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언 매큐언 | 역자 박경희 | 출판사  MEDIA2.0 (2008)

2008년 다리를 다쳐 병가로 집에 있는 동안 시작한 블로그, 그 첫 해 마지막 책 리뷰를 이 책 『암스테르담』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처음 책 표지를 접했을 때는 표지의 여성 사진과 빨간 책제목이 마치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암시하게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 굳이 이 책의 장르를 말하자면 나는 '스릴러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한 여인의 장례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여인은 연인이 넷이나 있다. 그들 사내들, 그 중 영국의 대규모 밀레니엄 행사의 교향곡 작곡을 맡은 유명 작곡가 클라이브와 한 일간지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버넌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를 이룬다. 이 둘은 죽은 여인 몰리의 연인이면서 젊은 시절부터 함께 한 절친한 친구사이이기도 하다. 그 둘이 끔찍히도 혐오하는 인물들이 있으니, 몰리의 나머지 두 연인, 출판사의 사장을 맡고 있는 조지와 보수주의적 주장과 정책으로 세를 과시하고 있는 외무장관 가드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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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 얘기좀 해볼까. 젊음의 활력에 운까지 따라준 행운의 세대, 그 자체. 이들은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랐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였다. 신설 대학, 화사한 페이퍼백들, 로큰롤의 전성기, 적당한 이상 추구.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가 부서지고 정부가 느닷없이 젖을 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구색을 갖추느라 취미와 가치관,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68세대로 여러 진보적 가치를 지지했고 지금도 몰리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을 자양분 삼아서 그런대로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나머지 두 인물도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권력을 얻어가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도덕적 신념과 가치는 점점 현실과 타협해 들어가면서 묽어지기 시작한다. 작가는 바로 이 도덕적 위선행위를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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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직위가 그에게서 낯선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자질을 서서히 좀먹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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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성공을 쌓아가며 클라이브는 더 높은 성취를 향해 삶의 범위를 좁혀왔다.

세월과 삶의 범위의 상관관계는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들의 드넓었던 이상과 신념에 벽을 쌓고 좁은 우물을 우리 둘레에 쌓아간다. 그리고 그게 곧 세상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무한대로 뻗쳐 있던 꿈과 신념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박물관의 한 코너를 장식한다. 서로 그 과거를 묻는 것을 꺼리면서, 단지 그 뜨거웠던 때를 '함께'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정이라 포장하면서 그럭저럭 산다. 그러나 작가 이언 매큐언은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들과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는다. '너네들 우정이라는 게 뭔데?', '그리고 너네들이 지키고자 하는 현재라는 게 뭔데?'라고 끈질기게 질문을 해대고 등장인물들을 난처하게 몰아친다.

어느날 버넌은 몰리가 죽기 전 마지막 함께 살았던 조지를 통해, 몰리가 찍은 외무장관 가드너의 외설스런('여성 원피스를 입고 있는') 사진 석장을 전달받는다. 버넌은 이 잘나가는(곧 영국 총리가 될 예정인) 보수주의자, 반인권주의자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사진이라 생각하고 세상에 공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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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넌은 빛을, 주어진 권한과 공공의 복리가 하나 되어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단호한 손길로 나라라는 기관에서 종양을 잘라낼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머니의 사임 후 그가 논설에서 쓰고자 하는 이미지였다. 위선은 까발려지고 나라는 유럽의 일원으로 남을 것이며 사형과 징병 제도는 한낱 정신병자의 꿈이 될 것이다. 사회복지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유지될 것이며 지구 환경은 이상적인 해결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공개여부를 두고 클라이브와 논쟁이 벌어진다. 클라이브는 젊었을 적 버넌을 떠올리며 성해방론자에 가까웠던 그가 단지 여장복장을 한 가드너의 사진을 가지고, 그러니깐 개인적인 취향을 가지고 가드너에게 정치적 종말을 가져오게 하려는 그의 방법을 맹렬히 비난한다. 물론, 버넌에게도 문제가 간단치가 않다. 신문은 계속 구독율이 떨어지고 잘못하다가는 시장에서 퇴출을 당할 위기까지 놓여있었고 어떻해서든 신문사를 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무도 그에게 있었다. 물론, 그가 총리가 된다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절친한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인 클라이브는 도무지 기한이 임박한 밀레니엄 교향곡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결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등산을 떠난다. 등산을 하면서 새로운 음들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서는 버넌과 벌인 설전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 그였으면 그는 그런 이중적인 '쓰레기'와는 다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나이가 들고 또 한편에서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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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는 맞은편 빈자리를 응시하며 머리에 쥐가 나도록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손익분기점을 따지다가 자책감에 빠졌고, 자기도 모르게 불행의 프리즘을 통해 과거를 굴절시키고 물들이고 있었다.

산행을 하던 중 그는 그런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드디어 숲 속 혼자만의 공간에서 울리는 새 소리와 자연의 소리 속에서 음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악상이 떠오르는 그 순간, 한 등산객 여인이 한 남자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바위뒤에서 웅크린 채로 그 상황을 외면하고 어렵게 떠오른 영감을 계속해서 오선지에 그려나간다. 

버넌도, 클라이브도 결국 독자들에게는 도덕적 이중성을 여실없이 보여주게 된 것이다.  가머니의 사진이 만천하에 공개되기 하루 전 버넌은 클라이브에게 화해의 전화를 하고, 클라이브는 그럴 수도 있다면서 흔쾌히 화해의 손짓을 받아들이며 산행에 있었던 일을 '다시 절친한 친구로 돌아온' 버넌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편집회의가 개최되고 모두들 가머니의 소식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때 기타 사회면 담당 부장이 전날 있었던 사건사고면에 대해 간략간략하게 보고한다.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보고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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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크 디스트릭트의 강간범이 일주일 사이 두 번째 범행을 저질렀는데 어젯밤에 한 남자가 체포되었음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선의 꼬리를 잡히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다. 그로부터 예상치 못한 반전과 반전이 펼쳐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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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하나도 죽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서 소설의 중심 역할을 한다. 버넌과 클라이브를 제외한 인물들이 바로 이 반전의 반전에 주된 역할을 제공하며, 중반 이후로는 이들 두 주인공이 끈 떨어진 연처럼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데 작가는 그들에 대해 어떤 일말의 구제 장치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 참혹하다. 언뜻 보면 이들 두 인물의 도덕적 이중성에 대해 권선징악적 결말을 이야기하는 듯한데도 그 끝은 오히려 '세상은 더 교활한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 더 비관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옮긴이가 후기에 쓰기를 이언 메큐언은 이 소설을 한 편의 연극 극본을 만들 요량으로 썼다고 한다. 엄청 많은 분량의 글을 썼고, 거기서 군더더기를 가감히 없앴다고 한다. 과연 이 소설은 극중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거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다. 서사와 심리적 묘사가 아주 적절하게 어우러진 아주 말끔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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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어느 일간지 편집장이고 MB가 하는 정치적 주장과 정책들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가 어느 사적 자리에서 발가벗고 브레지어와 성기가 노출된 드레스를 입고 얼굴엔 화장을 하고 요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면... 그가 남성이지만 다분히 여성적 취향을 더 선호하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행보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더불어 쇠약해진 신문사를 일거에 잘나가는 신문사로 만들 일거양득의 기회가 생겼다면 어찌했을까?
오랜시간동안 헤매면서 찾았던 예술적 영감이 폭포처럼 쏟아질 때 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된다면? 그 염감이 그 자신의 명성을 좌지우지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면?
물론, 이러한 고민은 책을 천천히 더듬어가면서 나 스스로 책의 내용에 억지로 감정이입하려 한 결과 드러난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실 조금만 차원을 낮추면 나의 일상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 엄동설한 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갑을 뒤지는 일은 내게는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아파트 어디선가 남편에 의해서인지 여자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은 울어재끼는데도 난 엄청난 갈등을 겪다가도(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다) 쉽게 경찰서에 신고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괜한 일로 그냥 서로 벽인채 평온하게 지내왔는데 긁어 부스럼 만들기 원치 않는 나의 이기적 심리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망나니를 대하는 게 두렵다. (물론, 클라이브처럼 절체절명의 영감을 가로막는 위기상황도 아니었다.) 
괜한 생각의 끈을 펼쳤는가? 나 스스로 마음이 많이 불편해진다.
작가 이언 메큐언은 우리 사는 세상을 음울하게 그려낸다. 그에게 인간이 하는 일들이란 음울한 종말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치닫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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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서부의 한 모퉁이에서 하루하루 작업에 열중해 있는 동안 클라이브는 문명이 디자인, 요리, 잘 숙성된 와인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종합이란 사실을 쉽게 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이 풍경이야말로 문명의 실체인 듯했다. 케이블 TV 안테나와 위성안테나를 지탱하는 것이 존재 목적인 초라한 현대식 가구 단지, 텔리비전 광고에 나오는 허섭스레기를 생산하는 공장들과 거기서 나온 물건을 유통시킬 목적으로 무료한 주차장에 줄서있는 화물 트럭들. 어느 곳에나 거리와 교통지옥이 있었다. 그것은 떠들썩한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아침같았다. 이렇게 되기를 원한 사람도, 그래도 되겠냐고 질문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 계획한 사람도 원한 사람도 없건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 안에 살아야 했다. ...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들의 번영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사는 실수를 넘어 그 시작부터가 오류였다. 

이 모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한 부분이 있으니, 그나마 이 작가가 '실패한 작곡가' 클라이브의 입을 빌어 옮긴 다음과 같은 음악에 대한, 아니 어쩌면 진정한 인간 소통의 복원에 대한  메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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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광신자들의 편협한 시야로 보면 성공과 대중의 인정은 정도의 차이를 막론하고 미학적 차원에서의 타협이며 실패의 확증이다. 하지만 서구에서 20세기 음악사를 결산하는 음악사를 쓴다면 승자는 블루스, 재즈, 록 음악과 지속적으로 발전해가는 포크 음악이 될 것이다. 이 장르들은 리듬과 가락, 화성이 혁신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는 사실을 광범위하게 입증했다. 클래식 음악 중에는 20세기 전반 50년만이, 그것도 특정한 작곡가들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인간은 음악적 자질을 타고난 '호모 무지쿠스 Homo Musicus'다. 그러므로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의 정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를 수반하는 일이며 인간성과 꾸밈없는 소통의 세계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드디어 2008년의 마지막 날이다. 나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그래도 한해의 마지막 날인데'하는 좀 낙관적이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억지스럽게 '섬뜩한' 소설 속에서 희망에 대한 메세지를 마지막에 덧붙인다. 
어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읽지 않더라도 반전의 반전이 연거푸 벌어지는 장치설정만으로도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나 또한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선전문구만 보지 않았더라도 이리 심각하게 이 소설을 대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한편으로 연극을 볼 때처럼, 그 연극이 관객인 나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따져보는 것도 이 책에서의 숨겨진 묘미를 발견하는 재미를 줄 것이다.

함께 듣는 음악은 Jessie의 『Love is never far away』(2003) 앨범 중 1번 곡 "Part of me"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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