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글 / 길(2007)

섣부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짐멜의 관심은 어떻게 이 복잡다단한 사회속에서, 익명의 사회속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던 돈이 다시 개인을 옥죄게 되는 이 비극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과 질적 발전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특성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개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뤄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러한 특성과 이해관계를 떠나 공동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가 늘 궁금했던 나로서는 그 대척점에 위치한 개인주의의 정체에 대해 파해치고 싶었고, 짐멜은 그러한 측면에서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해 매우 명쾌한 답변을 내게 제시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인주의' 속에는 인간 일반으로서의 개인을 중시하는 '양적 개인주의'와 개개인의 질적 독특성을 강조하는 '질적 개인주의'로 나뉘어 진다는 것,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이 두 경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는 것을 짐멜은 강조하고 있다.    


# 호모 듀플렉스 - 개체성과 사회성의 변증법적 관계
짐멜은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늦어도 1896년에 발표된 논문 「사회학적 미학」에서부터 개체성을 점점 더 의식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양적 개체성과 질적 개체성의 두 범주로 구분한다. 전자는 사회집단이나 영역의 교차점이나 결절점으로서의 개인의 존재와 행위를 지칭한다. 다시 말해 사회환경 안에 위치하는 개인을 가리켜 양적 개인, 그리고 이 양적 개인에게 귀속되는 자유와 자기 책임성을 가리켜 양적 개체성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지지 않으면서 내적으로 자족적인 또는 외적으로 배타적인 개인을 질적 개인, 그리고 질적 개인의 고유한 존재와 삶의 방식을 가리켜서 질적 개체성이라고 부른다. 양적 개체성이 공통적인 것, 일반적인 것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질적 개체성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와 이상 그리고 행위와 삶의 규범과 법칙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은 사회 속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인간 일반으로서의 개인과 사회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그 개인 본연의 특징을 강조하는 유일자로서의 개인 이렇게 두가지 영역에서 정의할  수 있다.   


개체성은 사회집단이 확장되면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즉 개체성의 증가는 사회성의 증가에 상응한다. 또한 개인은 사회 내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 외적 존재이다. 그는 이중적 존재이다. 즉 개인은 "호모 듀플렉스"인 것이다.

짐멜이 예로 들었던 중세의 '길드'체제를 떠올려 보자. 음침한 소설로 기억되는 '향수'에서도 묘사되어 있는 중세의 길드체제 하에서는 개인이라는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길드 체제 속에 갖혀 버리면 도제는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그 체제 안에 부분이 되었다. 농노제 속에서의 농노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개인이 사회에 전적으로 또는 전인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에 비해 근대사회에서는 개인이 단지 부분적으로 또는 인격의 일부분을 통해서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회도 사회 그 자체나 사회일반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나 집단 또는 제도와 같이 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근대사회가 가능한 것이 바로 현물로 거래되거나 납부되던 방식이 화폐로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돈은 개인을 이러한 전인격적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해방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돈만 지불하면 되었기에 농노는 농토를 벗어나 도시로 나가서 돈을 벌어 영주에게 바치게 되었고, 종국적으로는 자신의 신분을 돈을 내고 벗어버리고 도시로 들어가면서 도시 시민계급이 출현되게 되었고, 중세사회의 체제는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개인 일반의 자유에 대해 그 정당성을 강조하는 철학적 논거가 뒤따랐고, 그것을 짐멜은 칸트로 대표되는 '18세기의 개체성' 이라고 표현한다.  


# 양적 개인주의 - 칸트 (" "는 짐멜글 재인용)
" ... 우리가 세계의-사회적 세계를 포함하여- 메커니즘의 일부분인 한, 우리는 흘러가는 구름이나 풍화하는 암석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일단 우리가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의 단순한 생산물과 교차점에서 벗어나 고유한 자아로부터 발달된 존재가 되어야만 그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책임질 수가 있으며, 그와 더불어 책무의 가능성과 도덕가치의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 ......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가는 '정언명령'이 표현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렇게 하여 평등의 이상이 당위의 의미가 되었다. ...... '인격을 불문에 부치는' 도덕적 판결, 도덕법칙 앞에서의 평등은 개인의 고유한 행위가 무모순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필연적인 행위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완성된다. ......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이 도덕적일 뿐 아니라, 오직 도덕적인 인간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의 행위만이 전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자아에서 유효한 저 보편적 법칙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8세기의 개체성 개념-즉 진정한 '인간'은 모든 우연적인 인간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개인적 자유는 평등을 배척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표상-은 칸트에게서 추상적으로 완성되었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은 짐멜에 의하면 현실적이 아니며 경험적이 아닌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을 암시한다. 개인적 자유와 평등을 근거지우고 정당화하는 최종심급인 정언명령은 인격적-주관적 자아가 아니라 형식적-객관적 자아로서, 이는 개인을 초월하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원리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삶의 실재적이고 경험적인 터전을 떠나 보편개념인 인간의 "개별적 견본"으로 기능한다.

칸트를 통해 완벽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정립되지만,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본질적 개체성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언명령'이라는 원리에 기반되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짐멜은 새로운 개인, 각 개별인의 주체성과 특질, 즉 인격을 강조하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니체를 언급한다. '19세기의 개체성'을 대표하는 주자가 바로 니체이다.


# 질적개인주의 - 니체
"이전에는 개인의 의미가 다른 사람들, 즉 사회 전체와의 관계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반면, 니체에게서는 소수의 위대한 인간의 등장이 대다수의 인류가 저차원의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지금까지 보편성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도덕적 존엄성을 획득한 개인의 특성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이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보편성이 도덕적 존엄성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적 특성이라는 위회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업적이다. 중심과 주변이 자리바꿈을 한다."

흐름 상 알아맞췄겠지만, 짐멜의 개인에 대한 관심은 이 니체의 개인, 19세기의 개인주의에 상당히 치우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인 김덕영 선생은 짐멜이 18세기와 19세기의 개인주의를 종합하고자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글쎄... 내가 짐멜 글을 읽으면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내가 돈의 철학을 통해 접한 짐멜의 관심은 개인 일반의 강조가 과잉화되어 있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이 대도시 속에, 이 양적 민주주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개인 본연의 질적인 고양을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개인주의를 18세기 양적 개인주의와 19세기의 질적 개인주의를 나누며 후자의 개인주의 속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칸트에서 니체로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이란 주체가 자신의 선험적 원리와 도식 그리고 법칙에 의해 객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를 구조화함으로써 새로운 지적 사유물과 세계를 형성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
인간과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숙명은 외적으로-이를테면 종교적인 또는 형이상학적인 세력과 질서에 의해-주어진 가치나 이상 또는 목적에 의해 근거지어지고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최종심급은 이제 바로 인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목표가 되는 것이다. ... 인류 역사의 모든 문화 시기에는 단지 소수의 인간들만이 삶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타고나며, 이들은 다수의 열등한 인간들을 자신의 특성과 특질 및 개성을 고양시키는 데 이용해야 한다. 이들 소수 인간들이 다름아닌 초인이며, 이들의 의지가 다름 아닌 권력에의 의지이다. 니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질서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인간집단 사이의 거리와 불평등 그리고 서열에 의해 구성되는 질서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니체의 도덕철학을 귀족적 개인주의 또는 엄격한 윤리적 인격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까지 봐도 짐멜은 니체에 충분히 치우쳐 있단 말이다. 그럼 내 주장이? ^^; 짐멜의 수많은 글들을 꼼꼼히 읽은 저자는 보란 듯이 짐멜의 글을 인용하면서 나의 섯부른 판단을 비웃는다. 쩝~~  


#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의 종합을 위하여
" 보편적이고 순전히 합리적인 법칙으로 결합된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지닌 개인들을 주창하는 18세기의 비역사적 이상을 개인의 분화에서, 개별 인격체들의 고유한 자기법칙성에서, 그리고 역사적 삶을 통한 그들의 조직에서 정신사적 업적을 발견하는 19세기의 이상과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통합시키는 게 미래의 과제이다."

개인에 대한 논의는 이쯤해서 접고, 이제 그 개인하면 언급되는 개념들을 아우르는 인격에 대한 짐멜의 논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격에 대한 논의 속에서도 짐멜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는 핵심 용어인 '상호작용'이 등장한다. 교환, 상호작용, 길항작용, 이러한 용어들은 짐멜의 모든 글을 관통하는 핵심용어들이다. 
  

# 인격
짐멜의 인격이론은 자아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통일성을 가정하는 관념론적 자아 개념과 달리 짐멜은 자아가 다양한 정신적 내용의 상호작용의 총합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정신적 내용의 한 부분이자 측면일 따름이다. 그 밖에도 감정, 충동, 의지와 사고 등이 자아의 정신적 내용에 포함된다. 이러한 자아를 가리켜 짐멜은 인간이라고 부른다. ...... 인격은 그보다 자아가 발전하고 성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그의 본래적인 정신적 미분화 상태를 극복하고 다양한 정신요소를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함으로써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 인격은 오히려 역동적인 사건과 과정이다. 왜냐하면 인격은 모든 가능한 정신내용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 원래 주체와 객체, 즉 인간과 사물의 분리와 상호작용에서 결과하는 인격적 자아는 다시 한번 내적으로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고 이들이 상호작용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를 판단하고 스스로에 대한 법칙을 정립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하는 정신능력을 짐멜은 인간의 자의식이라고 명명한다. ......
"정신을 소유한다 함은 이러한 내적 분리를 수행하고 스스로를 객체로 만들며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객체가 없으면 주체가 없고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다'는 사실은 맨 먼저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실현된다. 영혼은 스스로를 아는 존재로 나타나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앎을 다시 앎으로써 영혼의 삶은 원칙적으로 무한히 지속되며 이 삶의 개별적인 실제적 형식, 말하자면 그 횡단면은 순환운동이다."

이러한 내적분리, 즉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역사 속에서 노동분업에 일찍 편입되었던 남성들에게 더욱 강하게 이루어지며 결국 남성과 여성의 독특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짐멜은 하고 있다. 사실 이대출판사에서 게오르그 짐멜의 '남성문화, 여성문화'라는 책이 오래전에 번역되어 나왔는데, 돈의 철학을 번역서로 읽을 때 답답했던 것 만큼이나 내용이 어렵게 다가왔다. 글쎄, 번역이 잘 못 이뤄져서 그런건지, 내 지식의 짧음에서 기원하는 것인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다른 책에서 이 부분을 언급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젠가 때가 되면 그 부분도 읽고 정리를 해 보고 싶다.   


 직업적 전문화와 노동분업은 남성들에게 정신내용의 분화를 요구한다. 반면 이러한 문화과정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정신내용을 분리할 동기도 역량도 얻지 못한다. 남성들의 정신적 삶이 지성과 감성으로 분화되고 상호 독립적인 반면, 여성들의 정신적 삶은 내적으로 완결된 통일적 미분화 상태에 머문다. 남성들에게서는 "가슴에 두 영혼"이 깃들며, "오른쪽 영혼이 하는 것을 왼쪽 영혼이 알지 못한다." 이에 반해 여성들에게서는 한 정신영역이 다른 정신영역에 밀접하게 연루되기 때문에 여성들은 전인격적으로 사회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관계를 맺는다. ...... 남성들은 남녀관계 외에도 직업, 친구집단, 사교집단과 같이 다양한 사회관계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여성들은 남녀관계가 사회관계의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하여 사랑한는 경우 여성들은 전인격적으로 모든 것을 바친다. 반면에 남성들은 인격과 에너지의 일부분만 바쳐서 사랑한다. 사랑이 깨지면 여성들은 인격의 전부와 사회관계의 전부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는 부분적인 상실을 의미하는 관계로 충격이 여성들보다 적다.

음~ 이렇게 남자와 여성의 차이를 단정하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한 TV프로에서 한 주차장 주차라인안에 남성과 여성이 주차를 완벽하게 하는 시간을 재는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남성들은 정해진 네모 박스 안에 짧은 시간에 차를 주차시키는데 반해 여성의 경우는(물론, 그녀도 운전경력이 수준급인 베테랑이다) 주차하는 데 유의미한 시간차로 오랜시간이 걸려 주차를 했었다. 그 때 심리학자가 나와서 남성은 분리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한 반면(그래서 네모 속만을 딱 머리속에 그리고 주차를 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은 주변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그래서 네모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옆의 주차되어 있는 차의 백밀러며 뒷 벽까지 다 고려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러한 남성의 사고를 이분법적 사고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사고가 지배한 현대세계는 인간중심의, 남성중심의,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규정하고 파괴하는 야만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짐멜의 이러한 논의도 내 생각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줬겠지만, 그 외의 내가 직접경험하거나 직접 접한 많은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김지하인데... 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다시 정리하기로 하자. 어쨋든, 여성이 이제는 전면에 등장하게 되리라. (며칠 전에도 프레시안의 김지하 선생의 글에서 이런 여성 중심의 세상을 이야기한 글을 읽은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짐멜은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익명성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 대도시 중심의 세계에서 인격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가? 일단 짐멜이 현대사회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간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실 돈의 철학을 읽으면서 전율이 일만큼 공감했던 짐멜의 진단내용들을 저자는 압축해서 기술하고 있다.


# 현대세계와 개인 - 인격이 가능한가
근본적으로 실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규정되고 목적지향적인 사회관계와 사회질서가 발달된 현대세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중심적인 지성주의적-합리주의적인, 즉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인격의 유형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점차로 증가하는 사회분화와 직업적 전문화는 개인의 인격을 "특정한 기능이나 지위의 단순한 담지자"로 전락시킨다. ... 특히 아무런 특성이나 특질도 없는 돈이라는 사회적-경제적 매개체의 존재는 현대인을 양화하고 탈인격화하며 탈개성화한다. 현대인은 돈에 의해 전례 없이 평준화되고 평균화된다. 더불어 대도시적 삶의 공간과 환경에 의해 야기되는 순간적이고 선정적인 외적 자극에 노출된 현대인은 점점 더 조화로운 인격을 발전시키기 어렵게 된다. 현대인은 신경과민증에 시달린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대인은 대부분 개인 영혼의 심층적 기저에 존재하는 자아의 중심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은 "늘 새로운 자극, 센세이션 그리고 외적인 활동에서 만족감을 찾도록" 내몰린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혼란스러운 불안정성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때로은 편력광으로, 때로는 거친 경쟁의 추구로, 때로는 취향, 스타일, 심정 및 관계의 영역에서 현대의 특유한 변덕으로 나타난다."

어떤가? 정말 오싹하게 만드는 진단아닌가? (흠~ 나만 그런가? ^^)  속도에 대한 광적인 집착,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게임에 미쳐있는 젊은이들을 떠올려 보라. 우리의 직장생활을 떠올려보고,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갈증을 떠올려보라.
니체는 인간을 이렇게 평준화시키는 돈을 저주했다. 자본주의를 저주했고, 양화된 민주주의도 저주했다. 그러나 짐멜은 니체에 비해 대단히 현실주의적 타협점을 찾고자 한 듯하다. 짐멜은 실제로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돈'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기 위한 삶의 여유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극명하게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을 비교하면서 짐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돈은 현대사회와 현대인에 대해 이중적 성격을 지니며, 이중적 문화의의를 갖고 있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돈은 한편으로는 현대인을 양화하고 탈인격화하며 탈개성화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현대인은 다름 아닌 돈이라는 물적-경제적 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과 행위에서 해방되어 돈의 많고 적음이라는 수량적 의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로소 인격적 삶과 주관적-인격적 문화에 에너지를 투자하게 된다.
이는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을 비교해보면 명백해진다. ... 반면 삶이 물질적 생존을 위한 노동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계급은 인간과 사물의 분화와 이 두 범주 사이의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며, 또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특성과 특징 그리고 능력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시 고작해야 돈을 벌기 위한 교환 관계에 한정된다.

바로 전에 소개했던 황석영의 책에서는 오직 몸뚱아리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정직하고 자유롭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잃을 것이 없는 그들이기에 가장 순수하다고... 어쩌면 짐멜이 말하는 인격의 고양이라는 것은,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에서 언급했던 '부끄러움, 수치를 점점 더 강하게 느끼는' 자들의 허울좋은 포장은 아닐런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글쎄,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아직은 줄타기 중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하자.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솔직히 이러한 짐멜의 표현들에는 나또한 거부반응이 일정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당부분 인정해야 하는 현실에서 멈칫거리는 나도 분명 있다.쩝~ )  
그런데, 저자는 놀랍게도 짐멜이 현대세계의 인격의 고양을 얘기하면서 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종류의 인격의 고양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더불어 현대세계에서는 사랑 또는 에로스가 중요한 문화적 가치영역으로 독립된다. ... 사랑은 오히려 "주체의 순수한 상태나 운동"을 표현하는 "본원적이고 통일적인 구성물"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순수한 내면의 세계를 체험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인격의 전체적 우주"에서 출발해 사랑받는 사람의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격 그 자체"와 관계를 맺는다. 다시 말해 사랑은 두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내면적인 인격의 상호작용 바로 그것이다.

돈이냐, 사랑이냐. 캬~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걸 선택하겠는가? 뭐 둘 다 갖는다면야 정말 최고의 인생이겠지만 돈이 많다고 짐멜이 말하는 이런 사랑을 얻는다고는 볼 수는 확실히 없다.
이 네번째 풍경 '개인'에서 새로운 복병을 만났다. 사랑이라...  아쉽지만 이 책에 있는 11가지 풍경속에는 사랑은 없다.

함께 듣는 곡은 The Paul Schwartz Project의 『earthbound』(2002) 앨범 중 10번 곡 "Nocturne"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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