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초순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점심시간 임원분들과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다. 식사는 부대찌게로 맛있게 했다. 보통 평사원들은 임원분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아무리 편한 자리라 하더라도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 식사를 끝내자 마자 바로 자리를 뜰려고 하는데 나가는 길에서 부이사장이 날 잡아끌더니 "오은 전시회 갔다와 보자" 하시는 거다. 오은? 누구지? 
주저주저 하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오은을 모르나?" "글쎄요. 그런가보네요" 임원들끼리 이야기한다. 순간의 쪽팔림. 아니 "내가 그런 화가를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속으로 투덜투덜하면서 따라갔다.

잠깐 걸어 중앙일보사 1층에 갔는데 시인 고은 문학 50주년 전시회였다.  이런! 시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전시회를 고은 시인이 연다는 건 내 생각의 패러다임 상 연결이 안되서 잘못 들은 거였다. 그러나 내 무식함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꺼내기는 이미 늦은 타이밍! 어쨋든...

강렬하고 난폭하게까지 느껴지는 붉은 색의 사용이 어두운 색과 극한 대비를 이루며 고은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이 시인이 이런 그림에까지 하면서 놀랐었다. 
낙관을 대신하여 반달 모양에 자신의 지문을 덕지 덕지 덧이긴 것 또한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 고은은 내게 시인으로서 더 다가왔다. 여러 그림 작품과 함께 몇 가지 짧은 시 작품들 또한 전시되었었는데 한 참을 그 시들 앞에서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결국은 안내 데스크에서 볼펜을 빌려 팜플릿에 받아적었다.

내려갈

보았네
올라갈

못 본



얼마 전 장인어른께서 정년퇴임을 하면서 그 동안 써왔던 글을 모아 지인들에게 줄 양으로 작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자식들이 한 마디씩 쓰라고 해서 글을 썼었는데, 진작 이 시를 접했다면  긴 글 덧붙일 필요 없이 가장 나의 마음을 잘 전달해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짧은 시 안에 인생의 정수가 담겨져 있는 ... 아... 정말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 보았다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나이밥을 먹어야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시를 보면서 드는 깨달음이야 그렇다치고 일상에서 이런 깨달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게 문제인데 늘 조급하고, 더 잘해보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과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내 욕망. 그러려니 세상을 바라보는 불자가 아닌 이상에야 나는 당분간은 끊임없이 노를 저으며 투덜투덜거릴 것이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하고 묻지도 않으면서. 그러다 줄 끊어진 연처럼 하늘하늘 하늘을 나는 연이 되어 그제서야 잠시 동안 내가 살던 세상을 먼 발치서 보게 될 것을...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우리 모두 무죄입니다

무언가 지쳐 있는 가슴을 포근히 감싸주는 듯한 위안을 그 자리에서 받았었다. 서로 서로 '잘 살고 있어요. 당신!' 하고 토닥여주는 그런 정겨운 상상을 해 주게 하는... 내리는 눈을 보며 문밖으로 나와 말없이 서로를 보며 엷은 웃음 지으며 눈인사 하고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머리속에 그려졌다.


엉겁결에 끌려갔던 전시회이지만, 이 세 편의 시가 내 점심 한 때를 충만하게 했다. 오랫동안 가방 속에서 뒹굴고 있던 이 팜플릿에 급하게 옮겨적었던 이 시구를 정말 반가운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오늘에서야 올려 놓는다. 가뭄이 해소되게 더 거칠게 내렸으면 싶은데... 거의 한 달 만에 만나는 단비이니 감사할 수밖에.

함께 듣는 음악은 Maria Bethania의 "Dezembros"(2000)의 6번 곡 "Gostoso Demais"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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