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에 뉴스에서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고 요란하게 기사화하여 떠들어댈 때, 그런 보도들이 모두 소음처럼 느껴졌다. 스님의 입적 소식을 알리고 그분의 생을 돌아보는 보도들을 대하며 왜 그렇게까지 느껴졌는지는 솔직히 나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 소식을 접한 후 나는 그분이 입적하시기 몇 달 전에 읽었던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 숲, 2008)책에서 스크랩 했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았다. 출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암자(오두막?)에서 청빈하고 고요하게 사셨던 그 분의 삶 속에서 퍼올려진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말씀들과, 그 분의 입적 후에 난리법석을 떠는 세상 여론의 거리 속에서 심한 불협화음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누가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넔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무소유』라는 '책 이름' 하나를 접하기만 했더라도, 남들을 짓밟고 올라서더라도 끝없이 더 소유하려는 이 세상의 대세속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흠칫 놀라는 척 하면서 마치 자신들은 무소유의 삶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그래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집단적으로 항변하려는 난리법석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같이 사는 눈큰이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스크랩한 기록으로는 2009년 9월에 이 책을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난 이름만 들어봤지 법정 스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스님의 이력 중 눈에 띄었던 것은 내가 태어났던 해인1973년의 기록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유신시절 그 분의 이 짧막한 이력을 접하면서 이 책에 급호감을 가졌다. 그냥 암자에서 면벽만 하며 지내는 한 노스님의 세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그런 친근감이랄까?  

내가 그 당시 어떤 이유로 몇 몇 구절들을 책에서 뽑아 기록해 놨는지는 이제 기억에 없다. 몇 달 전에 그 구절들을 프린트해서 가방에 넣어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꺼내어 나직하게 읊어보곤 했다. 반복해서 접할 때마다 그 분의 말씀만 남고 그 때 그 때 나 스스로의 또다른 일상들이 떠오르며 부끄러워진다. 그렇게 한 구절 한 구절 읊을 때마다 새로운 내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뿌리뽑혀 그 구절 주위에 배치되었다가 시들어 버리곤 했다. 오늘 가방속에서 휴대용 칫솔통, 갖가지 책들, 납부해야 할 고지서, 수첩, 지갑 등에 이리저리 치여서 이젠 여기저기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프린트물을 꺼내들었다. 그래, 오늘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오르는 내 일상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기록해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 노년의 아름다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또한 노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그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는 법정 스님의 표현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우리 사회는 현재 힘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대한민국의 2014년의 시계는  '세월호'속에서 정지해 버렸다. 말 그대로 하나 하나가 모두 기적이었던 300여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인재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졌으며, 수천번의 삽날을 가슴에 찍으며 자식들을 묻은 부모들은 올바른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추하게 늙어버려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의 시계가 세월호에 묻혀 있는 와중에 나의 직장에서의 갈등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6개월이 넘게 흘러가고 있다. 나름대로 자체적으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라 판단하여 오래전부터 규정화해 도입했던 임원 선출방식을 통해 추천된 임원 후보를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힘의 논리로 인사를 내정하여 내려꽂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법대로'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명백히 '힘대로'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분이 '힘대로' 진행되는 야만의 시대를 겪고 있다. 해명도, 설명도 없이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고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혼 자체가 주름지고, 녹슬고 부식되고 있다. 그 속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은 결국 그 대한민국의 관심과 애정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약자들이다. 그들이 비정규직이든, 해고노동자든, 세월호 유가족이든, 어린 아이든, 노인이든, 찢기고 뜯긴 강산이든 ... 약자들의 대한민국 호는 가라앉고 있고, 가진 자들의 대한민국은 추하게 주름진 몰골을 드러내면서도 부끄럼 모르고 활보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에 서 있는 약자들은 멈춰버린 대한민국을 향해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법정 스님께는 미안한 맘이지만 2014년 9월 2일(수요일) 비오는 오후 늦게 이 구절을 이렇게 재해석했다. 소제목이 '노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노년의 대한민국'이 되버린 것이다.

 

#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이 글을 스크랩할 2009년 당시에 나의 상황은 무척 평화로왔을 거 같다. 지금 세 번을 반복해서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내려놓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해 진다.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요구를 마음을 비우고 다 받아 주어야 마무리가 된다는 얘기인지(일테면 '자존심'과 '사회적 시선에 대한 의식'을 내려놓으라는 건지), 아니면 내가 싸움을 하면서 '이것만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돼'하면서 그걸 지키기 위해 자꾸 저들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려는 나 자신을 향해 그것마져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인지(일테면 나의 안정적인 급여와 일자리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라는 건지) ......

무엇하나 아름답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놀이'처럼 다가오지 않으며, '천진과 순수'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 구절을 읽고 이렇게 해석하면서 내가 참으로 좁아지고 움츠러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한 말씀이라 생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랩한 글들에 대해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반발심리가 생기는 것은 내 마음이 굉장히 날카로워졌다는 반증 아닐까? 

다시 스님의 글을 거꾸로 읽어나간다.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 ↔ '놀이를 찾고 회복하는 것' 이 구절에서 무언가 내가 숨쉴 수 있고 비울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 연암 박지원 선생을 기린다
"나는 고을 일을 하는 틈틈이 한가로울 때면 수시로 글을 짓거나 때로는 법첩을 꺼내 놓고 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너희들은 해가 다 가도록 무슨 일을 하느냐? 나는 4년 동안 <자치통감 강목>을 골똘히 봤다. 너희들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고 안타깝다. 한창 때 이러면 노년에는 어쩌려고 그러느냐 ... "

 

회사에서의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내가 평년에 하던 기획과 사업 진행의 리듬이 모두 깨져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나 또한 안타깝고 안타깝다. 다시 회사가 정상화되었을 때 내 리듬을 찾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평소보다 좀 많이 책에 묻혀 지내는 일이 많아진 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내 노동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그러니깐 내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있는 행위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회사일이 바빴을 때와 달리 블로그에 자주 들러 이런 저런 글을 끄적이는 것도 어쩌면 그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해가 다 가도록 무슨 일을 하느냐?'라는 말씀은 내 마음을 아프게 때린다.

 

# 바라보는 기쁨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너무 가까이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비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에 그 사람의 본질(실체)을 놓치기 쉽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늘 한데 어울려 치대다보면 범속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신선감을 지속할 수 있다. 걸핏하면 전화를 걸고 자주 함께 어울리게 되면 그리움과 아쉬움이 고일 틈이 없다.
습관적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스치고 지나감이나 다를바 없다. 좋은 만남에는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 그 향기로운 여운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
너무 가까이서 대하다 보면 자신의 주관과 부수적인 것들에 가려 그의 인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움과 아쉬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애틋한 추억이 만들어지기 위한 성분들을 들라하면 이 두 요소일 것이다. 점심식사가 떠오른다. 늘 같이 먹던 부서 직원들과는 달리 누군가 오래간만에 밥을 먹자고 청하면 만나기도 전에 괜스레 마음이 설레일 때가 있다. 평소에는 자주 떠올리지도 못했지만 그 사람과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감사할 일 한 두가지는 자연스레 떠오른다. 해서 여러 사람이 모이는 만남이 나에게는 거북하다. 그 사람 하나하나에게 집중할 수 없다. 가급적 부서회식이든 사내 회식을 꺼려하게 된 요인 중에 하나이다. 물론, 주량이 쎄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기는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이런 스님의 '향기로운 여운'이 감도는 만남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둘째 아이가 생긴 올해는 약속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감사해야 하고 그리운 사람들은 많은데 ... 한 분 한 분 연락을 쉽게 하지 못하고 있다. 조바심이 생긴다. 이러다 만나면 그리움과 아쉬움보다 '서먹함'이 더 생기지나 않을런지... 정작 힘들어 할 때 만나주지 못하고 나 편한 때 연락해 만나자고 하는 건 아닐런지 하면서, 카톡에다가도 오래간만에 안부를 묻는 문자를 써내려가다가도 제풀에 지워버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다.

 

# 어떤 주례사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신속 정확하게 속물이 되고 만다.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없으면 대화가 단절된다. 대화가 끊어지면 맹목적인 열기도 어느덧 식고 차디찬 의무만 남는다.
......
숙제 하나,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밖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 읽는다.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따로 한 권씩 골라서 바꿔가며 읽고 시집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해서 하루 한 차례씩 적당한 시간에 번갈아 가며 낭송한다.
가슴에 녹이 슬면 삶의 리듬을 잃는다.

 

"자기는 좋겠다. 매 번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그럴 수 있어서"

요즘 둘째 갓난 아기 젓먹이고 재우고 놀리는 일로 하루 모든 시간을 보내는 눈큰이가 푸념으로 하는 말들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을 눈큰이에게 추천받고 이 구절을 읽어주면서 우리도 이렇게 책과 시집을 서로 추천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사와서도 거실 한 벽면을 채운 책꽂이들 중 두 칸을 정해서 각자가 읽고 추천할만한 책들을 꽂아두는 공간을 만들었다. 나의 경우는 추천 책꽂이의 책이 점점 변해가는 반면, 눈큰이의 추천 책꽂이는 내가 거의 다 읽었는데도 일년 가까이 변하지 않고 있다. 멀리 보면 아이를 돌보는 기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으로 기억되겠지만 오늘 하루하루 일상은 버거울 때가 많다. 더군다나 새꿈을 펼치려고 회사를 그만둔 마음 바쁜 눈큰이에게 지금 이순간은 매번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것마냥 아프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둘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적과 감사와 행복을 경험하는 때가 많이 있지만서도...  어제처럼 비가 하루종일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집밖으로 나가 보지도 못하고 집안에서 애랑 씨름해야 하는 눈큰이는 그만큼 더 힘들고 비참해진다.

그런 눈큰이에게 지금 당장 산문집의 이런 구절들이며 시가 들어가 자리를 잡을 틈이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라서 평소에퇴근후에 습관적으로 틀어놓던 음악이 소음처럼 느껴진다고 이야기해 음악도 꺼놓고 지낸다.

물론, 이런 것이 가슴에 녹이 슬고 삶의 리듬을 잃는다고 곡해하고 싶지는 않다. 매일 한 생명이 커가는 기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기쁨과 행복으로 녹슬 틈이 없다. 산문집 따위가 무엇이더냐, 시집의 시 나부랭이가 무엇이더냐, 음악이 따로 있더냐. 아이의 그 웃음과 천진난만한 눈을 들여다보고, 천사같은 그 옹알거림을 듣고, 잠자면서 씩 웃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에는 윤이 난다. 글쓰면서 다시 눈큰이를 생각한다.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으로 가슴이 울컥한다.    


함께 듣는 곡은 그룹 TEN의 『The Twilight Chronicles』(2006) 앨범 중 3번 트랙인 'The Elysian Field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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