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글 /임희선 번역 / 북스토리(2006)


가끔은 분위기 있는 찻집에 앉아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지만 은은한 향을 음미하면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고 싶다. 물론, 음악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곳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얼마 전 눈큰이와 퇴근하면서 회사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호강한 배를 텅텅 치면서 "우리 어디 가서 차 한 잔 하면서 책 읽을까?"하고 제안했고, 우리는 한참을 걸어 청계천 주변에 있는 커피 볶는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한 커피숍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한 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나는 눈큰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살면서 시소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매일매일이 불안정한 날이 있었어?"
마주 앉아 책 읽던 눈큰이는 잠깐 큰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좌우로 흔든다.
"난 있는데?"
"언제?"
"음 있었어"
"그게 언제인데? 왜 불안불안했는데..."
"음... 결혼하기 전 자기랑 밤늦도록 데이트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 잠들기 전 늘 또 보고 싶어져서 가슴이 콩닥콩닥거렸지"

뭔 소리인고 하니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집 "Girl" 중 '띠동갑'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었다. 
# 띠동갑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시소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매일이 불안정하다.

뭐, 닦살 돋는 이야기였지만 잠시 이 한 구절을 통해 과거 남몰래(!) 연애했던 때를 추억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냥 같이 환하게 웃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물론, 직장인의 한계때문인지 책을 읽다가 나는 그 찻집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은 일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접어들때까지 모든 최악의 상황들을 상정한다. 그리고 소설이니까 가능한 최고의 멋진 한 방으로 그 파국을 유쾌하게 해결한다. 내가 읽었던 '공중그네'도 '남쪽으로 튀어'도 기본적인 전개는 이런 식이었다. 그것이 단편이든, 장편이든간에 말이다. 이 책 "걸"도 직장 여성들(대부분이 30대 초, 중반이다)이 회사생활에서 겪을법한 사연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한 개인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사건들과 갈등상황이 강도를 더해가다가 유쾌하게 멋진 선택으로 사람을 흐뭇하게 만드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한다. 그 최종 선택의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아파트
지금 이 순간, 자기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직업적인 위기나 인간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물론, 현실에서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쾌락을 제공한다. 그냥 이 작가 직장생활하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 히로
"여자랑 일하기 싫으면 스모협회나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 그래. 안 그러면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 있을 테니까. 보호받아야 하는 가냘픈 여자애가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몫을 하는 여성들 말이야." 

#걸
평생 여자애. 아마 자기도 그 길을 가게 되겠구나 하고 유키코는 생각했다. 앞으로 결혼을 해도, 그리고 아이를 낳아도, 그렇게 살건 말건 내 마음이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
기분이 더 좋아졌다. 자기 인생에 대해 누군가가 '잘 살고 있잖아' 하고 칭찬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다른 측면 한 가지!
후배 하나가 이 책을 읽고 어쩜 남자 작가가 직장 여성, 특히 30대 여성의 심리를 이리 잘 묘사했을까 놀라워 했던 글을 읽고 눈큰이의 심리를 파악하여 좀 더 편안한(ㅋ)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비교적 꼼꼼히 내가 몰랐던 여성들의 심리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모든 여성들을 똑같은 잣대로 보는 것은 금물이겠지? 
그렇지만 이왕 찾은거...
#띠동갑
현실을 마주보는 게 싫어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남자를 짝사랑하며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요즘 눈큰이가 미혼의 젊은 직장 동료들을 보면 좋아라 입이 찢어진다. 으~~ 설마~~

# 히로
신기하게도 외모를 바꿨더니 기분도 달라졌다. 한번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래. 이 부분은 남자인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는데, 눈큰이의 경우도 가족이라는 틀때문에 매번 갈등하고 있지만 외모나 옷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간혹 눈큰이가 회사일로, 또는 사람관계로 힘들어 할 때 이런 방식으로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것이, 괜히 토론한답시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화를 낼 지 몰라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라고 떠들다가 그녀의 기분을 더 다운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일 거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나저나 남자들은 왜 항상 분석적으로,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는 걸까? 심정적으로 동조해주고, 감정적으로 위로를 해 주면 되는 것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나를 만날 때마다 늘상 드는 의문이다.

# 워킹맘
여자는 육아만 내세우면 주위 사람들이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신 시절에 그런 꼴보기 싫은 여자들을 많이 봐왔다. 그래서 자기는 그런 짓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은 어린 자녀를 둔 직장 여성들의 퇴근에 대한 강박관념을 이해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가끔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것을 너무 과도하게 요구하면서 막상 놀러 갈 일이 있을 때는 어느 순간 자식 얘기는 온데간데 없어지는 모습을 보면 좀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었다. 눈큰이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자신도 가끔 그런 '아줌마' 부대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가끔이다. 요즘 눈큰이와 함께 공동육아를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이제 내년부터는 퇴근 후에는 아이를 데릴러 가기 위해 나와 눈큰이 또한 퇴근시간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뭐. 나야 대인관계, 특히 남자들과의 술자리를 통한 대인관계 형성에 완전 무관심자라서 현재로서는 특별히 걱정되는 일은 아니지만, 엄마라는 입장에 있는 눈큰이로서는 점점 이 육아와 일의 병행이 힘들어 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언젠가는 눈큰이도 이렇게 외쳐될 것이다.

# 워킹맘
나는 먹여 살릴 자식이 있어서 너처럼 젊은 척하고 다닐 여유가 없단 말이다.

물론, 남자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다. ^^

# 히로
"남자 체면 좀 세워줘. 남자들은 아주 단순하다고.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해요, 하는 식으로 다가가면 없는 힘까지 쥐어짜서 해주려고 한단 말이야."

나 스스로도 가끔 느끼는 거지만 남자들은 옆에서 쬐끔만 격려해주면 금방 들뜬다. 아닌가? 일반화시킬 수는 물론 없지만, 옆에 있는 눈큰이는 틈만 나면 하는 말이 "에휴~ 내가 애를 둘 키워"이다. 

무엇보다 히데오의 소설은 정말 술술 읽힌다. 물론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이 '걸'의 단편들은 때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구석도 있었다. 

엠에센으로 여자후배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했더니, 일본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내가 읽은 일본 소설 작가라고 해봤자 미시마 유키오, 가네시로 가즈키, 그리고 이 오쿠다 히데오 이 정도가 아닌가 싶다. 미시마 유키오를 제외한 두 양반의 글은 글 자체가 짧고 가볍게 스케치하듯이, 쨉을 날리듯이 날렵하고 경쾌하다. 그래서 '가볍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도 사실 이들 소설을 접할 때는 어떤 생각보다는 정말 정신없이 달리는 질주감이랄까? 속도감 때문에 읽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잠시 그 속도감에 취해있을 때 간간이 접해지는 구절들이 가슴을 저리게 만들 때도 있고, 깊은 공감을 갖게 할 때도 있다. 

# 히로
경쟁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것도 있다. 소비문명사회에서는 뒤처질지 모르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어떤 생활에서 행복을 찾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 걸
"있잖아. 우리도 우울하긴 마찬가지야." 유키코가 말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고, 자유롭다고 해봐야 불편한 일들만 잔뜩 있고."
... "사실, 영원히 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초조하고 불안한 건 오히려 우리 쪽이야."
"정말 그래?"
"그럼, 아마 다들 불안해하고 있을 거고, 인생의 반은 우울하게 되어 있는 걸 거야.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아이가 있건 없건 마찬가지야." 

# 아파트
"결국 자기 혼자서 나이에 얽매여 이미 늦었다는 둥, 좀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둥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게 제일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
......
최근 몇 년 동안 자기 스스로 자기 세계를 좁히고 있었다.
 ......
개혁이니 능력 위주니 말로는 그래도 결국은 정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
모델하우스에서 돌아오면 유카리는 항상 마음이 어두웠다. 즐거워야 할 집구경인데도 우울해졌다. 지침서에는 '아파트 구입은 혼전 우울증과 비슷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꿈과 함께 불안도 커지기 때문이다. 잘될 수 있을까 하고.

# 워킹맘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상처를 입는다. 약자 보호를 소리 높여 외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려 주는 것은 고맙다. 배려란 작은 친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년에 몇 편 정도 읽어주는 것은 무방할 듯하다. ^^
 
우리의 워킹맘 눈큰이는 오늘 필이 받았다고 한다. 방금 글을 막 마무리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 필 받아서 홍대로 이동중야. 데릴러 올 수 있어?"
"그래 갈께요."
사실 오늘 나랑 오래간만에 데이트 하기로 했는데... 친구들이 더 끌리는 날이었나 보다. 끙...

함께 듣는 음악은 Ketil Bjornstad & David Darling의 연주곡 "The River"(1997) 앨범의 1번 곡 "The RiverⅠ"이다. 

 


출처 : 안토니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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