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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씨네 21(2008)

대학 다닐 때 동아리 사람들과 MT를 가서 작은 민박집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때 잠깐 사회를 보면서 각 사람들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소회를 돌아가면서 들었었는데, 그냥 이름만 불러서 소개하기가 뭐해서 그동안 봐왔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그 상대방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친구에게는 오랫동안 함께 하여 너무나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오랫동안 함께 해 너무나도 편한 헌 이불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어떤 친구를 두고 내가 그렇게 소개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때는 순간이었지만 내가 느낀 마음을 담은 소갯말이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론 살아온 인생을 거들먹거리면서 첫인상만 보고도 그 사람을 대충 알겠다고 자만할 때가 많아졌지만, 실은 그 첫인상으로 인해 삐딱한 시선을 갖고 바라보고 결국 내가 갖고 있던 틀거리에 그 사람을 짜맞추는 경우가 많다는 걸 깨달을 때는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김혜리라는 전문 인터뷰 기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런 당혹스러움을 몇 번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기자가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무늬를 드러내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때로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살던 곳까지 찾아가 그가 걷고 뛰어놀았을 법한 길을 따라 걷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흰머리를 뽑듯 세심하게 그 사람의 흔적을 더듬거렸다는 사실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온 에너지를 써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새로운 그의 삶의 무늬가 그려져 나올때는 '아~'하고 감탄을 하곤 했었고, 내가 쌓아놓은 사람에 대한 편견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나 스스로 놀라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 박민규.
전에는 여유와 자유가 같다고, 비슷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대부분 여유로워지면 자유로워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게 전혀 다른 거라는 걸 얼마 전 느꼈어요. 여유로워도 자유롭지 않을 수 있고 여유와 자유는 별개라고, 내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대부분은 여유더라고요. 다들 돈 열심히 버는 것도, 글 잘 쓰고 싶었던 것도, 여유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유는 좀더 어려운 거라고 생각해요. 자유에 어떻게 다다를지 ...... 방법이요? 물론 모르죠. 왜 사는지도 모르는데 ......

<밀리언 달러 호텔>이라는 영화 시작 부분에도 자살하려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추락하면서 어이없는 장면들을 보잖아요. 샌드백 두드리는 애도 보이고, 죽는 자 시점에서 보면 어이없잖아요. 왜 그리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려요? (웃음) 다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짓이죠. 다들 이유 없이 불완전하고 이유 없이 어이없고 그것에 믿음을 갖기도 하고, 제 소설도 그런 어이없는 짓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의 소설에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내게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세상 사는 데 '왜'라는 질문에 네가 답할 수 있는게 얼마나 돼?'라고 질문하며 내 사유체계를 뒤흔드는 매력이 있다. 항상 매 순간을 의식하면서 난 내 행동의 이유를 대야지 그 때서야 만족하는 교육을 받았다. 누군가 나에게 "좆가는 대로 살아!"라고 말해 준 적 있던가?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인생을 뜻있게 살아라'  '네 네' 바로 이유없이 사는 삶의 순간순간들을 너무나도 통쾌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재주는 그런 어이없음을 넌지시 능청맞게 바라보고 글로 옮길 수 있는 뭐랄까? 억지로 공식화하지 않는 날것의 시선이 있다고 해야할까?

#임현식
인생은 끝까지 느끼면서 사는거야. 절대 달관이란 게 있을 수 없어. 인간이 인간을 충고할 수가 없는 것이, 아무리 말해봐야 전달은 200분의 1도 안 돼. 영화에 공감해 관객이 울 수는 있지만 다음날은 또 씻은 듯 그 감정이 없어져버리지 않아? 다시 말하면 예술가가 지닌 감정의 200분의 1만 전해져도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감동할 수 있다는 얘기지
...

언제 내가 정말 고독해봤는가. 때리면 아파서 울고, 돈 빌려주고 못 받아서 애석한 적은 있어도 진정한 아픔과 그리움을 겪어봤던가. 그러니 이것을 슬퍼 말자. 이것도 삶의 과정이고 자연적인 섭리다. ... 그리움과 고독에서 오는 감정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움에 겨워 먼산을 본다거나 비오는데 집 앞 철길을 혼자 걷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그냥 단순히 코믹한 원로배우(?)라고 생각했고 TV화면에서는 그냥 극장의 팝콘처럼 때로는 흘려가면서 심심풀이로 대했던 배우였지만, 이 책을 통해 접한 배우 '임현식'은 가슴 속에 슬픔을 안고 힘겨워하다 가까스로 홀로서기를 한, 그래서 더욱 고독하고 이제는 모든 걸 그냥 덤덤히 흘려보내며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는, 뭐랄까? 깊고 어두운 무거움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김진
"내가 버렸다고 마음먹었다 치더라도 그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고, 어느 순간 죽어도 아무 남을 게 없으리라던 외로움들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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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만 편협한 일기나 남들 보라고 쓰는 일기나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겠죠. 제가 글을 오래 써서인지 글을 보면 사람이 보여요. 자기를 잘 드러내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는 글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잘 속더라고요. '후리는 글'은 때로 굉장히 아름답기도 하고 잘 정돈됐는데, 읽다보면 앞뒤의 모든 글이 똑같아요. "나는 착하고 포용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투의 글에 오히려 거짓이 많더군요.
...
위로는 남한테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용서 안 하면 남이 백날 이야기해도 겉말밖에 안 돼요.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코 사건의 종결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선 좀 가차가 없죠. 사랑이란, 안타깝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만화작가이다. 솔직하다. 안성기의 경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중립성'에 좀 질리기도 했지만, 이 김진 작가의 약간은 날카롭게 쏘아대는듯한 표현은 주눅들게 만든다. 그럼 '나는 능글능글하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다'라고 얘기하면 거짓이 적을라나? ^^; 글로 쓰는 순간 이미 자신에 대한 포장은 이루어지건만 그 자신 속 이야기를 얼마나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는 참 어려운 일이다. 만화책은 고등학교 생활 때 드래곤 볼, 북두신권(?) 뭐 이런 걸 즐겨 접했었고, 대학와서는 언젠가 한 번 만화방에 틀어박혀 '머나먼 갑자원'을 눈물을 찍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전부다. 그러나 이 김진작가 인터뷰를 접하고 나서는 그녀가 쓴 작품들이 읽고 싶어졌다.

#송광호
얼마 전 문성근 선배님이 인터뷰에서 좋은 말씀을 했어요. 거대한 조직에서 교육받고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이 있는데, 배우는 그 얼굴들을 찾아주는 직업이라는 이야기였어요. 참 공감했어요. 관객은 나와 내 아버지, 형제자매가 살면서 감춘 얼굴을 송강호를 통해 보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며 "맞아!" 그러면서 즐거워하고 극장 밖으로 나가며 다시 공식적인 얼굴로 바꾸는 거죠.


다시 공식적인 얼굴로 바뀐다는 대목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일상에서 잃어버렸던, 편하게 웃고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얼굴들은 깜깜한 극장 밖으로 나와버리면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곧바로 공식적인 얼굴로 되돌아가 골목을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집으로 간다. 간혹 영화관람 후 찻집이나 맥주집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나마 음미의 순간이 몇 분 길어질 뿐이다.  

#김병욱
황우석 박사 사태에서 단적으로 보듯, 사회적으로 무거운 지위와 책임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놀랄만큼 황폐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때가 많잖아요? 사람들이 모두 속고 있는 거죠. 그들은 설마 나처럼 무책임하거나 미숙하지 않겠지 믿는 사람들의 피라미드인거예요.(웃음) 어떤 사람에게 사회적 책무와 권력을 줄 때는 그만한 성숙한 정신을 기대한 것인데, 우리 사회가 실은 굉장히 위험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방증이죠. 코미디를 만들 때에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냉소주의가 우리 작업의 토대 같아요.


최근 고소영, 강부자라는 별칭을 얻은 이명박 내각을 쇄신한다고 하면서 내건 것이 바로 '비고대' '비영남' '10억 이하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사람을 뽑겠다는 거란다. 코미디가 따로없다.

#황두진
저는 우리 시대가 해결할 과제 중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수고하며 힘들게 만드는 건데 그 의미를 우리 사회는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
말씀하신 문제도 있지만 실은 여성단체나 소비자단체에서 심각하게 딴죽을 걸여야 할 문제예요. 여성 모델을 보여주며 "주부의 마음까지 고려했다"고 내세우는, 주방을 여자의 공간으로 전제하는 광고가 세계 최고 교육 수준을 가졌다는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어떻게 먹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를 초대해서 김치냉장고로 기를 죽였다. 이런 것도 사실 성희롱이에요. 여자를 대체 어떤 존재로 여기는 겁니까? 마치 남자들이 친구랑 목욕탕에 가서 물건 크기로 기를 죽였다는 것과 같죠. 사실 우리 아파트의 문제는 건축적 문제가 아니라 아파트가 상정하는 가치관이에요. 아파트가 서면 있던 골목도 돌아가야 하니 도시 입장에서는 뭐가 좋아지냐고 일단 반문할 수 있죠. 또 우리의 아파트는 15평이건 65평이건 문 안에 필요한 것이 다 있어야 하고, 공유하는 공간은 없어서 인간의 사회적 관점을 가족 이상으로 확대시킬 수 없게 하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평수가 늘면 문이나 부엌도 두 개 만들어 두 세대가 섞여 살 수도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당신 생활양식이나 구성원이 변하면 이사가라"는 투의 설계예요. 그 모든 것이 파편화된 개인, 생각없이 사는 사람을 만들어내요.
......
개성이 부족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덜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낯선 사람한테 상냥하지 않은 데서 오는 매력의 반감 때문인 것 같아요. 이것도 가족주의와 관련 있는데 가까운 이들에겐 친절하면서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에겐 뜨악한 거죠. 기본적으로 좋은 도시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공평한 도시라고 보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미학적인 측면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봐요.


많은 철학 용어라든가 '모더니티' 등의 시대를 얘기하는 용어들이 실은 건축학에서 나왔다는 것에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 인간, 역사, 시대를 통찰해야 하는 건축가의 고뇌가 인터뷰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강금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원래 있었고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은 밖으로부터 왔는데 그런 인식이 20, 30년 되고 보니 갈등이 점점 사라져가요. 요즘은 내가 아무리 이건 '나'라고 주장한다 해도, 우린 이미 너무 많이 결정돼 있다는 걸 느껴요. 지금 이곳에 태어난 것도, 생김새도, 성격도. 그래서 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여러 인간이 같이 사는 것이 점점 분리가 안 돼요. 결국은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가는 과정과 관계 속에 개인의 인생이 있지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살면 살수록, 사람이란 존재는 결혼이란 걸 통해서 대지에 뿌리내기리를 하는 거 같고, 또 사람은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로 가는 거죠. 연애와는 다른 사랑이죠. 아이를 낳아 생명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사람이 연애감정으로 어떻게 계속 사랑할 수 있겠어요. 연애가 그처럼 지상에서 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그리움을 부르는 측면이 있지만 존재로서 현실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이 정말 공고한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려는 꿈을 버리진 못하는 거죠.

지금 아는 걸 좀더 일찍 알았다면 인생이 그리 무서울 것도 없고 돈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도 창피할 것도 없고 그냥 내 자리에서 살면 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죽음의 인식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잖아요. 감명 깊었던 교리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라는 구절이에요. 지금을 항상 종말과 같이. 지금을 내가 죽는 시점과 일치시켜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고 나면,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데"하는 여유가 생기잖아요?


대선때도 그렇고 TV에서 만나는 강금실의 모습은 한국 정치와는 어딘지 참 낯설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나 유세차량에서 큰 소리로 외치거나 엄지를 들어올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도저히 그녀가 낄 판이 아닌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나를 확대시켜 관계속에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라는 구절이 공감이 갔다.
지금은 뭘 하고 있지?

이 블로그를 방문했던 후배가 추천한 책을 오래도록 천천히 읽었다. 지하철에서, 점심시간에, 잠들기 전... 무엇보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가가려 노력하는 김혜리 기자의 마음씀씀이에 사람을 대할 때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게 했던 책이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많은 사람들과 접한다. 그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온 정신으로 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기에 대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공식적인' 얼굴로 세상을 대하고 익명성을 견고히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해서 조금이나마 자기 공간을 찾는 대도시의 나는 행복한가? 이런 인터뷰집이 책으로 팔리고 또 잘 읽히는 것 또한 나 자신이 이미 소통에 갈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별점 : 4점

함께 듣는 음악은 Klaatu의 "Klaatu+Klaatu Hope"(1992) 중 9번 곡 "We're off you know"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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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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