중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한 사람은 이따금 아무 계획 없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석해 자막없이 그 나라 영화들을 본답니다. 좋은 영화라면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감이 온다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지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해서 낭독회를 가졌던 한국 작가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낭독회마다 몰려든 독일 청중들의 반응이었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낯선 언어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두 시간 가까이 귀 기울여 듣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예술적 영감이나 문화적 토양에 관한 부러움과는 별개로, '진정성'은 무언(無言)의 소통능력이 있어서 저절로 전달되고 만다 ...... 는 수수한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구체적인 지침이나 현란한 수사(修辭)가 없어도 본능적으로 알게되는 진짜배기 두근거림, 인간의 진정성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입니다.



#6.
집에서 작업하며 아이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한 만화가는, 부모들이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아이들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지켜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식에게 좋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돌이 자라는 것을 지켜볼 때처럼 견딜 수 있어야 진짜 내공있는 부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7.
산술적으로, '의식 상실시의 몸무게=평소 몸무게 - 의식의 질량'이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사람을 들쳐 업으면 평소 그 사람의 무게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생기(生氣)가 있어야 비상하는 에너지가 생겨나서 인간의 몸에 '부력(浮力)으로 작용하는데 생명력을 잃은 사람은 그 같은 부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무거워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두둥실, 구름과자 같은 부력의 핵(核)은 자발성입니다.

고강도 노동자의 한 전형이랄 수 있는 농부가 새벽잠을 털어내면서 '조금 더 자고 싶다 ......'고 이불 속 투정을 하며 등 떠밀린 하루를 시작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생소합니다. 하지만 '십분만 더 .......'를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눈도 뜨지 못한 채 팔을 뻗어 자명종 시계를 눌러버리는 도시인들의 피로와 고단함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일상화된 우리의 아침 풍경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매번 몸이 무겁다면 부력을 감소시키는, 생명력이 결여된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 직장 동료가 읽으라고 보내 준 책이다. 책 속의 그림들과 글들 속에서 뭉게 구름 위에 올라선 느낌을 받다가 다시 병실 창가에 비치는 삭막한 콘크리트 병동을 보면서 한숨을 짓게 했던 기억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입장에 따라 사물과 내외면의 풍경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데 사뭇 신기해했던 책이다. 가령 작가는 최종적으로 넘어지지 않는 연습을 자전거 핸들링에 비교하고 있지만, 또 어느 대사상가는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단지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라고 표현했다. 어찌 보면 둘은 결국 똑같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시각에 있어서는 '최종적으로 넘어지지 않는 것'과 '(최종적인지 알 수 없으나) 넘어져서 다시 일어서는 것' 사이의 큰 인생관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나의 글 또한 궤변이 되고 마는 이 마음 수련의 과정을 어떻게 글로 선명하게 올릴 수 있을까?


서평은 #7의 마지막 문장을 따왔다. 나에게 가장 고민할 여지를 남겨주는 글이기에 ...

아침에 일어날 때 매번 몸이 무겁다면 부력을 감소시키는, 생명력이 결여된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별점 : 4점  

함께 듣는 음악은 Deep Purple의 "Bananas"(2003)앨범 중 3번 곡 "Haunte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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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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