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그러니깐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강진과 함께 쓰나미가 사람들의 삶터를 순식간에 덮쳤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인간의 오만함이 불러온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하면서 재앙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 세계인들은 과학기술집단들과 기업과 정부가 안전하다고 외쳐왔던 원자력발전소가 인류에게 큰 재앙을 안길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렇게 짧게 기술했지만, 사실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렇게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기술문명을 흠뻑 뒤집어 쓴 채 한 소비자로 전락한 내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생겼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띤 책 하나가 바로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였다.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으면서 저자가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는 독자 유형에 눈이 갔다.
- 광고산업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는 소비자 ...... -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바로 내가 느끼고 있던 불편함과 위기감을 그대로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찰없는 삶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일종의 해방감 또한 맛볼 수 있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 책에서 우리의 현재 삶이 커다란 빙산을 향해 가고 있지만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많은 선지자들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우리가 빙산을 향해 전속력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와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막연히 믿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배에 몸을 싣고 하던 일을, 욕망하던 것들을 계속 쫓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다 잘 될거야'라고 우리를 얼러대는 존재는 다름아닌 국가이다. 그러나 20세기 국가는 국민들을 지켜주기는 커녕 오히려 핍박하고 절대폭력을 휘드르며 자국민의 대량학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국가를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말이다.
20세기만큼 폭력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가 많았던 100년간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기록입니다. 그리고 누가 가장 많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면, 개인도 아니고, 마피아도 아니고, 조직깡패도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입니다. ... 하와이대학의 럼멜이라는 학자가 쓴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인간의 수는 이 100년 동안 203,319,000, 즉 2억명에 달합니다. ... 살해된 것은 외국인보다도 자국민 쪽이 압도적으로 다수입니다. 럼멜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약 2억명 가운데 129,547,000, 약 1억 3,000만명이 자국민이라는 것입니다. ...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 전쟁이었습니다.
경제성장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외쳐대는 금융가와 자본가들이 갖고 있는 세계화의 논리 또한 그 연원을 따져보면 서양의 경제제도에 들어 있지 않은 나라를 '미개발 국가'라 명명하면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선진국의 자본을 들여와 해당 국가의 전통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상품시장으로 만들어 온 역사에 기대어 있다. 한미 FTA는 바로 그러한 '개발 착취'에 대한 결정판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경제발전은 한 국가 내의 빈부의 차를 심화시키고, 심지어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빈부의 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커다란 원인이 된다.
경제발전은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원인의 하나입니다. 물론 빈부의 차이는 그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으로 비로소 빈부의 차이가 생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본래 있었던 빈부의 차를 경제발전이 합리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형태로 고쳐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빈곤의 근대화'란 곧 '빈곤의 합리화'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주장한다. 더 이상 경제성장의 논리에 현혹되지 말라고. '제로성장' 다시 말해 주체적으로 '탈성장'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에 쫓겨가며 행복을 미래에 저당잡히고 힘겹게 사는 삶을 벗어나는 것, 주위사람들 것을 뺏아가면서 부를 쫓지 않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결국 자연의 자원을 파괴하고 빈자를 더욱 수탈하면서 부자인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노인들만 사는 가난한 시골 농촌 마을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방사능 누출의 위험을 전가하면서 부의 대명사인 대도시 사람들은 저 멀리서 펑펑 에너지를 물쓰듯 하는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깨달아야 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은 그 경제성장, 기술발전의 거짓된 논리가 부자건 가난한 사람들이건 모두를 파멸로 몰고 온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과잉발전한 나라를 ...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나라들이 경제성장을 계속해왔지만 그 발전이 그 사회의 안전보장이나 참다운 의미의 풍요, 쾌락, 행복과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 무관심, 목적 상실, 우울, 폭력. 꿈이 없는 젊은이나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에는 많이 있고, 그들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많이 진행된 곳일수록 그런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 확실히 성장사회에는 즐길 수 있는 기계나 오락 따위가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나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 기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은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 혹은 개개인 모두 매우 뒤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항발전'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소비에 따른 행복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뜻의 행복주의.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느끼는 능력, 그것을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삶에서 여유를 되찾고, 과거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것처럼 자연과 뭍생명들과 공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수탈해가면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펑펑 소비하는 소비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멈추고 직접 생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탈에너지, 탈소비, 탈성장으로 우리가 가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며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채워주는 공동체 생활을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
이러한 삶이 선택이 아닌 인류 재앙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의무사항이 될 날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석유를 포함한 화석연료의 가파른 고갈을 예언하고 있고, 석유화학비료와 농약이 중심이 된 '녹색혁명'은 결국 온 지구의 농토를 황폐화하고 사막화시키고 있으며, 대기 오염으로 인한 온실효과는 일주일에 남한 크기만한 빙하를 녹게 만들어 바다 수위를 점점 높여가게 하고 있다. 그 어떤 지표도 인간의 아름다운 종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 늦은 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반이다. 우리가 탈성장을 삶의 중심에 놓고 다시 현재의 우리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면 우리는 금방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지구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깨닫고 함께 뭉쳐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신문이나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정치뉴스를 보면서 무기력한 채로 직장에 가서 끝이 보이지 않는 부를 쫓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협력하는 존재 나아가 활력있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 지금 시급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을 접하고 나는 그러한 삶에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현재 어렴풋하지만 내가 구하고 있는 답은 바로 귀농이다.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에너지에 덜 의존하고 소비자로서가 아닌 생산자의 삶을 살아가고, 나 스스로 소박하게 살며 여유 시간을 공동체 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사는 삶... 이것이 내가 귀농을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런 삶을 살 때 나는 더 이상 광고산업에 굴복당하는 바보 소비자가 아닐 것이며, 세계의 자연계와 생명에 의존해서 그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우리 후세에게 물려주는 희망을 발견할 것이며, 위기가 닥치더라도 나 스스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그 위기를 현명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이 책은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책이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제3장 자연이 남아있다면 더 발전할 수 있는가 트루먼의 취임연설은 엄청나게 규모가 큰 발언입니다. 먼저 서양의 경제제도에 들어있지 않은 나라는 모두 '미개발'국가라 부릅니다. '미개발'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유럽과 미국 이외의 모든 문화, 모든 민족, 모든 사회, 모든 경제제도가 들어갑니다. ... '미개발'의 공통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아니라 자기네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유럽이나 미국의 경제제도에 들어와 있지 않은 그 '결여'입니다. ...... 트루먼의 연설로 돌아갑시다. ... 우선 2차 세계대전 직후입니다. 식민지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유엔헌장에도 쓰여지고, 그것이 새로운 상식이 됐던 때였습니다. ... 한편 ... 가장 힘이 있었던 것이 미합중국이었습니다. 이전 제국들의 식민지였던 '남(南)'의 국가들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미국은 패권을 넘겨받은 단계였습니다. ... 하지만 옛 식민지 지배방식은 이제 사용할 수 없는 단계. 거기서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 세번째는 ... '냉전'을 어디서 하느냐 - 제3세계입니다. 제3세계의 나라에서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이 힘을 가지느냐 하는 격렬한 경쟁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또 하나... 전쟁이 끝난 단계에서 미국은 투자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발전'이라고 하면 그것은 흡사 각 문화나 문명, 사회 속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이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꽃이 피는 듯한, 아이가 성장하는 듯한,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는 듯한 어투입니다. '착취'라는 말과 상당히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 바깥에서 자본이 들어와 자연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문화를 바꾸고 착취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발전'이라 부르면 그것은 그 사회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땅히 그래야 할 과정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정간섭이 아니라 발전, 착취가 아니라 발전, 폭력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전. 어떤 문화, 어떤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해방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식민지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경제발전이라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잘돼가고 있는 곳은 발전돼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은 '발전도상국' 혹은 '아직 발전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으로 나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발전한 나라'나 '발전 도상국'을 모두 발전이라는 과정이 만든 세계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 경제발전이란 '슬럼 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 경제발전은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원인의 하나입니다. 물론 빈부의 차이는 그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으로 비로소 빈부의 차이가 생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본래 있었던 빈부의 차를 경제발전이 합리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형태로 고쳐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빈곤의 근대화'란 곧 '빈곤의 합리화'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 또한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한 말입니다. 그걸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장이 마이너스라는 것은 괴상한 말입니다.
'개발'(development) 이라는 용어가 47년 트루먼 선언에 등장한 이후 이전의 식민지 국가를 착취하는 연장선상에서 자신들의 남아도는 상품을 팔게 하기 위한 산업경제시스템으로 일원화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용어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던 차에 우리가 정말 심각하게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죠. ^^
부자가 되려고 하면 원칙적으로 두가지 방법... 하나는 자신이 돈을 모으는 방법... 다른 하나는 주위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부자란 일종의 사회적인 관계, 곧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전보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고 해도 사회는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경제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플레이션입니다. ...... 지금까지 존재했던 적이 없는 상품이 처음에는 사치품으로서 등장합니다. 살 수 없는 사람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일로 속이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사회가 변하면 그 상품이 어느새 '있으면 좋은 것'에서 '없으면 곤란한 것'으로 변해가며 살 수 없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자동차가 좋은 예의 하나입니다. ... 1920년대까지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에서도 유수한 통근전차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것을 자동차회사가 사들였습니다. 그들은 차츰 전차를 줄여가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다가 마침내 적자라며 전차 운행을 모두 중지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미국 안의 철도나 노면 전차 회사를 매수하여 자동차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매우 폭력적인 역사입니다. 자유시장 속에서 자동차 문화가 성립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특히, 로스앤젤리스에서 어떻게 자동차가 대중화된 전차를 대체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글에서는 자본의 잔인한 이윤추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목조르면서 취하는 이윤추구의 모습은 또 다른 사례로 기록에 남겠지요.
백 년 전의 세계에서는 자급자족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 위에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착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빈곤을 ...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 경제발전의 정체입니다. ... 인간을 노동자로 만드는 것, ... 인간을 소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노동자나 소비자가 되게 하는 게 경제발전입니다. ......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 구조로 바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강신주 선생의 강의를 듣다가 그 분이 이런 사례를 들려주더군요. 옛날 식민지를 개척하러 떠났던 군함에서 제독이 한 섬에서 원주민들이 일하는 걸 봤는데, 그들은 변변한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힘들게 일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국에서 가져온 효율적인 농기구를 주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수확하겠거니 했는데, 정작 농기구를 주니 아주 좋아하면서 일하던 양을 절반으로 줄여 똑같은 양을 수확하더라는 거예요. 결국 그 제독은 이렇게 기록했다 합니다. '이 원주민들은 본성이 게을러 터졌다' 라고 말이지요. 냉장고라는 소유를 부추기는 기계가 개발되기 전에는 음식이 남아도 가질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딱 먹을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서로 나누는 풍습이 전 세계에 주를 이루었다고 하지요. 기술혁신, 경제 개발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이기적 유전자를 개발시켜 나가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요?
# 제4장 제로성장을 환영한다 요컨대 성장이 아니라 분배입니다. 정당한, 정의에 바탕을 둔 분배에서 해결을 찾자는 뜻입니다. ... 우리들은 빈부의 차이가 사회에 나타나면 그 해결을 정당한 분배에서 찾지 않고 경제성장에서 찾았습니다. 풍부한 파이를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고, 파이 그 자체를 크게 만들면 작은 조각도 그 나름대로 커질 테니 모두 만족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지금까지 미국정부가 진부하게 들릴 만큼 반복하여 이야기해온 내용입니다. ... 우선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지구 곧 자연환경은 커지지 않습니다. ... 그리고 세계경제시스템 그 자체의 구조에서 생각하면, 파이의 큰 부분은 어째서 크냐 하면 물론 작은 쪽의 것을 가로채고 있기 때문에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에 따라 작은 파이 조각도 커진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제 우리국민들에게 들으면 치를 떨게 만드는 용어 '낙수효과'. 이명박 정권이 등장할 때 바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을 통해 그 많은 이득이 더 고른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지요. 결국 끊임없이 작은 파이조각조차도 끌어가서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자본과 권력을 마주하고 당황하고 탄식하고 있지요. 그 연장선상에 세계 경제가 놓여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자원은 무한정 제공될 꺼라는 환상, 그 결과 우리가 맞닥트린 현실은 지구온난화, 생물 멸종, 사막화,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고갈입니다. 그리고 원자력... 이 것도 우라늄의 매장량이 40년도 채 안되어 고갈될 것이라고 합니다.
제로성장을 환영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정책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조, 곧 안전망 만들기를 목표로 삼습니다.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상호부조라고 할까, 예컨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살기 좋은 사회로 바꿔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 경쟁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혹은 병에라도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공포입니다. ... 그런 공포가 있다는 것은 사회의 안전구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사회란 기본적으로 그런 구조입니다. 즐겁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혹은 계속한다고 하기보다, ... 공포가 경쟁사회의 원동력입니다. 공포가 사회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질만의 풍요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 그리고 정의에 바탕을 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을 나는 잠정적으로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대항발전'이란 말에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곧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 대항발전의 첫째 목표는 곧 '줄이는 발전'입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는 것입니다. 각자가 경제활동에 쓰고 있는 시간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이는 겁니다. 대항발전의 두번째 목표는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자는 겁니다.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활동,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을 발전시킨다는 뜻입니다. 경제용어로 바꿔 말하면 교환가치가 높은 것을 줄이고 사용가치가 높은 것을 늘리는 과정입니다. ...... 생각해보면 동사는 자동사가 아니면 타통사라야 한다는 이 양자택일이 어거지입니다. ... 타동사도 자동사도 아닌 '대화적 동사' 혹은 '함께 산다(共生)'의 '함께(共)'를 이용하여 '공동사(共動詞)'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활동으로서 실제로 그런 활동이 분명히 있는 것이고, '대항발전'도 그런 활동이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도 없고, 남에게 시킬 일도 아니다, 같이 해야 합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 기본법도 발의가 되어 협동조합 관련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요. 물론, 저 또한 작은 단위에서의 협동조합 식의 운영방식이 훌륭한 삶의 대안이 되리라 봅니다. 바로 '공동사'로서 말이지요. 하지만 러미스가 말하는 '줄이는 발전'이 그 전제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협동조합에는 소비와 생산과 생활의 일치라는 논리가 들어가 있지만 바로 이 '줄이는 발전'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크게 강조되지 않는 듯하여 걱정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절제의 윤리라고 할까, 절약의 윤리를 유지해온 문화의 예는 꽤 있습니다. 경제발전 이전의 문화는 거의 그런 윤리를 유지해왓다고 해도 좋습니다. 절약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문화 말입니다. ... 과잉발전한 나라를 ...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나라들이 경제성장을 계속해왔지만 그 발전이 그 사회의 안전보장이나 참다운 의미의 풍요, 쾌락, 행복과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 무관심, 목적 상실, 우울, 폭력. 꿈이 없는 젊은이나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에는 많이 있고, 그들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많이 진행된 곳일수록 그런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 확실히 성장사회에는 즐길 수 있는 기계나 오락 따위가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나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 기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은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 혹은 개개인 모두 매우 뒤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항발전'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소비에 따른 행복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뜻의 행복주의.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느끼는 능력, 그것을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최근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 자살율, 각종 끔찍한 성폭력 사건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아이폰, 아이패드라는 디지털 기기가 손을 떠나지 않는 우리의 끔찍한풍경도... 과연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요?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고 시작해야 할까요.
사람이 인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생산수단을 삼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들은 두가지 중독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배워왔습니다. 하나는 일 중독. ... 다른 하나는 소비 중독. 돈을 내고 물건을 살 때, 곧 돈을 지불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을 불러옵니다. ... '대항발전'이 가진 목적의 하나는 그런 '인재'에서 보통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가 없는 즐거움을 되찾는 일입니다. 가계에 가서 CD를 사서 남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쪽이 더 즐겁습니다. 남의 춤을 보는 것보다는 직접 추는 쪽이 더 즐겁습니다. ...... 경제학에서 보거나 경영학에서 보거나 제품에는 교환가치가 있으면 좋고(팔리면 좋다), 사용가치(참 가치)가 있느냐 어떠냐는 관계가 없습니다. ... '대항발전'은 ... 의미없는 일 혹은 세계를 망치는 일, 돈밖에는 아무런 가치도 나오지 않는 그런 일을 조금씩 줄여가자는 것입니다. ... 오히려 자신이 바라지도 않는 일로 잔업까지 하면서 과로사 직전인데도 끊임없이 일을 하는 삶이야말로 금욕주의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일 중독은 목적이 없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 '대항발전'은 ... 사람이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텔레비전을 켜고 '문화'를 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창조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악기를 다룬다거나 직접 춤을 춘다거나 연극을 만들거나 합니다. ...... 시간은 돈이라는 프랭클린의 사고방식을 나는 '프랭클린 상대주의론'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것을 거꾸로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즉 "돈은 시간이다"라고. 경제발전의 논리는 '시간은 돈'이라는 논리입니다. 대항발전의 논리는 '돈은 시간'입니다. 풍요는 여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 '돈은 시간'이라 할 때의 그 '시간'은 더 생산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고 관리되고 있지 않은 시간, 자유시간,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 돈과 관계가 없는 이 귀중한 시간이 현대사회 속에는 매우 부족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이 달라진 게 있어요. 물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안 다닌지 오래되었고 주로 마을 생협이나, 동네에 있는 재래시장을 이용하고 있는 거야 뭐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소비와 유흥으로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한만큼 마을 사람들과 책읽기 모임도 하고, 또 어린이집 아빠들과 함께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CD를 아주 안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문화를 창조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무언가를 함께 읽고 이야기하고, 함께 배우고 연주한다는 것의 기쁨은 아마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책 모임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2명으로 시작한 책모임이 최근에는 10명까지 늘었고, 2주에 한 번씩 하는 책모임인데도 빠지는 분들이 1년동안에 한 분 정도 피치못할 사정으로 1회 빠진 게 다랍니다. 이것은 자발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 제5장.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즉 사회 속의 기본적 경향에 대해서 자신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꿀 수 없는 선로에 타고 있는 느낌이라든가, 장래는 어쩔 수 없다, 지금 향하고 있는 장래가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마치 운명처럼 결정되어 버린 것 같다 - 이러한 식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는 민중 또는 인민에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늘상 경험하는 일이지요. 바로 우리가 (실제로는 전혀 양도될 수 없는) 주권을 대의 민주주의라 하며 양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오늘날 민주주의는 하나의 기의가 없는 상징에 불과합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과 권력자 중에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표날을 제외하면 '두고보자 5년 후에'를 외치지요. ㅜㅜ
민주주의에서 만약 대표를 뽑는다고 한다면, 즉 민주적으로 대표를 뽑는다면, 그것은 제비뽑기라야 합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비로 뽑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눈에 뜨이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이 선출되는 게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굴도 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민주적인가... 하나는 시민이라면 전원이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고, 그래서 누구라도 시민이라면 대표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언제든 자기 차례가 될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런 식으로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은 뽑혔다는 것에 대하여 뻐길 이유가 없습니다. ... 따라서 정치가의 타락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면 곧바로 제비뽑기로 결정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뽑히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이 장기적으로 권력을 쥐어 점차 타락해갈 가능성도 작습니다.
사회의 시스템이 복잡해 질수록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정치가도 정치학자들도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투표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게 되겠지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자기 가정, 자기 일터, 자기 마을공동체부터 직접민주주의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부단한 노력을 할 때에만 무기력한 민주주의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비록 어쩔 수 없이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지도자를 뽑더라도 현명한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러미스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세가지 체계, 즉 정치 체제, 군사체제, 경제 체제를 이야기합니다. 정치는 위에서 살펴보았구요. 이제는 군사체제와 경제체제를 간략하게 살펴볼까요?
군사행동이라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서 상대방을 자신의 의사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내 의사에 따르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는 것이 군사행동의 기본인 까닭에, 그것은 당연히 민주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 군사조직은 기본적으로, 정치용어로 말하면, 독재입니다. ... 군대조직의 또하나의 특징은 각 병사, 개인의 일상생활의 세밀한 곳까지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전체주의 조직인 것이비니다. 사상으로부터 일상생활,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스케줄, 전부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폭력에 의해서 관리됩니다. ... 전쟁의 가능성, 그리고 군대조직의 존재는 언제나 민주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정신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이 됩니다. ...... 주식회사 조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지만,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은 사회에 여가, 자유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가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 정치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근무시간 이외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로운 공공영역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그러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 자유로운 공공영역을 그리스어로는 '아고라'라고 부릅니다. ... 따라서 노예제가 필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는 적혀있습니다. ... 노예란 여가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회는 어떠한가,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근무시간 이외에 거의 틈이 없는 상태가 일상이 되어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노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의 경제적인 신체는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입니다.
'임금 더 안줘도 돼! 나 여기까지만 일하고 나머지는 가족과 함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보낼래'라고 외쳐야 합니다. 한국사회처럼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빨리 명퇴하기 전에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만큼 긁어모아야 살 수 있다는 논리가 무비판적으로 고삐잡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밟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사실, 저는 이런 서울이라는 곳이 풍기는 분위기에 지쳤습니다. ㅠㅠ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일들을 살펴볼까요?
모든 경제적인 힘, 즉 부는 노동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노동에 의해 자본가의 힘, 자본가의 자본 그것을 생산합니다. 노동자가 노동함으로써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함으로서 자신을 관리하고,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을 억합하는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하는, 심히 역설적인 상황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맑스는 그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입니다. ...... 히스테리에 가까운 선전이나 상업광고를 보고 있으면, 소비자가 물건을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기업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가 잘 이해됩니다. ... 자신의 양심이나 생활방식에 합치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는 회사(저임금 노동자를 착취한다,, 환경을 파괴한다, 무기를 생산한다, 여성을 차별한다 등등)의 상품을 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감성이 상식이 된다면 굉장히 큰 힘이 될 것입니다. ... 상업광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쓸데없는 것을 사도록 설득하려는 것으로, "텔레비전의 상업광고에 나오는 상품은 사지 않는다"는 큰 규칙을 따르면 거의 틀립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개인적의 문화적 역할인데, 지금의 문화가 '소비문화', '과로사 문화', '자동차 문화', '대량 쓰레기 문화', '원자력 문화', '정치무관심의 문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문화' 등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있어야 할 문화적 과제의 윤곽이 대체로 드러납니다.
놀라운 일은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에는 조만간 '탈소비문화'가 대세가 될 거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자발적인 비소비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거죠. 그걸 간파하고 있는 자본이 또 어디에 빨대를 갖다 될 지 심히 걱정됩니다.
재미있는 일상 얘기를 하나 할께요. 이 책을 보고 라디오 광고를 따라하는 아이에게 '안토니오!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광고는 열이면 열 다 별로 살 필요가 없는 상품들을 사라고 사라고 강요하는 것들이란다' 이렇게 몇 번 말해줬더니 아이는 광고가 나올 때마다 '아빠! 저건 살 필요가 없는데 자꾸 우리보고 사라고 그러는거지?' 되묻습니다. 이 또 다른 차원의 조기교육의 결과가 훗날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 기대 반 걱정 반 하고 있지요. ^^
탈소비, 여유를 최대한 확보하는 노동, 자동차 없애기 문화(아직까지 없애지는 못하고 자주 안타고만 있습니다. 중고자동차를 구입한 게 2005년이었는데, 7년 동안 5만 키로를 탔군요.), 쓰레기 줄이기 문화, 탈원자력, 정치야... 뭐 너무 관심 있어서 탈인듯 해요. 요즘에는 오히려 거대한 정치 이야기보다는 마을사람들과 무언가를 꾸려보고 시도해보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각각의 개성과 다양성이 어우러지는 문화(탈소비를 통해서야 가능해지겠지요) 이런 것들 중에는 우리들이 일상의 다양한 층위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들 아닐까요?
# 제6장 현실은 바뀐다 환경보호운동이나 자연보호운동은 이 몇년간, 옷차림처럼 유행한다거나 진부해진다거나 침체된다거나 부활한다거나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될 것이냐 아니냐고 물으면 당연히 계속입니다. 환경위기는 지금도 진행중이고, 계속 악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지 않더라도 그 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는 때가 옵니다. 문제는 그게 늦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환경문제도 역시 환경보호 사상이 마침내 주류의 상식이 된 단계에서 얼마만큼 자연이 남아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 '식민지주의'→'제국주의'→'경제발전론'→'세계화'로 이름을 바꿔온 탄압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의 문화는 그만큼 강인하게 발전해왔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문화의 발전을 눌러온 그 힘이 제거되면 세계 속의 문화가 얼마만큼 다양한 힘을 회복해낼 수 있을지 상상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투성이의 '방사능이 있는 유토피아'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만약 늦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있습니다.
문제는 정말 '너무 늦지 않게 되기를'입니다. 안토니오와 같은 우리 후세대가 나중에 무주할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을 거예요. 우리 어른세대들이 그동안 얼마나 세계의 자원들을 착취하고 고갈시켜왔던가, 전통적으로 전재했던 상부상조의 미덕은 온데간데 없고 서로 짓밟고 일어서며 살고 있고 또 그걸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가? 이젠 어른들이 빨리 성찰하고 '너무 늦지 않게'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글을 맺어도 되지만 부록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어 이것도 마져 옮겨 봅니다.
# 부록.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 내 주장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낱말 바꾸기 연습'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을 예시해보겠다.
He is intellignet but he has no drive. He is intelligent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ambition.
학식, 추진력, 돈, 용모, 여자친구, 젊음, 야망,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미국에서 한 인간의 성공 조건들을 쭉 열거한 것이다. 결국 "소유하라, 소유하라, 비즈니스맨이여 소유하라"라는 것이 학습의 주제이다. ...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묘사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이 아니라 미국인 영어선생들이 희구하는 바의 미국, 그들이 향수 속에서 그려보는 그러한 미국인 것이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오늘날 이 나라에 왜 환멸감과 방향상실감이 그렇게도 만연해 있는지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왜 밤이 되면 도시의 거리들이 불안의 장소로 변하는지, 왜 사람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무기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지, 왜 가장 급속도로 확대되는 정부관청이 경찰서인지, 왜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느끼는지, 왜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알코올 중독과 마약복용이 늘어가고 있는지, 왜 많은 미국인들(주로 비백인들)이 희망도 없는 쓰라린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지, 왜 빈민가의 많은 자식들이 문맹의 상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지, 왜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 심성 속에서 일본인들의 백인 쪽으로보다는 유색인 쪽으로 분류되는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이 이유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의 이미지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 영어공부 자체가 추종적 태도에서 자유의 도구로 변화될 때, 일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 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들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옛날 학교 시절 영어 공부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말이라는 게 무서워서 막상 이런 단어들을 무작정 외웠던 우리들이기에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계를 넘어서 환상을 가져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함께 들을 곡은 Nina Simon의 『The very best of Nina Simon』(2003) 두 장짜리 앨범 중 첫 번째 CD의 첫번째 곡인 "Ne Me Quitte Pas"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