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경 지음, 살림(2007)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사유체계가 과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을 앞세운 오늘날 세상에서는 각종 학살, 전쟁, 환경파괴 등 잔혹한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고 있다. 인간을 행복의 삶에 이르게 하리라 여겼던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과연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희망을 발견해야 할까?
여기 이 책 "자연회귀의 사회학"은 도구적 이성이 무시해 온, 그리고 설명 불가능하다고 쓰레기 취급해 온 감성, 이미지, 열정 즉 삶의 날것들을 유심히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속에,말하자면 삶을 새롭게 태동시키는 저력(퓨이상스, 역능)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문명화 과정이 인간에게 이성을 통한 각종 자기억제를 체화시키는 과정에 다름아니었다면 이젠 그 억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인간 삶에서, 공동체적 삶에서 생명력을 유지시켜 온 날것 그대로의 그 부글거림을 살펴보자고,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 서론
# 일상
'일상'이란 곧, "운명에의 일상적 대면인 존재"라는...


'운명에의 일상적 대면'을 하는 존재, 이 존재를 그동안 하나의 정체성(identity)으로 규정하려고 했고, 그럴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현대의 합리적 사고방식, 실증주의적 사고 방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누가 자신의 삶을 그렇게 확연히 규정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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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일종의 환멸과, 다른 한편으로는 '체험'과 '근접성' 그리고 '가까운 가치들'에 근거하여 태동하고 있는, 매일 매일 체험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대비시켜야 할 것이다.


일종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상의 삶으로부터 추출되어졌지만 이미 너무나도 추상화되어 개개인의 삶과 괴리되어져 홀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의 이러한 '정치'에 대한 무관심대신,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홍대의 작은 클럽이라는 장소에서 심장을 울리는 음악 속에 몸을 맡기고 육감적 체험에, 부딪낌에 민감해한다.

# 일상
사회관계를 근거시키는 '부식토'로서의 일상, 아주 긴 역사의 흐름에서 '종(種)의 지속'을 보장하는 일상의 역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회 관계를 창건하는 장소로서의" '일상'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이 추상화되어 더 이상 우리의 손을 떠난 순간 우리가 다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는 바로 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 모던 사회성과 그 인식론적 토대
'자연'은 ... 우선 통상적 의미에서의 '자연'을 의미하며, 이 경우 그간 '문화'에 의해 배제되었던 부분을 뜻할 것이다. 또 '자연'은 인간 속의 '자연', 혹은 본성을 뜻함으로써, 인간 이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감성이나 열정, '동물적인 부분' 혹은 상상력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이제 상상력과 감성은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상을 표현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용어가 된 지 오래다. 교묘하게 상업화되어 쓰이고 있지만 분명 이제는 합리적 실증주의가 권좌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의 '동물적인 부분'들이 스멀스멀 대로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1부 권력 대對 역능

1장) 사회동학 : '권력'과 '역능' 그리고 '폭력'

#권력과 전체주의적 폭력
폭력적 탄압으로 질서의 항구성을 설명할 수 없고, 보호와 복종, 보호와 지배의 관계 그리고 의존의 욕구와 지배의 욕망 사이의 관련을 살피는 것이 보다 중요해진다.
운명 앞에서의, 삶에 대한 주권 앞에서의 도피인 안락한 의존은, 단지 피식민지 민중들에게만 전형적인 것이 아니다. [.......] 권력은 사회적 요구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기원하고 기능한다.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을 설명할 때 일부 진보학자들은 철저하게 '민중의 복종에 대한 거부'를 기준으로 박정희의 독재를 해석하고 납득시키려고 다시 민중들에게 설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에 이 의존의 욕구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 설득력은 떨어지고 만다. 불편한 진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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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회학의 아이디어, 실증주의 전통, 역사법칙에 근거한 사회의 진보와 진화의 신화에 바탕을 둔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이제 '역사의 주역'인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사회문제'해결의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엘리트가 행하는 기술과 지배의 융합에 의하여 일상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관리되기에 이르렀다고 마페졸리는 진단한다.



모더니티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내가 과학적 사고, 실증주의적 해석 등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지 이러한 설명은 나의 사유체계에 하나의 즐거운 자극을 준다.

# (창건적 혹은 일상적) 폭력

이질성은 폭력을 낳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삶의 원천이다. 반면, 동일한 것(identique)(혹은 동질적인 것homogene)은 그것이 비록 더욱 평화적일지라도, 잠재적으로 치명적이다. 



너무나 당연한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지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낯선 것, 설명 불가능한 것은 배척해온 삶의 궤적을 그려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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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첫 목표는 그것(현재)을 장악하고, 자르고, 조직하고, 조정 가능한 시퀀스들로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뉘어져서 시간은 이제 분리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고, 유용해지고, 기능적이 된다. 현대적 교육과정, 육체의 장악과 순화(馴化)과정, 포드와 테일러의 노동의 과학적 조직 등이 그 예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시간의 장악은 그러나 마페졸리에 의하면, 현재로부터 그 모든 체험된 강렬함을 빼앗는다. 시간은 이제 그 모든 무게를 잃어버리고 동질적이고 비게 된다.



'자! 제한시간 30초 드리겠습니다' 이 간단한 멘트 속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똑같아진다. 어쩌면 '평등'이라는 개념 또한 이 시간이 인간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부터 나온 개념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관리되기 전 세상에서 과연 '평등'이라는 용어가, 그와 함께 '불평등'이라는 용어가 있었을까?

2장) 일상

# 사회적인 것의 무의미
"정신의 바로 곁에 육체가 있고, 이성의 바로 옆에 항상 감성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 '일상'이라면...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과연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풀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싶다. 오히려 현대의 모든 광고의 이미지 및 각종 홍보는 이성적 완결성보다는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 의례의 근거와 형식들
대중의 '이중성'과 '오불관의 태도'에 연결된다. 즉 공식적인 가치들에 대한 표면적인 동의를 넘어서서 대중은, 삶의 의지를 표명하는 이단적인 몸짓과 아노미적 실천들을 유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어떻게 사회생활이 존속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민중을 무조건 선의 존재로 규정하는 한국사회의 진보주의적 민중관에 나는 회의적이다.


제2부 문화의 자연화, 자연의 문화화
3장) 부족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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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유한다고 믿는 곳에서 나는 사유되어지고, 내가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것에서 나는 영향을 받는다.


세상과 분리되어져 있는 '나'라는 완전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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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이상'은 달리 말한다면 '우주적 나르시시즘(narcissisme)'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떻든지간에,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 감정의 전염과 인플레이션에 근거하는 그 무엇, 그리고 특수한 뿌리내림을 출발점으로 하여 우주적 연결안에 통합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지하의 '역능'
마페졸리는 "대중은 비어 있다"라고 표현한다. [......] 대중은 비어 있음 자체이고, 역능이 있게 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민중을 프롤레타리아(역사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동일성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군중은 연속적으로 혹은 동시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군중 혹은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 인종차별적인 군중 혹은 관대함으로 충만한 군중, 환상에 빠진 군중 혹은 교활한 군중이 될 수 있다.  철학적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미래가 풍부한 불완전성과 관련이 있다. 단지 불완전성만이 삶의 표시이고, 완전성 그것은 죽음의 동의어이다. ......
이제 '역능'의 저장고로서의 '민중'은 어떻게 그 역능을 보존하고 재생시킬까? 이는, 뒤르케임이 '사회적 신성'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였던, '집합적 힘'을 통해서이다. 마페졸리는 이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이름 붙인다. 즉 어떤 집단이든 그것이 형성되면 개인의 단순한 합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초월적' 차원이 생성되는데, 그 초월성은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 '손닿는 범위' 안의 목표들에로의, 실질적으로 공유된 감정들에로의, 즉 관습, 의례 등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로의 재집중을 가능하게 하였다.


개인의 단순한 합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초월적' 차원.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라고 부른다. 결코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의 삶이 모여져 발산하는 무엇!

# 지하의 역능
마페졸리는 나아가서 이러한 대중의 변덕을, 이탈리아의 풀치넬라Pulcinella가 "나의 운명은 하나의 바람개비인 것이다. 종속되면서 저항하고, 바보이면서 천재적이고, 용기 있으면서 비겁하다."라고 보여주는 '대립적인 것의 단일성'과 연결시킨다. 대중의 권력에 대한 '이중성'은 직접 대결과 충돌보다는 아이러니, 풍자, 비웃음, 유머 혹은 기권 등 여러 형태의 "정치적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의 '이중성'은, 마페졸리에 의하면, '권력욕(libido dominandi)'에 의해서 움직이는 모든 이들에 대한 대중의 거리두기, 결국 대중들의 뿌리깊은 '상대주의'를 나타낸다.


난 민중, 대중을 이 이상으로 잘 설명한 글을 만난 적이 없다. 김수영의 풀도 '일어서는 민중'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눕는 민중'도 함께 보아야지만 온전하다.

# 사회성 대(對) 사회적인 것
모든 것을 '기획'의 잣대로 재는 정치적 지식인에 의하여 재어질 수 없지만, 민중이 가진 단 하나의 '기획'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 안에 지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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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근본적인 책임은, 매일의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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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법률상'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맺고 그 안에 들어간다면, 반대로 '사람'은 타인들에 종속되고, 사회적 소여를 수락하며, 하나의 유기적 전체 안으로 들어간다. '개인'이 하나의 기능을 갖고 있다면, '사람'은 하나의 역할을 갖고 있다. 마페졸리에 의하면, 개인이 갖고 있는 기능이 정치와 관련이 있다면, 사람이 갖고 있는 역할은 '사회성'그리고 '대중'과 관련이 있다.


모더니티의 합리적 이성을 지닌 존재를 '개인'으로 규정한다면, 새로운 공동체의 부활을 뜻하는 신부족주의 속에서는 타인들 속에서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사람'으로 구분하여 규정하고 있다. 서양의 'indvidual(더이상 나눌 수 없는)'과 동양에서의 '人'(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의 구분으로 바라보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다문화주의
어떤 문화이든지 자신이 있을 때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역동적 뿌리내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교배, 섞임 그리고 이로부터 연유하는 불균형과 불안은 정학과 동학의 시너지로부터 오는 고유한 창조물들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우선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카프카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들 사유의 힘은 바로 그들의 '통합된' 동시에 '거리를 둔' 삶으로부터 온다.


우리 사회에서의 순수 혈통주의(단일 민족주의), 양성애, 장애인에 대한 편견, 외국노동자에 대한 혐오 등이 얼마나 자신없음에서 나오는 억지스런 단절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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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모든 사회적인 것의 시작이자 끝이 아니고, 우세해지는 것은 그 전체 안에서의 집단, 공동체이다.

4장) 미학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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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느낀다는 사실이 하나의 가치를 야기하고, 창조의 벡터가 된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 감각의 기쁨
지식인들은 존재의 감각적 차원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금욕주의적 관점'에 의하여 감각적인 삶 대신, 인지 과정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이성적으로 행동하라." "너의 충동, 육체, 감수성을 조심하고, 절제하라" 등). 그리고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단지 합리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기에 "존재의 감각적 형식들"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 존재하는 것들은 거짓, 허영, 부패의 유혹 등으로 비판받는다.


내가 괴로워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식인의 범주에 든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자의든 타의든 모든 현대판 금욕주의의 족쇄에 갇혀 있는 나로서는 이 족쇄에서 벋어나 상상력의 나래를 펼친다든가 오감을 열어제끼는 경험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강조되는 공감, 날것 그대로의 것들 등에 대한 직간접 이해가 뒤떨어진다는 데 항상 자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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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고 혹은 더 나아가서는 감각적으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사회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회체'를 구성하는 정서, 감정 그리고 감각으로 만들어진 일체의 상호 작용적 관계가 된다. ...... 이 점에서 '미학의 윤리'는 사회관계를 꿈, 놀이, 상상력, 감각의 즐거움 등의 합리적이지 않은 변수들로부터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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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마시기, 수다, 사랑, 싸움 등 이 모든 것들은 금방 지나가는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 지금 즐겨야 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마페졸리에 의하면, 실재의 사회적 '구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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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없는 대화, 제스처, 행동, 옷 입기 등은 모두 소통의 기초가 되고, 스캔들, 잡보, 스타, '자동차에 치인 개' 등의 보잘것없는 것들은 사회성의 근거가 된다. ....... 말하자면 자연언어(lange naturelle)인 셈이고, '문화'란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미세한 사물들의 일체가 된다.

#문화의 자연화
자연은 "그의 고유의 활동에 의하여 모든 사물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원초적이고, 신성하고, 영원히 창조적인
우주적 힘"인 것이다 ......반면 모더니티는 자연을 사회적 영역에서 몰아내고 그것을 객관화, 개체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관리하고, 기획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그 결과 일어나는 세계 곳곳의 대재앙과 환경재앙을 보라.

#정체성으로부터 동일시로
한편에 신학적이고 규범적인 입장이 있어서, "세계가 이것 혹은 저것이"되어야 하기에 "개인은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파르메니드)라는 입장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주체를 타자로부터 이타성(신, 가족, 부족 그리고 내 안의 '타자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생각하는 입장(헤라클리투스)이 있다.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등 동양의 전통에서는 인간 본인을 규정하기 보다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인간을 정의해왔다. 마페졸리의 논의가, 역시나 이성중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동안 철퇴를 맞아왔던 동양적 사유방식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리라는 강한 추측을 하게 한다.  

5장) 노마디즘

# 방황의 충동
모더니티의 고유한 점은, 마페졸리에 의하면, 모든 것을 서열 속에 집어넣고, 규약화하고,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푸코와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연구들은 생산, 관습, 건강, 교육, 성생활 등 모든 측면이 그 대상임을 잘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순화되고, 노동을 하게 되고, 거주지를 지정받게 되었다. 이를 마페졸리가 '전체주의적 폭력'이라고 불렀던 것... '가득 찬' 것은 '구멍'이 나게 되고, 완성은 그 결여들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을 지배해 온 방식은 포화상태에 이르러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있다. 바로 그 구멍속에서 스멀스멀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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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existence)'의 어원 자체(ek-sistence)가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타인에게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 창건적 노마디즘
유목주의는, 마페졸리에 의하면, 제도화되면서 잊혀졌던 기원의 표지인 모험의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무한한 진보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그 진보가 '퇴화'의 규칙적인 회귀에 의해서 관통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진보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마페졸리는 이러한 진보에 대한 강한 대립용어로서 '퇴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퇴화'는 그동안 진보라는 이성이 만든 단선적 시간에 대한 거부로서, 오히려 그 이성에서, 단선적 사관에서 도태되고 배제되었던 것들의 드러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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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계에 대한 경제적 관점보다는 생태학적 감수성에 보다 강조점이 주어질 것이라고 마페졸리는 강조한다. ...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속의 소여를 전반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그리고 경험적인 방식으로는 삶의 힘이나 혹은 존재의 역동주의에 강조점을 두는 그러한 정신의 생태학이 중요해진다. ...... 생태학적 감수성은, ... 일종의 모계중심사회와 관련이 된다는 것인데, 이 사회는 대지의 힘과 생기론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제 자연은 파트너로 간주된다. 생태학적 감수성은 뿌리내리고 있고,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인간 존재에 주의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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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는 실제로 구체적인 연대의 형태들을 함축한다. 우리가 사는 것이 매일매일의 비극이고, [......] '현재주의' 혹은 영원한 순간인 때부터 이제 그것이 추상적인 이론화나 혹은 먼 곳을 향한 프로젝트의 대상이 됨이 없이, 매일매일 상호부조를 실천하고, 정서를 교환하고, 기초 연대를 표현해야 한다. 추상적 프로젝트의 확장에 일상적 관계의 강렬함이 답한다.

#부유하는 영토
모더니티의 표지는 '자아주의적 가둠'과 이것이 그 근본 구실을 하는 제도적 가둠-가정, 감옥, 병원, 교육, 정신병리학, 그 외 다양한 훈육 등-이다.


난 이 자아주의적 가둠과 제도적 가둠에 스스로 적응하는 데 3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슬프다.

# 모험의 사회학
한편에는 명시되고, 소란스럽고, 또 미디어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주창하는 공동 가치들이 있다. 그러나 마페졸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생활과 사회적인 생활의 실제적인 역동성에 매우 작은 영향력만을 가진 가치들이다.

6장)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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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모던 '드라마'의 표시였다면-과학, 기술 혹은 경제 발전이 그 가장 가시적인 결과라고 한다면- 이제 반대로, '느림' '게으름'의 찬양을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삶은 '부동의 순간들', 나아가서는 '영원한 순간들'의 연쇄일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최대한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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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핵심은 '자아 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장소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모더니티의 경우로서 계약적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합리적 개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주어진다면, 후자의 경우는 이제 태동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특유한 공간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에 적응하는 '신부족들'과 관계가 있다.

# 목적 없는 삶
니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살기에." ...... 삶은 아마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아무것도 삶만 한 가치가 없다.


자꾸 삶을 가치있게 살라고 부추기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에서 무언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에 지쳐가고 있다. 자우림의 노래였던가? 오렌지 마말레이드라는 노래에서 "하고픈 일도 없는데, 되고픈 일도 없는데 모두들 뭔가 되라 하네"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부동의 시간
그 삶은 진부함 속의 삶이고, 또한 잔혹함 속의 삶이기도 하며, 그림자와 빛의 혼합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제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은 항상 염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에 니체, 짐멜, 앙리 베르그송 등의 생기론자들이 의심받아왔던 것이다.


김지하 선생이 강조하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늘'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서로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 세계의 즐거움
사소한 일상의 예들인 동네의 삶의 의례의 즐거움들, 우정과 사랑의 친밀한 즐거움들, 다양한 축제 기회의 집단적 즐거움들은 이제, 진지하다고 알려진 영역들인 노동, 정치 그리고 소비의 영역들까지 침투한다. 그런데 이 사소한 즐거움들이야말로, 마페졸리에 의하면, 미래의 가치와 삶의 양식을 전망하게 해주는 대안적인 진정한 즐거움들이다.

#가상의 세계
상황들은 결코 칼로 자른 것 같지 않고, 그것들은 결코 완전히 하얗거나 검거나 분홍빛이 아니다. 그것은 단색화 속에 무지개 빛깔들의 모든 팔레트를 표현한다. 하나의 색은 갑자기 다른 색으로 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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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그것에 의하여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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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전체적 조화의 보장자인 셈이다.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 사물의 유기성
사람들은 체화된 지식으로, 삶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빛과 그림자를, 관대함과 비열함을 포함한다. 삶의 온전성을 인식하고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장기 지속에 있어서, 민중 문화에 토대를 제공하는 비극의 쓰라린 지혜이다.
충격적이고, 불규칙적이고, 나아가서는 추하기조차 한 삶, 보여지는, 살게 주어지는 바대로의 삶의 수락을 체화된 지식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따라서 마페졸리가 보기에, '철학자'이고, 하나의 '생철학'의 진정한 전문가들이다.

#사회적 점착성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 요약한다면, 나에게 귀속된 운명과의 관계. 운명으로서의 개인적 육체, 운명으로서의 우리가 사는 공간, 운명으로서의 사회적 상황 등. 통제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역사보다는, 적응해야만 하는 운명. 존재의 집단적 차원에 의미를 다시 부여하고, 개인이 사회체 안에 '소실'되게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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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종(種)의 항구성을 보장하는 것도, 삶이 갱신되고 자라나고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도, 바로 이 여성적인 것이다. 이 세계가 야기한 미학적 감흥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이 세계에 대한 전율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역시, 마페졸리에 의하면, 이 여성적인 것이다. 사물들을 어떻게 되어야 하는 바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아는 "쓰다듬는 사유" 또한 이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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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카오스는 가이아, 즉 대지를 낳는다. 후자는 분열에 의하여 우라노스, 즉 하늘을 생성시킨다. 마페졸리에 의하면, 모든 서양 전통은 제우스에 의하여 상징화되는 후자를 신성화한다. 고전적으로 보았을 때 제우스는, 덮어씌우는 하늘로서 질서를 부여한다. 그것은, 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하자면 탈혼융화(defusionne)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의미에서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르주아주의의 후계자인 정신분석의 근본은,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문명의 이 가부장적 질서 부여의 기능을 자기 것으로 한다.
 그러나 반대로 융합적 혹은 대지적 원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애매하고, 남성적 신들 중에서 가장 여성적인 신인 디오니소스는 노모스의 한가운데에 '자연(phusis)'을 재도입하기 위하여 돌아온다. 풍요로운 무질서이며, 창건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삶을 부여하는 위기(기회-4시신데렐라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단지 이 무언가 변화하고 있고, 진정 변화해야만 한다면, 이전 글에서 옮긴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고 방식이 우리를 구원할 사고방식이 될 수 없음을 안다면, 이 미쉘 마페졸리라는 프랑스의 한 사회학자가 강조하는 내용들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 그 징후들을 발견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직까지는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분명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는 논의들임에는 분명하다.

함께 듣는 음악은 Electric Light Orchestra의 "ELO's Greatest Hits"(1979) 앨범 중 8번 곡 "Telephone Line"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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