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지음 / 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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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짧으니, 점점 요약 정리하기도 힘들어진다. 아직 반도 정리를 못했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그러나 모르니까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하나하나 아는 부분이나 깨달아가는 부분이 있으면 또 어찌 기쁘지 않았던가?
벅차지만, 초심으로 돌아가서 한 구절 한 구절 기록해 놓자. 자꾸 나태해져 앎의 기쁨을 져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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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자연의 세계 속에서는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오직 인간만이 자연세계에서 벗어나 가치세계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 세계속에서의 가치는 '가치있다'는 특성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을까? 자연세계에서는 한낱 돌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인간세계, 아니 가치세계에서는 서열 꼭대기에 있는 최상의 가치있는 사물이 된 것일까? 너무 원초적인 질문일까?
이번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다섯번째는 바로 이 '가치'에 관해서이다. 
짐멜은 가치를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 특히 교환을 통해 형성된 독특한 제3의 세계에 위치시킨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다이아몬드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인간 개개인의 욕망의 차원에서 가치를 설명할 수도 없다. (예가 될른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요강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다고 여긴다고 해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욕망으로도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해서 꼭 그 객체가 가치있는 것 또한 아니다. 경제적 영역에서의 가치만 내가 예로 들었는데, 그와 다른 영역에 있는, 예를 들면 사랑, 놀이, 이성, 이런 것들이 영원히 가치있거나 무가치한 것이라고 당신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이성만이 가치있고, 순식간에 변하는 감정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다스려야 할 나쁜 무엇이라고 배워왔고, 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또는 의식적으로 즐거워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처럼) 누군가를 대하는 것이 몸에 베어 있다. 이러한 일상의 모든 가치와 무가치의 구분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짐멜은 가치는 단지 경제적 영역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막스의 노동가치설에 대해서도 '그걸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해버리는 짐멜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저자는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논의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한다. 즉, 짐멜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어떤 배경을 통해 자리잡게 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가치에 대한 논쟁점들을 살펴본다. 여기서는 신칸트학파와 한계효용학파의 가치론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 짐멜 가치론의 지성사적 배경 - 신칸트학파
리케르트는 문화를 자연과 달리 보편타당한 가치를 지니거나 이와 관계를 지니는 사물이나 대상의 총합이라고 정의하며, 또한 문화과학적 인식은 자연과학적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가치이념에 연관된 주체의 정신적 행위, 즉 가치연관적인 정신적 행위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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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리케르트가 보기에는 생물학적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가치와 전혀 무관하며, 단지 자체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 문화에 봉사해야 한다. 삶이란 결국 "조건" 또는 "조건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기술은 삶에 봉사한다. 다시 말해 문화가치를 위한 조건에 봉사한다. 결국 기술은 "수단을 위한 수단" 또는 "조건재(條件財)를 위한 조건재"에 다름 아니다.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리케르트의 눈에는 오로지 "의사(擬似)가치"로 보일 따름이다.


#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의 고전적인 가치론은 객관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생산비용에서, 그리고 마르크스는 사회적 노동에서 경제가치의 근거를 찾는다. 이에 반해 한계효용학파의 창시자인 멩거는 1871년에 출간되, 경제학사에서 큰 획을 긋는 저서인 『국민경제학 원리』에서 주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치론을 제시한다.
가치란 멩거에 의하면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재화가 자신의 삶과 복지를 유지하는데 지니는 의미"에 대해 내리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이다.  ... 이제 객관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고전적 가치론이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가치론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 다만 경제가치만을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접근방식에 의존하는 개별과학의 분석대상으로 삼을 따름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케르트로 대표되는 신칸트학파의 경우는 범접할 수 없는 보편타당성을 가진 고유한 가치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간은 그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가치세계 속에서 단지 그 속에 갖혀 사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무력한 존재처럼 그려진다. 반면, 멩거로 대표되는 한계효용학파의 경우는 개개인의 입장으로 가치를 환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칸트학파의 경우는 다분히 당시 국가주의적 학문풍토를 반영하고 있다. 반면 멩거의 한계효용학파의 입장에서는 당시 중시되던 개인의 입장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짐멜의 가치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그 속에서 어떤 시대의 징후들을 읽어낼 수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짐멜의 가치론은 멩거의 주장과 흡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짐멜에게 모든 논의는 (주체와 객체의)상호작용속에서, 길항작용 속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결국 가치에 대한 정의 또한 어느 한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쨋든, 이러한 두 입장과 당시의 시대상황은 다음과 같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 상대주의적 가치론을 위하여
그(짐멜)는 상대주의를 "전적으로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라고 정의한 바가 있다. 바로 이런 원리에서 "진리, 가치 및 객관성과 같은 중심개념들"이 도출된다고 짐멜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멜은 자신을 상대주의자라고 고백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이에 반해 신칸트학파는 상대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아니 심지어 경멸적인 입장을 취한다. ... 리케르트에 의하면 가치란 역사적이고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그래서 상대주의적인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신칸트학파의 가치론은 상대주의의 보급과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철학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칸트학파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서로 갈등하며 투쟁하던 당시의 세계적이고 대도시적인 분위기와 상반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학파는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봉건적이고 국가적인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옹호하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름아닌 신칸트학파가 비판하고 거부하는 분위기와 가치가 당시의 진정한 시대 정신을 형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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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사유의 전반에 걸쳐 의미를 지니는 상대주의는 곰페르츠에 의하면 "외부세계의 동일한 사물이 다양한 기관, 다양한 개인 또는 동일한 개인의 다양한 상태에 다양하게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또는 "인간발전의 한 시기에 적합하고 유익한 신념, 규정 및 제도가 다른 시기에는 불충분하고 유해하다는 더 심층적이고 불가결한 인식"을 상대주의라고 일컫는다.

여기에서 저자는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중 '가치'를 선택한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 당시의 분위기가 국가 주도의 체계 또는 종교 주도의 체계를 벗어나 점점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체계들이 폭발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짐멜의 가치에 대한 논의는 근대를 보여줄 수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근대에 와서 절대주의 세계관이 붕괴하고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부상했다는 것을 가치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에 풍경 제목을 '상대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확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짐멜의 가치론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베버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가치의 다신주의에 대해 잠깐, 아니 길~게 언급한다.

# 가치상대주의와 가치다신주의 - 짐멜과 베버
베버는 단 한 번도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명백한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글을 보면 그는 객체에 대한 주체의 주관적이고 의식적인 입장과 표상을 가치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 이러한 가치론에 입각해서 보면, 개인의 행위는 초월적이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가치에 준거하고 이를 지향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개인이 어느 가치가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해 중요하고 의의를 지닌다고 표상하기 때문에 이 가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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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다신주의는 베버의 분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문화사적 과정의 결과이다. 장기간에 걸친 그리고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진행된 탈주술화와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 종교는 이제 모든 삶의 질서와 세력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행위에 대해 지향성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의의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상응해 다양한 삶의 질서와 세력-이를테면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윤리적, 미학적 그리고 에로스적인 삶의 질서와 세력-이 자체적으로 고유한 문화가치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사회적 공간에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인 힘의 형태로 그들의 무덤에서 나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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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에 특유한 현상인 다신주의적 가치들의 대립, 경쟁, 모순 및 투쟁은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입장을 요구하며, 그에게 언제나 신과 악마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의 삶과 숙명은 "궁극적 결단의 연속"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바로 이 결단을 통해서 개인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서 자신의 개별행위를 의식적으로 영위하고 삶 전체를 의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베버에 대해서는 그냥 간략하게 개설서 몇 편과 '직업으로서의 학문' 등의 소논문 몇 편을 읽은 게 전부이다. 하지만 난 짐멜의 가치에 대한 논의에 앞서 왜 베버가 먼저 등장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동시대인이라고 하지만 베버보다 짐멜이 훨씬 먼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엄밀히 말하자면 베버가 짐멜에게 영향받은 바가 더 크지 않겠는가? 글의 배치는 마치 짐멜이 베버의 가치 다신주의에 영향을 받아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펼쳐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게 배치되어 있다. 물론, 누가 먼저고 나중이냐 문제를 따지는 게 나한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김덕영 선생의 아래와 같은 글이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 경제학적 가치론의 차안과 피안에서
짐멜은 가치와 더불어 협소하게 경제학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에 걸친 합리화와 분화 과정의 결과이자 근대 이후의 문화사적 특성인 다양한 가치들의 존재, 즉 다신주의적 가치들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현대인은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다양한 가치들 가운데에서 특정한 가치를 자신의 신으로 인정하고 바로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숙명에 처하게 되었다. 과학, 미학, 사랑, 윤리나 종교와 같이 잘 알려진 가치 외에도 심지어 가난과 같은 것 또한 가치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영혼의 구원이 최상의 가치로 추구되는 곳에서 그러한데, 이는 원래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구원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삶과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빈곤이 일종의 자체적으로 고유한 가치로 승화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짐멜의 가치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보자. 사실 이 장에서는 유독 베버의 논의가 길게 차지해서 좀 김이 샌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짐멜을 이해하는 핵심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심리학적 가치론
짐멜에 의하면 주체와 객체는 원래 미분리상태로 존재한다. 이는 개별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일반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논리이다. 그러다가 욕구를 지닌 주체의 심리학적 욕망이 생기면서 이것과 객체 사이의 미분리 상태가 극복되는데, 그 결과로 주체와 객체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에 의해 상호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두 범주와 세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주체는 의식적으로 객체가 자신에 대해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객체의 원리는 사물, 인간, 관계 또는 현상이나 과정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타당성을 지닌다. 아니 형이상학적 이념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네번째 풍경'개인'에서 인격에 대한 설명 부분을 인용할 때 위의 내용은 자세하게 언급했었다. 짐작하겠지만 그의 모든 형식에 대한 설명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염두해 두어야 할 부분은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데 있어서 주체가 '의식적으로 객체가 자신에 대해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한다는 대목이다. 이러한 주체의 판단이 전제된 뒤에라야  경제학 원론 첫 장에서 마주하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설명, 즉 '재화 자체가 가진 질적 유용성과 희소성'이 덧붙여져 '경제적 가치'가 형성된다고 본다.  

실제로 객체의 가치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체가 위와 같은 심리학적 근원과 기초에 터 해서 객체를 지향한 목적행위를 행해야 한다. 바로 이 행위를 통해 인간주체는 자신과 객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장애 또는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 ...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 짐멜은 가치와 목적을 "단지 동일한 현상의 상이한 측면들"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론적이고 정서적 의미에 입각해서 보면 가치인 사실표상이 실천적이고 의지적인 의미에 입각해서 보면 목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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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주체와 욕망되는 객체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큰가 하는 문제, 그리고 이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가 하는 문제-이들 문제는 모두 욕망되는 객체의 희소성과 희귀성에 달려 있다. 객체가 주체의 삶에 대해 지니는 의미와 더불어, 즉 주관적인 기제와 더불어 희소성과 희귀성이라는 객관적 기제가 경제적 재화나 상품의 가치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체의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은 언제인가? 예를 들어보자. 어느 농부가 밥그릇이 필요해서 나무를 잘라 그 나무속을 파서 밥그릇을 만들었다. 그에게 그는 단지 삶에서 필요해서 밥그릇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 때에는 밥그릇 자체가 어떠한 거리감과 욕망도 유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의 손과 같은 하나의 통합된 연장일 뿐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냥꾼이 와서 그 밥그릇을 자기가 잡은 토끼 한 마리와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이 변할 것인가?  

생산과 교환의 두 범주 모두는 "포기해서-또는 양도해서-비게 된 자리를 더 커다란 가치를 지닌 객체로 채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행위에 의해 "그 이전에 욕구를 지니고 향유하는 자아와 융합되어 있던 객체가 이로부터 분리되면서 가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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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에 의하면 경제는 교환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여러 삶의 영역들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영영으로 발전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 역시 주체와 자연 사이에 진행되는 교환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있다. ... 교환이란 "개인들 사이의 삶을 구성하는 형식과 기능의 일종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유용성과 희소성이라고 명명하는 사물의 질적, 양적인 특성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누군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물건 또는 다른 어떤 명성 등을 얻기 위해서는 교환이라는 방법 외에도 강탈이라는 방법도 있고, 심지어 증여(인류학자들은 '선물'이라고 한다)를 통하는 방법도 있다. 동물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강한자가 약한자의 것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시 부족 공동체에서는 '증여'가 주된 경제적 행위인 곳도 있다고 인류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짐멜은 이러한 인간만의 독특한 행위인 '교환'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은 교환하는 동물'이라고 『돈의 철학』어느 곳에선가 표현한 걸로 기억하는데 읽은 지 오래되어 확신할 수 없다. ^^;
다시 그 농부에게로 되돌아가보자. 농부는 밥그릇을 토끼 한 마리와 교환할 지를 가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밥그릇은 또 만들어서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며칠분 양식이 될 토끼와 바꾸는 것을 흔쾌히 허락한다. 이렇게 교환에 맛이 들린 농부는 자신이 밥그릇을 만들면서 사람들과 교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농부는 자신이 만든 밥그릇이 점점 어느정도의 가치를 갖는지를 터득하게 된다. 밥그릇의 가치는 이제 점점 객관화되고, 농부의 밥그릇에 대한 생각 역시 그 가치만큼 객관화된다.

# 주관주의적 가치론과 객관주의적 가치론을 넘어서
가치가 지니는 객관성은 짐멜이 보기에 다름 아닌 교환에 있다. 왜냐하면 주관적 가치평가와 의미 부여를 상호주관적이고 따라서 초주관적인 차원과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바로 교환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교환을 통해 주관적 가치는 일반화되고 주관적 영혼은 객관화되는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생동하는 상호작용의 총합으로서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교환관계의 표현으로서의 경제가치 역시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마찬가지로 결코 추상적이지는 않다. 여기에서 가치가 보편적인 것은, 가치가 개별인간을 초월해서 상호주관적이고 초주관적인 타당성과 효력을 지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에 반해 가치가 추상적이지 않은 것은, 가치는 결코 경험세계에서의 실제적인 삶과 행위를 초월하는 그 어떠한 더 높은 범주나 세계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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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은 개별적인 사물과 그것이 인간에 대해 지니는 의미로 하여금 단일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만, 다른 한편 추상적인 것의 영역이 아니라 생동하는 상호작용으로 고양시킨다. 그런데 상호작용은 말하자면 경제가치의 몸체이다. 우리는 아직도 어떤 대상을 정확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특성에 입각해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경제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는 어디까지나 상호작용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덕영 선생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교환이라는 무수한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어, 이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가 된 현대의 시장 메카니즘을 살펴본다. 가치와 가격의 관계, 그리고 그 가격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시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그런 가치세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가? 즉, 자신의 노동력을 투여해서 만든 상품이 전적으로 양(가격)에 의해 판정되는 연속선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인가?  

# 가치, 가격 그리고 화폐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 교환관계에 있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내리는 판단에 의해 구성되지만, 다름아닌 가격을 통해 양적인 크기로 표현된다.
......
우리는 흔히 가치와 가격이 일치하지 않음을 관찰한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매우 근본적인 경제학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짐멜이 보기에- 다음과 같은 해결을 제시한다. 가치란 재화나 상품 생산에 투자된 객관적인 노동력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서, 가격과 가치의 불일치는 교환에 참여한 한쪽이 다른 쪽에 비해 직접적으로 재화나 상품에 대상화된 노동력을 더 많이 제공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바꾸어 말해 많은 양의 노동력이 투자된 재화나 상품을 적은 양의 노동력이 투자된 재화나 상품과 교환하는 경우 가격과 가치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짐멜은 자신의 특유한 교환의 개념에 준거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의 입장에 의거해 가격과 가치의 불일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교환이야말로 가치가 발생하는 근원인데, 여기에는 단순히 노동력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절박한 욕구의 충족, 기회, 기만, 독점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과 같은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포함된다. 언뜻 가격과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더 넓고 주관적인 의미에서 보면 (…) 주는 가치와 받는 가치의 등가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가격과 가치의 차이를 가능케 하는 노동력이라는 통일적 규범가치는 교환에서 발생한다.

뭐야. 그러면 실제로 가치를 만드는 것은 노동력의 양이 주가 아니라는 얘기도 될 수 있잖아. 이런 점에서 짐멜의 글은 참 부루주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짐멜은 나아가 가격이 형성되는 것은 노동력의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최하위의 가난한 계층이 갖는 욕구에 의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노동력이 그 가격보다 훨씬 많이 투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수적인 재화의 구입에 있어서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그 결과는...

물질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한 사람은 일상적인 경제조건과 제약을 벗어나 시간과 에너지를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에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돈은 단순히 가치를 담지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고유한 가치로서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해체시켜버린다는 사실을 짐멜은 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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읔, 어렵다. 지금까지 풍경들 중 가장 어려운 풍경이 이 '가치'에 대한 글이다. 아마도 내가 경제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에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돈의 철학』을 재미있게 읽던 중 마주친 벽도 아마 이 가격에 대한 논의부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부분인 '가치, 가격 그리고 화폐'의 전개는 사실 너무 그 진행이 빨라, 마치 매끄러운 경사면이 아닌 끊어진 사다리를 타는 느낌이다. 뭔가 잡힐 듯 하면서도 무언가 내 지적 시야가 뿌옇고 답답해진다. 모든 사물의 가치는 그 질적 특성과 함께 교환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데, 이것이 양화된 표현인 가격의 경우에는 우리(또는 막스의 논의를 따르는 자들)가 흔히 알고 있었던 노동력의 투여량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노동이 별로 투여되지 않은 물품이 비싼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이라는 것은 그 투여된 노동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가난한 계층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선에서 책정이 되고, 그렇기에 돈 많은 사람들은 (주관적으로)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들 부자는 물질적 생존보다는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즉 삶의 질적인 부분에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돈이 고유한 가치가 되어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해체시켜버린다는 짐멜의 논의를 왜 강조한 걸까? 
휴~ 누군가가 이 풍경을 알기 쉽게 적어 나에게 트랙백이라도 걸어줬으면 좋겠다. 며칠을 생각했는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중에 이 풍경은 다시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물론, 이전의 모든 풍경도 충분히 묘사하지 못해 답답함이 있었는데... 이번 풍경은 나의 지적 빈약함을 여실없이 드러내주는 풍경이다. 

함께 듣는 음악은  Cesaria Evora의 『Miss Perfumado』(1992) 앨범 중 7번 곡 "Miss Perfumado"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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