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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지음, 한겨레출판(2007)

기억상실, 지하철에서 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헤맴,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필름이 끊겨버리고 다시 지하철... repeat! repeat!

거의 이 반복되는 이야기에 질려버릴 즘... 꿈에서 깨어난 주인공 '김하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도미,
'.com' 회사의 부도로 실직자가 됨,
'미국에서 아이를 갖게 됨. 이름은 민규'
'부인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 한 줄 알았으나 무슨 연유인지 퇴폐안마시술소에서 일함'
'돈을 벌기 위해 목수일을 시작'
'부인의 일로 절망하며 헌집을 고치다 분노에 찬 도끼질로 집이 무너져내리고 가까스로 비밀 통로속으로 들어가 지하철보다 더 지하에 있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알약을 먹으며 기생(?)'
'민규와 아내 미라를 만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언더그라운드에서 나오는데... '

덜커덩, 덜커덩, 야간 지하철을 타고 정거장에서 출발할 때 힐끗 힐끗 보이는 간판들처럼 소설은 기억의 편린들만을 남겨 놓은 채 맥없이(!) 끝을 맺는다. 생전 처음보는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을 겸비한 소설. 하지만 기능은 이미 작가의 의도대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한 번 보면 되돌려보기도 짜맞추기도 불가능해진다. 사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럴 기운도 없어진다. ^^;

특이한 형식으로 읽어갈수록 흥미를 유발시키는 건 사실이지만, 방금 작가의 한겨레 문학상 수상의 변까지 담은 에필로그를 읽으면서까지도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조금만 뒤쳐지면 언더그라운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얘기였던가? 아니면 당신의 삶 자체가 언더그라운드라는 얘길 하는 거였나? ... 다 아니고... 이 소설은 이 대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나를 위한 소설이었다고 얘기해주고 싶은 거였을까?

네이버 검색창에 '웰컴투더언더그라운드'라는 글을 치면 작가 서진의 블로그를 쉽게 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orientshine
그의 글을 더 이해할 수 있으려나? 난 잘 모르겠다.

#1.
당신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잠시, 라고 생각할 때 시간은 멈춰주지 않는다. 그 잠시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뀔 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일 뿐이다. 변화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인생은 오르막길이다. 막연한 미래를 기대하며 잠시 다른 일을 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당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당신은 잠깐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런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당신에겐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버스는 떠났다. 기차도 택시도 오토바이도 모두 떠났다. 인생에 시간표 따위는 없다. 인생은 오르막길이다. 멈추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병원에서 이 책을 읽으려고 조금은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약 기운때문이었을까? 자꾸 작가가 설정해놓은 'rewind' 'fast forward' 등의 무작위 버튼에 정신이 혼미해져 읽다가 까무라치곤 했었다. 그리고는 최근에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엄청난 속도감에 압도당해 병상에서 다리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던 내게 버겁게 다가왔었나 보다.

#2.
나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고? 혹시 당신의 일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승용차를 탄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나간다. 고등학교가 대학교로 변하고, 팀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하고, 애인이 바뀌고 결혼을 한다. 매일 매일 비슷한 과정으로 약간씩 새로운 일이 생기며 반복된다. 하지만 모든 것의 끝은 있게 마련이다. ... 나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끝을 알리는 신호는 오게 마련이다. 난데없이 신호가 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그건 우연일 뿐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길 바란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길 바란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 비탈길 없이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하는 나. 무서운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내 나름대로 존경해 마지 않는 후배에게서 "오빠는 참 평탄하게 사는 거 같아요.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은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당혹감이 밀려왔다. 나에게도 추락할 비탈길은 언젠가 있을텐데... 순식간에 급락할까봐서 고민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내 가족, 건강,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물려줄 이 지구의 운명 등등...  


#3.
당신은 굶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아이는 굶게 할 수 없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당신도 굶어가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빵 정도는 수십 개라도 훔칠 수 있다. 장발장은 누이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지만 당신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빵을 훔친다. 그러므로 당당할 것. 주위의 어떠한 시선에도 신경 쓰지 말 것. 당신의 아이를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나? 여기에는 세상의 모든 이성적 판단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당신의 DNA 속에 당신의 아이를 보호하라는 유전자가 수천만 년 동안 축적되어왔다. 해석 불능. 재판 판례를 불에 태울 것.


제발~ 당신이 민규를 진정으로 만났기를 바래요. 왜 그렇게 그리워하던 민규를 만난 순간 관속으로 들어갔을까? 아... 이런 소설 장치가 참 낯설고 불편하다.


#4.
어차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가까이 있어도 잡지 못하는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아버렸을 때에는 보통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때가 많다. 잠시라고 생각했을 때가 위험하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저금하지 마라. 보험에 들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


눈큰이가 빨래를 같이 널자고 한다. 사소한 행복이란 사전에는 이런 장면도 들어가야 한다. 현재를 살아야겠다. 소설이구 뭐구 간에 말이다. ^^

어떻게든 이 소설을 소개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소설가 정이현은 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때론 삶이 악몽보다 잔인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는 작품.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구성, 탄탄하고 날렵한 문장을 가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은 슬프고 낯선 환상의 늪에 서서히 빠져들 것이다"

그나마 소설 평들 중에 내가 느낀 감정의 편린 들 중 일부 공감가는 평을 썼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슬프고, 답답하고, 무기력한 그래서 허우적 거릴 수 밖에 없는' 내 삶을, 우리네 삶을 자본주의의 메카 뉴욕에서 들여다본다고 해야 할까?

한줄평 : 마음 다잡고 읽어라. 순식간에 당신의 삶이라고 저장했던 기억도 의심할테니.

별점 : 3.5점


이 소설의 배경이 뉴욕이니, 뉴욕 라이브 실황앨범을 준비했다.
함께 듣는 음악은 WestWorld의 "Live ...  In the Flesh"(2001)앨범의 4번 곡 "Black Shadow Symphon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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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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