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글 / 길 (2007)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무엇엔가 투영하고 난 이후 다시 그 투영물을 통해 자신을 보는 과정을 거친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행위조차도 나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결국 그것이 그림이 되었든, 어떤 조각물이 되었든, 음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지간에 말이다. 
이렇게 인간 다수의 영혼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자신들을 투영하여 만들어진 직조물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익히 알고들 있겠지만 이미 그 투영물은 자체의 작동방식을 따르면서, 심지어는 인간과 대치하고, 인간을 옥죄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은 바로 이런 주관영혼과 그 투영물이라 할 수 있는 객관문화가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괴리되고 어떻게 갈등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문화의 비극'이 오늘의 풍경이다.


짐멜에게 사회학이란 언제나 다수의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제한된 현상과 범위에 국한되어 적용된다. 그런데 문화란 이와는 정반대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또는 영혼과 사물 사이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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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문화를 "영혼이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이해한다. ... 문화라는 객체에는 "개별 영혼의 (그리고 또한 그 집합체의) 의지와 지성, 개성과 정서, 역량과 정취(情趣)"가 집적되어 있다. 따라서 문화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는 객관적인,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창조적인 삶의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인 형식을 획득하며, 이 형식 자체는 다시금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중심적인 존재를 온전하게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주관적인 삶의 과정 속으로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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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추진력과 혁신의지, 자기변화 그리고 분화"라는 본질과 특성을 갖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역사적 운동의 전체에 동력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삶은 그 자체로는 형식이 없는 존재인 관계로 형식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형식은 삶의 생생한 고동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자체적으로 지속적인 타당성과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결국 삶은 형식에 대해 "잠재적인 적대관계"를 갖게 된다. 
 
삶과 형식의 분리, 주관문화와 객관문화의 분리 그리고 적대관계... 이 도시속에서, 재깍재깍 움직이는 초침에 따라 꽉 짜맞춰져 살고 있는 우리들이 느끼는 '소외', '부적응'과 같은 감정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당시 짐멜에게도 이러한 인간과 적대관계를 갖게 된 형식들, 즉 객관문화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지켜내면서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그 중 하나가 '신윤리'에 대한 짐멜의 분석이다.  
 
# 문화란 무엇인가
신윤리는 기존질서의 두 가지 요소를 비판하는 바, 결혼과 매춘이 바로 그것이다. 에로틱한 삶은 형식에 대항해 가장 고유하고 내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문화는 에로틱한 삶을 형식에 감금시켜버린다. 그리하여 경직되고 모순된다. 결혼은 "수많은 경우 진정으로 에로틱한 것과 다른 근거에 의해 맺어지며, 또한 그리하여 수많은 경우 활력이 넘쳐흐르는 에로틱한 에너지를 침체시키거나 그 개별성을 경직된 전통과 합리적인 잔인함으로 분쇄한다." 그리고 매춘은 "젊은 사람들의 사랑하는 삶을 이 삶의 가장 심층적인 본성과 모순되는, 타락하고 희화화한 과정이 되도록 강제한다." 이러한 결혼과 매춘에 대해 저항하는 신윤리는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는 "단순한 방종과 무정부적인 욕망"으로 보인다 ... 그러나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즉 진정 에로틱한 삶은 개인적인 통로를 따라 흐르며, 또한 형식에 대해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형식은 삶을 일반적인 도식에 가두고 삶이 그때그때 지니는 특성에 폭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것이 국가의 유지를 위한 제도적 억압장치라는 정도로만 그냥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는 이런 해석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매춘을 이렇게 짧은 문구로 강렬하게 비판한 글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저자가 주석에 붙인 신윤리의 창시자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신윤리
오토 그로스(1877~1920)를 중심으로 전개된 성해방, 자유연애 및 섹스 공동체운동을 지칭한다. 그로스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수제자이고, 의사, 혁명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이다. 프로이트는 제자 가운데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과 그로스만이 진정 독창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로스를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제자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로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개인과 그의 삶, 그리고 행위를 당시 시민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규범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가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근대 서구 시민사회에 대한 대안적 삶의 일종으로 성생활과 에로스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토대가 정신분석학이었다. 그로스는 무의식의 심리학인 정신분석학을 혁명의 철학이라고 확신했다. 
그로스는 1910년 스위스 아스코나에 무정부적인 성격을 띤 성적 공동체 또는 섹스 공산주의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는 추종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1914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로스의 인간적인 면이나 저술, 그리고 실천운동은 많은 반향과 지지를 얻었다. 오늘날 공동체(주의)적 생활양식과 경제제도를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대안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그로스를 그들의 정신적 아버지로 간주하고 대안적 삶의 형식의 예언자로 극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압도하는 객관문화 속에서 소수의 투쟁에 그치고 만다. 사실 이미 현대사회의 숱한 제도들 속에 뼈속 깊이 의식 깊이 빠져 있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저럴수가!'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질 수 밖에 없고 한 명의 몽상가로 기억될테니. 어쨋든, 나중에라도 이 '신윤리' 그리고 오토 그로스에 대해서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다. 
물론, 이러한 객관문화를 꼭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금물이다. 이러한 객관문화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객관문화 또는 물격문화는 "교화되고 고양되며 완성된 사물들"로서, 인간의 영혼을 자체의 고유한 완성으로 이끌어주는 객관적 사물이나 실체, 또는 인간이나 집단이 한 단계나 한 차원 더 높은 존재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도정(道程)이다. 이에 반해 주관문화 또는 인격문화는 "그렇게(객관문화 또는 물격문화를 통해) 달성된 개인적인 발전의 정도"를 가리킨다. ... 어느 특정한 사회에 더욱더 다양한 객관문화가 존재하면 할수록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삶과 행위를 더욱더 다양하게 형성하고, 더욱더 분화된 인격을 함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은 삶의 양식의 다원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짐멜은 현대 사회질서에서는 다른 한편으로 주관문화와 객관문화가 점점 더 분리되고, 또한 후자가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나 점점 더 빨리 증가하면서 전자를 압도하고 이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현대세계의 문화사적 특징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객관문화를 자기 자신의 주관문화의 발전을 위해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 이처럼 주관문화와 객관문화 또는 인격문화와 물격문화가 분리되고 괴리되며 종내는 대립하게 되는 관계를 짐멜은 문화의 갈등과 비극이라고 정의한다.

짐멜은 이 분리의 과정이 현대세계에 왜, 어떻게 가속화되어가는지를, 그래서 문화의 갈등과 비극이 얼마나 더욱 거칠게 인간의 운명에 각인되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한다. 바로 '노동분업'과 '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들 떠올렸겠지만, 그것은 막스가 경제영역에서 다룬 '소외'와도 밀접하게 연결이 된다. 짐멜은 막스의 자본론 연구에 영향을 분명 받았고, 그것을 인간 삶, 인간 영혼의 철학적 문제로 더 확장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해결책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지만 말이다.

# 문화의 갈등과 비극
노동분업의 결과로 현대세계에서는 노동과정, 노동수단 그리고 노동생산물이 노동하는 주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해서 그 자체의 고유한 논리와 법칙 및 동력을 가지고 존재하며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객체에 투자된 개인의 주체적 영혼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린다. 객체화되고 물화된다. ... 현대문화의 분화과정이란 구체적으로 "개인의 인격으로부터 그 개별적 내용을 분리해내어, 이를 독립적인 규정과 운동을 지닌 객체로서 개인의 인격과 대립시키는" 과정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짐멜은 현대문화의 갈등과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주의의 경제적 분석을 통해 현대문화의 갈등과 비극에 대한 매우 탁월한 논의를 전개했던 것이다. 
...
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끼어들어 이들 사이에 거리를 만듦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사물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방되어 사물에 대한 지배자가 되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객관정신과 주관정신의 관계를 상호간의 고양과 성숙의 관계로 이끌어줌으로써, 현대적 삶의 양식에 대한 돈의 문화의의는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상승되는 것이며, 반증되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 이 '돈'에 대해 집착하는, 즉 '다양한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말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돈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돈이 바로 농노를 봉건영주에게서 해방시켰고,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대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예전에는 '초혼권'이라는 게 있어서 농노의 여식이 결혼을 할려면 결혼 전날 영주와 하룻밤을 자야 하는, 상상하기 힘든 제도까지 있었으나 화폐경제의 등장으로 이를 돈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현물납부로 인해 농토에 얽매여 있었던 농노들 또한 화폐를 통한 납부를 통해 점진적으로 신체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비로소 '사물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짐멜의 문화이론에 영향을 준 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뭐니뭐니해도 니체를 빼놓을 수가 없다.  
# 생철학적 문화이론을 위하여 (다시 ""부분은 짐멜 글 인용)
베르그송니체 둘 다 삶과 삶의 높이를 그 아래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 위에도 기초할 수 없다는 기본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연철학자"인 베르그송에게는 삶의 현실성이, 그리고 "도덕철학자"인 니체에게는 삶의 가치가 중요하다. 삶의 가치란 개인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삶을 최고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데카당트하고 니힐한 서구의 문화에서는 주인도덕 또는 군주도덕 대신 노예도덕 또는 가축무리도덕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니체는 이를 문화의 위기라고 규정한다. 그의 철학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바로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짐멜의 문화이론은 현대문화의 갈등과 비극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함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니체와 짐멜은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지적 시도에서 상호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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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예술에서 현대문화의 갈등과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이는 문화의 갈등과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인 노동분업의 원리가 예술에서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예술적 문화에서 삶의 표현과 가치를 발견한다. 예술은 삶의 자극제와 삶의 고양으로서 니체의 혁명적 가치체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표상하는 바와 달리 니체는 현대인의 삶과 주체를 해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적-계몽주의적 사고에 의해 왜소해진 삶과 주체를 디오니소스적이고 미학적인 삶과 주체로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해 니체의 철학은 현대세계의 디오니소스적-미학적 갱생을 지향하는 사유체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나의 한계를 느낀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이미 '합리적-계뭉주의적 사고'로 어려서부터 교육받고 체화되어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미학적인 사유를 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뭐. 무식하기도 하지만서도. ^^;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할 때 흔히들 '몰아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내 감정을 온전히 쏟아본 경험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음악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출 때도 난 내가 온전히 술에, 그리고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겨본 기억이 없다. 늘 그들을 부럽게 쳐다보는 걸로 대리만족을 해야했다. 뭔가 깊이 미쳐보아야 한다. 그런데 난 그런 '결정적인' 또는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 기회는 있었겠지만 난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을 것이다. 제길... 이 평준화된 나의 삶! 
한편, 우리가 어렸을 적에 교과서에서 읽은 "독짓는 늙은이"라든가, 프라스틱 부채가 만연하던 세상에서 "대나무 부채"를 고집하던 장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그리고 지금의 예술 영역에 있는 예술가들은 작품(또는 어떤 물건) 하나하나 전체를 직접 그 개인의 온전한 영혼을 투여해서 다 만들고는 했다. 그럴 경우에 그는 이 투영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전체를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고, 그에 의해 다시 영혼이 자극받고 고양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은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를 통해 자본과의 투쟁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 짐멜이 내거는 대책이라는 것은 무협지를 읽다 결말부분까지 치달아오르다가 그만 허망하게 끝나는 것처럼 너무 맥이 풀리는 방식이다.

# 문화이론의 실천적 함의
짐멜의 문화이론 또는 문화철학은 현대의 경제적-문화적 기반을 떠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평준화하고 탈인격화하는 현대문화로부터,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주관문화에 대한 객관문화의 우위와 지배로부터 개인과 그의 삶을 구제하려는, 그의 광범위한 실천적 동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세계에서 주관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개인을 주체적인 인격체로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짐멜은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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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에 의하면 문화란 ... "자아의 통일적인 중심점에 집적된 주관적인 영혼의 에너지가 객관적인, 역사적인 또는 이상적인 가치의 영역과 맺는 관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를테면 돈이라는 객관문화가 얼마만큼 주체의 세련, 특징과 내면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바로 객체가 그 달성의 용이함을 바탕으로 인간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돈 그자체가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짐멜은 개인이 단순히 "문화를 소유하는 것"과 "문화화되는 것", 다시 말해 문화인간이 되는 것 사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소유와 존재의 구분이다. 전자가 인간이라는 주체와 문화적 생산물이라는 객체가 단순한 기계적 병렬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주관문화와 객관문화가 유기적이고 화학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객체가 주체와의 내적인 결합을 통해 개인적-주체적 인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후자의 경우 객관문화의 산물이 개인의 주체적 인격을 연장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는 인격 또는 영혼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이룬다. "문화를 소유하는 것"이 단순한 소유론적 범주라면, "문화화되는 것" 또는 "문화인간이 되는 것"은 소유와 존재가 결합된 범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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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짐멜은 개인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문화정책으로서 객관적 전문지식 및 객관문화와 더불어 인간적 교육, 즉 개인의 내적 인격체의 발달을 촉진하는 새로운 교육체제의 구축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8세기적 교육이념과 19세기적 교육이념의 결합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인문주의적-이상주의적 교육이념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내적-인격적 가치의 형성과 발전을 지향했다. 이에 반해 19세기의 교육이념은 일차적으로 객관적인 전문적-기능적 지식과 능력의 축적 및 전수를 지향함으로써, 18세기의 교육이 추구한 인문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가치를 상실했다. 짐멜이 보기에는 이러한 교육이념과 체제의 변화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객관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궁극적으로 객관문화가 주관문화에 대해 우위와 지배관계를 차지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짐멜은 18세기적 교육이념과 19세기적 교육이념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 둘을 한 차원 더 높은 통일체로 결합시키는 것만이 현대문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한다.

저자는 그예를 커다란 서재에 책을 가득 꽂아놓은 사람으로 쉽게 들고 있다. 책을 읽고 체화시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단순히 소유에 그치는 사람이 있다는 식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가 바로 이 19세기 교육의 희생자야. ^^ 그건 그렇고 이 18세기 교육이념과 19세기 교육이념을 통일체로 결합시킨다는 게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위기'라 기꺼이 칭할 수 있는 세상을 다시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희망의 교육이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현장에서, 삶에서 구체화시키려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함께 듣는 음악은 정수년(Jeong SooNyun)의 해금연주 앨범 "Beautiful Things In Life"(2001) 중 1번 곡 "아리랑(Arirang)"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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