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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지음, 지성사(2008)

#1.
최근 우리 사회의 '우향우' 분위기 속에 진보의 핵심 가치인 민주, 인권, 평등, 사회적 연대, 약자 배려, 관용, 평화 등이 장식용 군더더기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이 책을 통해 이 가치들을 의도적으로 강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
'잃어버린 10년'을 비판하며 '선진화'를 내세운 보수진영이 집권했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상당 기간 성장, 속도, 효율 등의 가치가 일방적으로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가 '진보의 과잉'이 아니라 '진보의 과소'로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를 격하하거나 무시하는 선진화는 사상누각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서울대 법대 조국교수가 그 동안 신문 등의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서 책을 낸 것 같다. 위에 적혀 있는 의도를 가지고 '진정한 학자'답지 않게 다양한 분야의 한국사회 병폐들을 정말 열정적으로 지적하고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글들로 구성했다.
내가 진짜 학자라고 여기는 자들은 한 우물만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이었다.(이런 학자들을 난 진심으로 한국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교수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촉수를 드리우는 것은 썩 달갑지 않다. 그 이유는 그동안 한국의 진보적 학자라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곳 저곳 들쑤시는 진보계의 만물장수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에 갖는 부정적 시각일 수 있다. 속칭 진보학자랍시고 교수 간판을 내걸고 전혀 발전없는 그래서 현실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글들을 신문지상에 마구 쏟아내는 학자아닌 학자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국 교수의 이런 글들이 썩 꼴사납게 보이지는 않는다. 글들마다 한국 사회의 가슴아픈 문제들을 진정어린 심정으로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싶은 열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열정때문에 책을 접지 못하고 끝까지 읽었다.

#2.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살았던 재치 있는 미국 저널리스트 암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는 자신이 편찬한 [악마의 사전](1911년)에서 ... 정치는 "우리네 범죄집단 중에서 보다 저급한 족속들이 즐기는 생계 수단" 또는 "사리私利를 위해 공리公利를 운영하는 것"이고, 정치인은 "조직사회라는 건물을 세울 토대가 되는 진흙 밭 속에 사는 뱀장어"이며, 국회의원은 "자신의 이익과 상충되지 않는 한도에서 자기 선거구 주민의 이익을 지키는 신사"이다.  


일전에 요네하라 마리라는 일본의 관록있는 러시아 통역관이 쓴 [마녀의 한다스]에서 이 암브로스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을 접한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거기서는 '악마와 마녀에 관한 사전'이라고 해석되어 있었다. 어쨋든 같은 책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사전이라서 하나 장만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스크랩 해놨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하여간 이 암브로스 비어스라는 사람 참 유쾌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 검은 가죽 표지에 금박으로 [악마와 마녀에 관한 사전]이라 새겨져 있었다. 몇 장 넘겨봤더니, 다음과 같았다.
사랑 : 상대로부터 공짜로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가 대가 이상의 것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하여, 덕 봤다고 생각하게 하는 주문의 일종.
단, 주문을 외는 당사자 쪽에서 착각하여 자기 쪽에서 손해봤다고 여길 때가 많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등 일부러 토를 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본래는 대가가 있는 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희망 : 절망을 맛보기 위한 필수품
배려 : 약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강자에게만 보이는 친절의 표시
겸손 : 자만하고 싶은 것을 남이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   
                                                          - 요네하라 마리 <마녀의 한다스> 중에서 -

 

3
정부와 기업은 존 갤브레이스 J. K. Gallbraith가 자신의 유작 [경제의 진실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2004년)에 남긴 다음과 같은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수익성 있는 경제적 활동을 할 자유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유가 수입이나 부를 합법적, 불법적으로 빼돌리기 위한 은폐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삼성의 특검수사 결과를 보면서 1%의 특권층에서 배재되어져 있는 우리네 삶의 미래가 참 깜깜하게 느껴졌다.

#4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난쏘공'에서 재인용)


고등학교 때 '어느 돌맹이의 작은 외침'이라는 책과 바로 이 난쏘공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충격을 받았었다. 경제는 발전되었고 삶은 더 윤택해졌다고 하지만 조세희 작가가 쓸 당시보다 우리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문제는 총체적 경제발전이 아니라 불평등의 심화에 있다. 요즘 한국사회에 등장하는 세계화,미국 쇠고기 수입문제, 의료보험 민영화, 학원 자율화 등에서 나타나는 핵심문제는 바로 이 불평등에 있다고 생각한다.

#5
우리가 인권을 말할 때는 다음과 같은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명심해야 한다. "여러분 자신이 다수의 편에 서 있음을 발견할 때는 언제나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할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가 다수의 편에서 서 있을 때를 발견하곤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소수가 소수로서의 권리를 누릴 때 이루어지겠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는 독재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 등 나름대로 목소리를 드문드문 내고 있지만 정치제도의 민주화의 속도를 고려했을 때는 거의 정체되어 있는거나 다름없다고 본다. 
                          

#6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분노가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본능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로서의 사형은 오판 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만든다는 점, 사형을 통한 범죄억제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 우리 현대사에서 경험했듯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복수로 사용되기 쉽다는 점 등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본능'의 직접적 표출은 순치(馴致)되어야 한다.
  .......
극악한 범죄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자라도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고 있는 인간 존재인 한 그에 대해서도 피해자와 그 가족 또는 사회의 보복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유사 범죄의 일반적 예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형벌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형벌로서의 사형은 자유형과는 달리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개과천선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유조차 남겨 주지 않는 형벌제도로서 개인을 전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단순한 수단 내지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사형수의 인간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다. 사형제도는 나아가 양심에 반해 법 규정에 의해 사형을 언도해야 하는 법관은 물론 양심에 반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사형집행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제도이기도 하다.  - 96년 헌법재판소 결정 당시 소수의견을 낸 김진우 재판관 의견-
......
마지막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다음과 같은 금언을 덧붙인다.
"눈에는 눈 방식의 대응은 결국 온 세상을 눈멀게 만드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아무리 조국교수가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이 책에서 그의 글이 빛나는 부분은 역시 그가 학자로서의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법 분야였다. 오히려 상식적인 선에서의 여성,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등에 대한 글을 싣는 것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이러한 법의 영역에서의 진보를 테마로 해서 책으로 내놓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사형수의 '개과천선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유'를 언급한 김진우 재판관의 인용글은 정말 곱씹어 볼 만하다.

#7
우리 법조계는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너희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루가복음 11:52)라는 오래된 경고를 항상 명심해야 한다. ... 조나단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법률가 집단은 "받은 보수에 따라 흰 것을 검게, 검은 것을 희게 만들 목적으로 잡다한 말을 늘어놓고, 그 말로 자기주장을 입증하는 기술"을 가진 집단이며, "나머지 백성은 모두 이 집단의 노예이다."라고 비꼬았고, 이들은 "자기 업무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족속이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가장 비열하게 굴며, 모든 지식과 학문에 대한 철저한 원수들이고, 모든 문제들의 토론에서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타락시키려 들기만 한다."라고 야유했다.


일전에 송두율 교수의 재판이 벌어지는 재판장에 가서 재판이라는 것을 처음 지켜보면서 검사들의 아둔한 발언들을 들으며 정말 기가 찼던 적이 있었다. 학문에 대한 철저한 무식함과 독선을 지켜보면서 무식한 저들을 만나면 정말 뼈도 못추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들이 심판한다니... 오 맙소사! '모든 지식과 학문에 대한 철저한 원수들'이라는 표현이 정말 실감난다.

#8
시민의 재판참여는 재판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법관과 검사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고, '전관예우' 등의 관행이 봉쇄되어 재판 결과에 대한 시민적 신뢰가 높아져 재판의 정당성을 고양시킨다. 특정한 교육과 계층적 배경을 가진 직업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지 않고 일반 시민의 법의식과 법감정이 판결에 반영되면 참여시민은 재판 과정의 주체가 되어 주권의식이 높아지며, 준법의식도 고양된다. 그리고 배심 재판에 참여하는 법률가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해 재판을 진행해야 하므로, 배심재판은 현재 법조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권위주의 문화를 불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배심재판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파급효과들, 그리고 위와 같은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지만 정말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상식을 가지고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배심재판제도는 우리나라 법조계 현실에 있어서 꼭 도입되고 활성화되어야 할 제도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9
"그 시기에(혹은 그 이후까지도) 존재했던 모든 저항의 실천들이 그 자각을 공유했다거나, 여러 형태의 대항폭력들이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거나 정당방위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말이다. 저항과 방어와 최후의 의사표시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을 폭력을 제한하지 않고 국가권력에 대한 직접적 타격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폭력을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도구로 옹호하던 특정시기 운동의 맥락이나 관성적 폭력의 행사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유보되어 왔을 뿐이다."
-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2002년)에서 재인용 -


난 운동이라는 걸 제대로 해보지는 못했다. 단지 대학시절 많은 집회에 참여를 했었다. 의무적으로 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거리를 달릴 때 난 조직에 대한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거리를 해방구로 잠시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짜릿한 해방감과 함께 심한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정권의 폭력진압에 의해서였든 아니든 생리적으로 폭력은 내게 맞지 않았다. 그 때 보수언론을 제외하고는(^^;) 내부에서 아무도 대항폭력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 또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이러한 대항폭력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복학 후 다시 집회에 참여하면서 의도적으로 폭력이 맞붙을 수밖에 없는 동선을 택하는 조직지도부에 대해서 분개하고는 더이상 관련 집회에 나가지 않았다. 80년대 대항폭력을 기치로 내건 투쟁방식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90년대 학생운동의 몰락은 이런 측면에서도 일부분 예견된 일이었다.
 
내게 조국 교수의 첫인상은 '잘생겼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한겨레신문에서 접했던 그의 사진과 칼럼은 그의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지위와 말끔하게 생긴 외모때문인지 더욱 세련되면서도 명쾌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그가 93년 사노맹 사건으로 잠시 옥살이를 했었다는 것은 이 책 말미의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력소개에서 처음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젊고 잘생긴 인상만큼이나 아직도 열정에 가득찬 청춘을 마음속 가득히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열정어린 글들이라 내가 도중에 책 읽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물론, 난 책을 한 번 읽으면 재미있든, 재미없든 끝까지 읽는 버릇이 있지만서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조국교수가 신문 칼럼에는 다양한 방면의 글을 쓰는 건 좋지만 이런 종류의 모음집은 더이상 내지 않기를 바란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층인 법조계에 그의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겨누고 기득권층의 은폐물로서의 법이 아닌, 진정 만인에게 평등한 법질서가 확립될 수 있도록 더욱 매진할 수 있는, 그리고 (나에게는 확실히 그러한데) 그 만큼 일반인들에게 멀게, 두렵게, 때로는 정말 역겹게 느껴져 서글퍼지는 한국에서의 '그들만의 법'을 낱낱이 까발리고 상식적인, 따뜻한, 친근한 법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의 열정이 단지 한국이라는 일국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좀 더 보편적인 가치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그의 열정이 한국사회라는 내부에 갇혀있는 것 또한 아쉬운 부분이었다.

별점 : 2.5점

함께 듣는 음악은 "Caetano Veloso-Maria Bethania-Gilberto Gil"앨범(1994) 중 Maria Bethania가 부른 7번 곡 'Tres Apito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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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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