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활을 기록하는 카데고리에 마지막 글을 썼던 게 2010년 6월이다. 벌써 4년이라니...

그 사이 한국사회에서는 SNS가 폭발적으로 이용되었고, 나또한 트위터나 페이스 북을 사용하면서 긴 호흡으로 글을 남긴다는 게 쉽지 않았었다. 블로그에 가끔 들어오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꾸 그런 뜸함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뻔뻔한 일상이 된지 오래다. 그래도 4년 이라니...  

요사이 블로그를 들어올 때마다 '그 사이 무슨 일들이 있었지?'라는 질문과 함께 기록으로 짧게나마 남기고 싶어졌다. 

중요도는 무시하고 시간적으로 기록을 해 보면...

 

1. 2013년 안토니오의 초등학교 입학 

 

2009년부터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니던 안토니오가 4년 동안의 어린이집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공교육 체계 속에 들어갔다. 안토니오와 함께 공동육아를 하면서 오히려 많은 배움을 얻은 것은 나와 눈큰이였다. 부모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자 끊임없이 노력했고,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부모들간의 갈등 속에서 성인으로서의 관계맺기에 대한 어려움을 실감하기도 했다.

매번 아이에게 욕심이 생길 때면 (신종플루 겪었을 때처럼) 고열로 울지조차 못했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간혹 아이가 다치거나 아플 때 나는 어떻하지? 어떻하지?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반해, 눈큰이는 이제 아이가 엉엉 울기만 해도 여유를 가지고 대응한다. 엄마의 내공이 쌓여 가는 것을 하루 하루가 다르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이 아이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공부(심지어 한글 공부도)는 일절 시키지 않았다. 물론, 한글을 익히는 계기는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안토니오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알기 위해 글자를 따라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 여전히 노는것밖에 모르는 아이와, 숙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부모 사이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물론, 나는 공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착한 일 하는 걸 경쟁시켜 칠판 옆 칭찬 깃발을 서로 뺏어오는 식의 교육방식이나, 한글을 처음으로 배워나가는 시기인 아이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나 조차도 헷갈리는 어려운 받아쓰기시험을 해 점수를 매기는 것, 첫 학기 시작될 때마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시험 가리기용' 파일 등 자잘하게 신경쓰이게 만드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집 주변에 있는 대안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공립학교에 보낸 이상, 학교는 선생님에게 완전 일임하기로 했다. 대신 퇴근 후나 휴일에 이 녀석과 어떻게 하면 더 잘 놀아줄지에만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는 더 큰 교육이 될 것이란 확신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건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이다. 우리의 바람대로 지금까지 흥이 많고, 공부보다는 축구를 좋아하고, 아빠 엄마와 많이 웃고 떠드는 그런 안토니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린이집 홍보물에 실린 안토니오 사진

 

 

2012년 겨울 제주 어느 곳에서... 현재까지 내 핸드폰 배경사진이다. ^^

 

 

안토니오가 입학한 2013년 3월 4일의 페이스북 기록

어제 오후에는 꽤 오랜시간 선생님과 학생 놀이를 혼자 하면서 재잘거렸다. 

아이: (선생 흉내) 여러분 4 더하기 3은 뭐죠? 
아이: 7요~ 
아이: (선생 흉내) 맞아요. 잘 했어요. 그럼 7더하기 4는 뭐죠? 
아이: 11요~
아이:(선생 흉내) 오~~ 잘 맞췄어요. (더 신나서) 그럼 16 더하기 16은 뭐죠?
아이: 16 더하기 16? .... 
(잠시 정적~~~)
아이: "아빠! 16 더하기 16은 뭐야?" 

아이는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있고, 정작 갈팡질팡 초등학생 학부모가 된 나는 설렌다기 보다는 불안하고 막막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눈큰이가 보낸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저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자문을 한다. 
이제부터 나도 새로운 배움의 시작이다. 흔들리지 말자!

 

입학 첫 날 가방을 메고 책상에 앉아 있는 안토니오.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2. 눈큰이 회사를 그만두다 


안토니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과도 무관치 않은 선택이었다. 이전 어린이집에서는 종일반으로 운영이 되어 일하는 데 심각하게 문제가 없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안토니오의 오후 시간이 모두 떠 버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학원차를 번갈아 태우며 아이를 이곳저곳 보내서 시간을 때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큰이도 10년 동안의 회사생활에 지쳐갔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일어 번역가'였다. 이미 일어 번역 시장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고, 결코 만만하게 도전해 볼 영역은 아니었다.

번역을 하고 싶어하는 것과 직장을 다니는 것 사이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매 해마다 반복되는 꿈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해 온 터였다. 물론, 직장생활하면서 끊임없이 일어공부와 번역 관련 학원 수업을 챙겨 들었다.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공부를 계속 해 보는 나로 하여금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주변의 번역일을 하는 친구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피골이 상접한 그 친구는 극구 말렸다고 한다. 너무 힘들고 번역료도 노동한 것에 비해 턱없이 낮은데다가 정기적인 수입도 없고, 불규칙적인 생활로 몸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몇 번의 숙고를 거쳐 그 길을 택했다. 

 

나 또한 눈큰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고민을 했다. 우선적으로 먹고 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고민이 있었다. 매 2년마다 말도 안되게 오르는 전세금을 충당하기에도 외벌이로서는 버거울 것이었다. 두 번째는 안토니오의 방과후 생활 문제였다. 나의 어머니는 한평생 가사노동을 해 오셨다. 오로지 자식들과 가족 뿐이었다. 그건 일흔이 다 되가는 지금도 변함없으시다. 그런 어머니의 존재는 돌이켜보면 내게 커다란 정서적 안정을 가져왔던 은혜라고 생각한다.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하게 만든 힘이 아니었을까? (물론, 자뻑이다.^^)

그래서 난 눈큰이가 회사를 그만두고 하교 후 집에서 아이를 반기는 엄마로서의 모습을 은근히 바라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눈큰이의 결단을 동의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꿈'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 생활,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해오면서 그냥 그 자리에서 만족하면서 지냈다. 특별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자'라는 닳아빠진 모토를 읖조리며 살았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에 나도 귀농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귀농학교도 다니고 텃밭도 경작하면서 가까운 시일안에 귀농을 하고 싶어졌다. 우리 아이에게도 아비규환의 경쟁 교육의 장에 오랜동안 방치하고 싶지 않았고, 땅을 일구며 생명을 가꾸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2011년에는 귀농이라는 꿈에 부풀어 귀농자들이 많은 곳을 직접 찾아가고 그분들을 만나 이야기도 들었다. 텃밭을 가꾸며 씨 뿌린 곳에서 예상치 못할 정도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어 보답하는 생명들의 경이로운 모습에 두려움과 함께 감동을 느꼈다. 귀농을 꿈꾸는 이웃들과 만나 함께 귀농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 꿈이 생긴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그 때 눈큰이가 매년마다 쓸쓸히 토로했던 '번역가로서의 꿈'이 내 마음에도 와 닿는 순간이었다. 절실한 꿈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막아서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꿈을 방해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별다른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귀농, 귀농을 입에 달고 있던 어느날 그녀는 한 방에 내 뒤통수를 쳤다.

"나 회사 그만둘래" 꿈을 꾸는 눈큰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게 그녀의 결단을, 그녀의 꿈을 응원한 제일 큰 이유였다.   

눈큰이는 안토니오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직장에 사표를 냈다.

 

지금은 번역일을 시작한 지 2년 차이다. 고마운 일은, 완전 초보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책 번역을 맡겨 준 출판사가 있어 작년에 번역을 끝내고 올해 초에 책 한권을 출간했다. 일본의 한 공무원인 아빠가 아내 대신 육아휴직을 내고 갓태어난 아기와 두 쌍둥이를 키우면서 기록한 육아서이다. 

눈큰이와 함께 꿈을 꿔본다. 지금은 닥치는 대로 번역일감을 받기만 해도 감사한 시기이지만, 먼 훗날 눈큰이가 좋아하는  책들을 직접 골라 그 책을 번역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오기를. 난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 ^^

 


3. 서울에서 ... 집을 장만하다.


2000년대 중반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두라'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고 다닐 때가 있었다. 집하나 장만해서 1년 사이에 1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는 얘기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때가 있었다. 누군 주식으로, 누군 부동산으로 ... 하는 식으로 한탕주의가 한국 사회를 가득 채웠다. 이건 명백히 불로소득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2년마다 전세집을 재계약할 때가 되면 집주인이 내 일년치 급여총액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매 번 이사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살아왔다. 바득바득 돈을 모아 예금을 하는 이유는 순전히 앞으로 얼마가 오를 지 모를  전세 상승분을 준비하기 위한 대비, 그거 하나 뿐이었다. 직접 세입자로 살아오면서, 부동산 버블은 상당수가 전세입자들이거나 월세입자들인 국민들의 지갑을 열 수 없게 하는, 내수경제를 좀먹는 주범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기가 생겼다. 몇 평 되지 않는 집 하나를 가지고 빚을 져서까지 집을 장만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정부의 경기부양대책이 고작 부동산 거품을 가라앉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 분노했다.

 

당연히... 서울에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형편에 맞춰 살다보면 언젠가는 이 거품이 꺼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시간에 쫓기고, 여유를 잃어버리기 십상인 이 도시에서 오래 살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계기로 서울에서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이 역시 안토니오의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안토니오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있는 눈큰이에게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호소를 접했다. 그렇지 않아도 공동육아를 하면서도 어린이집이 있는 곳과 우리 집이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공동육아다운 마을 생활을 하지 못해온 게 아쉬웠던 터였다. 학교가 가깝고 일상을 함께 할 이웃들이 많이 있는 마을 속으로 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사하려고 하는 곳은 서울에서도 꽤나 공동체 마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책도 나오고, 방송도 여러번 탄 터라 마을을 구경하러 전국에서 탐방객들이 오는 일도 잦아졌다. 마을사람들이 단체손님을 데리고 공동체 생활공간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설명을 하고 다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육아와 대안교육, 마을공동체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전세집이 나오기가 드물었고, 마음에 들면 가격이 너무 높았다. 운치있던 단독주택들은 헐리고 그 자리에 숨이 막히는 연립주택이 볼품없이 들어섰다. 안토니오 입학을 전후해 몇 달을 그냥 고민만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더라도 재계약이 만료되는 2014년을 상정해 두고 있던 터였다.

 

마을 공동체에서는 몇 해 전부터 뜻이 맞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주택을 짖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1년에 1호씩 8~9세대가 들어가는 공동주택을 짓는 사회적 기업도 만들어졌다. 1호, 2호가 만들어지고 이 또한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대안적 주거형태로 언론을 많이 탔다. 2012년 말부터는 벌써 세 번째 공동주택을 위한 입주자를 모집해서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1호 입주가구 중 네 가구가 공동육아를 하면서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몇 번 집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동일한 집구조를 가지고 있는 아파트와 일반 연립주택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스타일에 맞게 설계를 직접 하고 지은 집이기에 층마다 전혀 다른 건물에 들어선 느낌이 나는 특색이 있다. 또한 입주자들이 한 평씩을 더 사서 별도의 공용 커뮤니티실을 만들어 아이들의 놀이터겸 어른들의 친목 도모용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공동주택의 색다른 면이었다. 설계부터 각 가구별로 특색있게 진행되다보니 보통 3~4개월이면 지어지는 일반 연립주택과는 달리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에서 입주자들은 틈틈히 만나 서로의 설계도면을 공유하고, 커뮤니티실과 옥상 및 창고 등 공용공간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고, 또 갈등해결 교육과 모꼬지 등 사전 모임을 통해 함께 살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며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맞춰가는 시간을 갖는다. 평소에도 매우 매력적인 주거형태라고 생각했지만 그만한 경제적 여력도 없었을 뿐더러, 위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다시피 신념에 가까워진 '서울에서 집 장만 불가원칙' 때문에 그냥 가끔 그들의 삶을 구경하는 정도에서 그쳤었다. 그래서 3호 입주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로 여겼었다.

 

그러던 중 마을로의 이사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던 차에 3호 입주를 결정한 이웃으로부터 한 집이 사정이 생겨 비었으니 한 번 알아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눈큰이와 나는 공동주택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 번 알아보자는 식으로 건물 위치와 환경, 가격 조건 등을 면담과 공사 현장 방문을 통해 살펴봤다. 세상에~ 무엇보다 학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걸어서 50미터나 될까? 그리고 마을의 중심을 잡아주는 산 바로 아래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단, 해당층이 제일 아랫층이어서 주변 연립주택으로 인해 일조량이 적은 게 아쉬운 측면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으로 시작한 탐색이었다. 집을 산다는 것. 그것도 지어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몇 번 상담을 진행해 가면서, 그리고 현재의 경제적 상황과 아이의 학교 및 마을 생활, 그리고 우리의 삶의 질을 모두 저울질하는 와중에 호기심은 급속하게 절대적인 필요로 뒤바뀌었다. 결국 인생에서 몇 번 있지 않을 큰 결정중 하나를 '충동적으로 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서둘러 해 버렸다.  실제로 면담하고 고민한 시간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집을 짓는 분들(이분들도 이웃분들이다)에 대한 믿음과, 이미 공동주택에서 사는 이웃들의 높은 삶의 만족도, 그리고 같이 살게 될 이웃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해서 지난 해 11월에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선택은 대단히 만족스럽다. 입주자 여덟가구는 공동주택이라는 취지를 십분 이해하면서 서로서로의 욕구를 조절해 가며 함께 잘 지내고 있다. 자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마을 행사에도 되도록 함께 참여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품 속에서 만족하며 잘 살고 있다. 집 현판을 이반 일리치의 표현을 빌려 "000마을의 품에서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꿈꾸는 집"이라고 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인연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4. 둘째 콩이가 태어나다. 


그러고 보니 4년간의 기록을 쓴다고 해놓고 모두 2013년의 일을 쓰고 있다. 그만큼 나와 우리 가족의 삶에서 2013년은 많은 변곡점이 생긴 해이다. 마지막 대 사건 또한 2013년에 역사가 이뤄졌다. 


눈큰이가 회사를 그만둔 한참 후인 6월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도 눈큰이가 계속 몸이 안좋다고 하면서 이상증상을 호소했다. 혹시 몰라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검사를 해봤지만 이상이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 육아를 전담하는 문제부터, 집 계약과 설계 등 관련한 잡다한 고민들, 그리고 새로 시작한 번역 일까지 여러 가지 변화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자가진단하고 몇 주를 지나쳤지만 어지러움과 울렁증 등이 여전했다. 몸이 쉽게 지치고 자주 힘들어했다. 결국 다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검사를 했다. 이럴 수가! 몇 주 전에 체크했을 때 아무 이상이 없던 테스트기에 선명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이전 테스트기는 불량품이었다. 두 달이 거의 다 되서야 임신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나와 눈큰이는 안토니오를 가졌을 때와 동일한 충격과 당혹감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아이 여럿 키우는 이웃들을 많이 접했다. 아이들이 부모의 관심과 시선과는 상관없이 서로 챙겨주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늘 집에서 혼자 있는 안토니오와 대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오는 혼자이다보니 끊임없이 '아빠 놀자!' '엄마 놀자!'를 입에 달고 다녔다. 애초에 나는 아이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왔지만 직접적인 당사자인 눈큰이는 첫 아이 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말도 못꺼내게 했었다. 그러나 공동육아를 하면서 눈큰이도 '자연스럽게 생기면 하나 더 낳을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안토니오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전에도 몇 차례 이야기했다. 그래도 안토니오가 이미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상황에서 둘째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콩이가 눈큰이 배속에 들어선 것이다. 눈큰이의 번역가로서의 힘찬 출발에도 제동이 걸렸다. 눈큰이에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눈큰이는 충격과 난감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기대했던 일이라서 그랬는지 나와 함께 금방 기쁨을 함께 했다. 


태아가 안정기에 접어들때까지 안토니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몇 주가 더 흘러서 안토니오에게 동생이 생겼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안토니오는 정말 기뻐했다. 방방 뜨고 아직 부풀지 않은 엄마 배에 귀를 갖다 대기도 했다. '좋은 점은 함께 놀 수 있다는 건데, 엄마 아빠가 동생만 이뻐해줄까봐 그게 조금 걱정돼. 그래도 좋아'라고 동생이 생긴 소감을 밝혔다. 안토니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임신 사실은 동네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퍼졌다. 아는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엄마 둘째 생겼다. 나 동생 생긴다'라며 동네 방네 떠들고 다녔다. 많은 문자가 삽시간에 전달되었다. 많은 마을 분들이 축하해 줬다. 


그럼에도 30대 후반이 된 눈큰이는 어쩔 수 없이 힘들어했다. 더군다나 매일 직장 생활을 하던 지난 10년의 생활과는 달리 집에 혼자 있으면서 부정기적인 번역 일을 하는 것도 지난 10년 동안의 회사생활과는 다른 패턴이라 정서적으로 힘들어 했다. 눈큰이가 아주 사교적인 성격이기보다는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까지 가서 이웃들과 어울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 또한 집에 오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눈큰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며 그럭저럭 잘 지냈다.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렇게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 눈큰이는 어쩌면 그런 내게 서운한 게 많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꿀꺽~)

콩이라는 태명은 눈큰이가 꾼 태몽에서 가져왔다. 꿈에 눈큰이는 태어나서 자란 제주집 옥상을 올라가다 할머니가 살던 옆집 지붕에 탐스럽게 열린 완두콩이 있어서 손을 내밀어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도저히 안닿아 못잡았다 생각하며 손을 폈는데 그 속에 탐스러운 완두콩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여전히 신기하다. 태몽은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딸이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눈큰이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난 드러내놓고 딸! 딸!을 외쳤다. 그 앞에 '수지 닮은'이란 수식어를 달아서... 9월 말 정도였을 거다. 매달 하는 초음파 검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에 다리 사이에 볼록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순간 난 잘못 봤을 거야 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본 것은 선명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들이냐 딸이냐를 물어볼 때 내가 대답하기 전에 한숨을 먼저 쉬고 대답하는 게 습관화된 반응이라는 것을 자각한 건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 뒤였다.    


예정일은 2014년 1월 16일이었는데, 둘째는 하루 전날인 1월 15일 오전 10시 35분에 태어났다. 순산이었다. 물론 전날 밤눈큰이는 간격을 좁혀가며 몰려오는 통증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보냈다. 새벽 4시 경에 병원엘 갔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다시 집으로 왔다. 이틀 전에 이미 제주에서 와 계셨던 장모님께서 이른 아침에 나를 다시 깨운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그게 7시에서 8시 사이였던 것 같다. 거의 첫째 안토니오를 낳을 때랑 비슷한 시간대로 일이 일어났다. 병원에 다시 가서도 오후 늦게나 되서야 나올 것 같다고 의사가 진단했음에도 급속하게 통증은 심해지고 호흡은 가팔라졌다. 10시 정도에 의사에게 진찰을 요구하고 바로 분만실로 가서 누웠다. 분만실에서 간호사와 의사가 분만 준비를 서두르고 난 인고의 시간이 또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눈큰이 옆에서 마음을 벼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큰이의 표현으로는 '본격적으로 힘을 줄려고 하는데' 의사가 '힘주지 마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벌써 아이가 자궁을 통해 나온 후였던 것이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당황한 눈큰이는 침대에 누워 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첫째 안토니오 때는 분만실에 가서도 한참 힘을 주고, 심지어 간호사가 눈큰이 배 위에 올라타서 배를 누르기까지 한 후에야 힘들게 나왔는데... 둘째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의 처치를 받은 콩이는 몇 번 우렁차게 울어대더니 엄마의 배 위에 놓였을 때는 눈을 뜬채로 무언가를 쳐다보는 듯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콩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둘째가 세상에 나온 것을 실감했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장모님과 안토니오. 분만실에 들어온 안토니오는 엄마옆에서서 아기바구니에 있는 콩이를 보다가 엉엉 울었다. 나중에 왜 울었는지 물어보니  '너무 기뻐서 울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태어나자마자 찍은 콩이 사진.

      

  

콩이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큰 문제 없이 잘 컸다. 엄마를 닮아 아주 훤하게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우긴다. 뭐~ 상관없다. 듣는 나로서는 기분이 좋으니깐.
칼퇴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다. 요즘에는 날씨가 좋아 퇴근길에 눈큰이가 콩이를 안고 마중을 나온다. 아빠를 보면 맨 처음 놀란 표정을 짓다가 쑥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웃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그 사이 내 나이가 벌써 마흔을 훌쩍 넘어버렸다. 힘든 눈큰이 못지 않게 아기를 안고 어르는 내 모습도 낯설고 힘들었다. 결국 예전에 수술했던 다리가 말썽을 일으켰다. 세 달 가까이 무릎을 굽힐 때마다 심한 통증이 일어  절뚝이면서 다녀야 했다. 한의원을 들락날락했다. 직장에서도 임원 임명과 관련된 문제가 생겨 제대로 일을 못하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다리는 괜찮아졌지만 후자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정리할 날이 올런지 모르겠다. ㅜㅜ 



60여일 되었을 때의 콩이 모습


100일 기념 사진. 제주에서 처남이 이불깔고 찍어줬다.



그래도 퇴근해서 콩이의 모습을 보면 직장에서의 답답한 마음은 싹 사라진다. 그래! 올 한 해는 뭐니 뭐니 해도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한 생명 잘 길러내는" 거다. 모든 것을 나와 눈큰이에게 맡긴 이 작고 가녀린 생명이 오늘 하루도 우리의 품안에서 쑥쑥 커나가고 있다. 

그래! 그렇게 오늘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함께 듣는 음악은 Salta Cello의『SALTED』(2000) 앨범 중 2번 곡인 'Salted Samb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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