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에 논술시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신문의 교육면에는 좋은 논술 사례, 또는 논술을 잘 하는 방법 등의 기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서점에서 학생들은 논술을 위한 책, 논술에 대한 책을 집어든다. 그런 글을 몇 줄 읽어내려가다 보면 문득 의구심이 생긴다. 문학에 대하여, 사회이슈에 대하여 참으로 다양한 시선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을텐데 이러한 글들은 마치 '이것이 정답이요!'를 강요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그 정답같은 논술법을 익히기 위해 학교의 담장을 넘어 또다시 사설 학원의 문을 두드린다.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논술은 어떤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걸 뜻한다. 논리적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법을 배운다는데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마다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리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지니는 일일 것이다. 헌데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입장을 갖기도 전에 누군가가 던진 질문들에 대해 정답이라고 추앙받는 논술문들과 논술법들이 학원가에서 학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는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나 이질성은 무화되어버린다. 대상에 대한 질문은 없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방법만 공부가 되버린 세상.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지금 주화입마에 빠져들고 있다. 자신의 일상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눈과 힘은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정답만을 찾아 헤매는 눈먼 자들을 양상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공부를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야'라고 단호하게 일갈하는 고미숙의 <홍모 쿵푸스>(2007, 그린비)를 무릎을 치며 읽게 되는 이유이다. 

저자 고미숙은 자본과 학맥으로 무장된 대학이라는 주류학문풍토에 당차게 반기를 들고 '연구공간 수유+너머' 도장을 열어 열정적인 지식인 공동체를 결성해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그런 그녀가 <호모 쿵푸스>에서는 주화입마에 빠져들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진정한 공부 비법을 역설했다. 이 책 속에서 제안한는 공부의 달인이 되는 비법은 그녀 자신이 공부와 글쓰기의 대가가 되기까지의 경험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공부의 달인들이 모여들고 또 그곳에서 새로운 고수들이 탄생하게 된 과정 속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는 홍대용의 말을 빌어 공교육에서, 대학에서, 심지어 대안교육에서조차도 학생들의 질문들이 사라진 것이 우리 교육이 주화입마에 빠져든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결국 공부는 세상에 대한 질문의 크기를 넓혀나가고 그 답을 찾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부의 소재는 학교 담장 안의 교과서와 참고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결국 공부의 과정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은 없을까? 우리 머리속에 쉽게 떠오르는 비법에 독서비법이 있다. 저자  또한 독서를 통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조우할 수 있다고 독서비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는 것이 공부의 내공을 튼튼히 할 수 있게 할까? 저자 고미숙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했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2003)과 최근에 나온 <임꺽정, 길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사계절,2009)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답은 바로 고전이다. 고전을 통해 우리는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도 있고,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체험할 수'도 있다. 질문의 힘은 바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나온다. 또 한가지 진정한 공부를 위해 저자가 소개하는 초식은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하다. 그것은 암송과 구술인데 이 초식을 연마하다보면 일상적으로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힘이 생기고, 또한 수많은 책들을 자기식 어법으로 체화시킬 수 있다. 

위에 소개한 몇가지 초식들보다 저자가 상당히 많은 지면에 공을 들여 소개한 최상의 비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부하는 자들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릇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깃든 것들은 다른 살아있는 것들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공동체라는 린 마굴리스의 글을 인용하며 배움의 과정을 외부와의 소통과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네트워킹 초식은 단순히 책을 함께 읽는 과정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삶이 되어야 하듯 일상의 모든 과정이 소통이 될 정도로 확장되어야 하는 대단히 고난위도의 기술이다.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개인 중심의 공부를 강조하고 있는 현대 세계의 공부풍토에서 이러한 주장은 획기적이다. 심지어 함께 밥을 지어 같이 먹는 것도 중요한 공부 비법 중에 하나라고 하니 어찌보면 이게 무슨 비법일까? 고개를 갸우뚱하게까지 만든다. 

그렇다. 결국 저자가 오랜 공부비법을 소개하고 돌아온 곳은 다름아닌 우리네 '일상'이다.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라고 하는 것들은 저 높은 학교 담장속에 독점된 사유물처럼 존재하고 있고 오랜동안 그 담장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던 현대인들은 오히려 스트레스 혹은 의욕 상실 등과 같은 애매한 이유로 소외받고 괴로워하고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미숙이 강조하는 공부비법은 그런 점에서 학교 담장을 허물고 진정한 공부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혁명적 선언이기도 하다. 

이젠 이 책을 접하는 독자에게는 선택의 순간만 남았다. 배움이란 원초적 본능을 이 비법들을 통해 혁명적 내공으로 축적시킬 것인지, 아니면 주화입마의 문턱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그렇고 그런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존재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지를 말이다. 욕심이 생기는 자들이라면 과감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초식들을 음미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함께 듣는 음악은 Graeme Allwright "Master Serie Vol 1"(1993) 중 12번 곡인 'La Petite Souri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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