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맥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로드》(문학동네, 2008)

미래에 대한 장밋빛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사람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단지 그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을 뿐이다. 비단 국내의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불안으로 이끄는가?

전쟁이든 발전소의 폭발이든 향후 우리를 옥죄게 될 핵위협? 지혜의 여신이라는 꿀벌들을 포함해서 작은 징후에도 민감한 많은 생명들이 갑작스레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있는 근본원인인 지구 온난화?(사실 꿀벌들의 경우는 핸드폰이 세계화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를 위한 부품노동으로 전락시켜 버린 과학기술문명의 끝? 1인당 약 10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화석연료의 고갈을 목전에 둔 삶이 예견하는 참담함???

하나하나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요인들이겠지만 그  끝은 한결같이 인류의 종말 또는 적어도 자본주의 문명의 종말을 향하고 있다. 코맥 맥카시의《로드》는 그 예견된 재앙이 시작된 바로 그 시점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시야가 미치는 곳은 전부 불에 탄 흔적뿐이었다. 재의 여울 위로 거무스름한 바위들이 서 있었다. 재의 큰 파도들이 위로 솟구쳤다가 광야를 거쳐 멀리 쓸려내려갔다. 암흑 너머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는 침침한 해의 자취.

 

오직 본능적으로 숨쉬며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육신들만이 좀비들마냥 폐허가 된 공간들을 점유하고 있다. 그 속에서 아빠와 어린 아들이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들의 여정은 잠시만 한 눈을 팔면 식인도 불사하는 무리들의 또 다른 먹이감이 되어 버리는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다. 말도 안된다고? 이제 어두운 길목에서 도둑고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누구인가? 바로 또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사내는 남자가 일 년여 동안 소년 외에 처음으로 말을 해 본 사람이었다. 마침내 만난 나의 형제. 그 차갑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눈 속의 파충류 같은 계산. 회색으로 썩어가는 이. 인간의 살로 끈적끈적한 몸. 세상 모든 말을 거짓으로 만든 자. (피를 튀기며 죽었다)

 

아빠와 함께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아이에게는 기억하는 순간부터 이 황폐한 세상이 삶의 무대가 되었다. 아이로서 응당 가져야 할 기쁨, 호기심, 애교, 화, 응석 등의 이런 감정 또는 반응들을 아이는 모르는 듯하다. 대신 아이에겐 극도의 긴장과 공포가 삶을 위한 기본 반응이 되었다. 인간들이 쏟아냈던 그 풍요롭던 말들은 사라지고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침묵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대화뿐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어린이집에 엄마 아빠들이 모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뭘 먹이고 뭘 먹이지 말아야 하나요?' '아이들 실외 놀이는 하지 않고 당분간 실내에서만 지내야겠어요' '예정된 모꼬지는 취소하도록 하죠?' '원전 반대 집회에 우리가 단체로 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  끝없이 쏟아지는 말들을 접하면서 사실 나는 이 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언어들...  

코맥 맥카시의 간결하고 짧은 글, 정영목의 군더더기 없는 번역이 이 상황을 너무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 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의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긴 신성한 관용구. 모든 것이 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깜빡 하고 영원히 꺼져버리는 어떤 것처럼.

 

영화가 나온 이후 책표지가 이 난리다. 영화는 결코 책이 주는 상상력만큼이 아니었다. 늘 그렇지만 영화를 본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아빠는 대재앙이 시작되기 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웃고 안고 키스하고... 그래.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었던 시절을 기억속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길위에서 매번 맞딱트리는 끔찍한 상황은 아빠에게 그 기억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잠깐 잠든 사이 나타나는 '기억하고 싶은' 풍경은 주변의 부스럭거니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자마자 여지없이 증발해버린다. 살기 위해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그는 될 수만 있다면 그 헛된 기억들을 죄다 리셋하고 싶었으리라. 이제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믿음은 곧 죽음이다.

 

남자는 그 모든 것을 불신했다. 그는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적당한 꿈은 위험에 관한 꿈이며, 나머지는 모두 무기력과 죽음의 유혹이라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했다. 그곳을 이제 일곱살 된 내 아이와 함께 가고 있다는... 언젠가는 걸을 수조차 없이 지쳐있는 모습으로 아이가 물을 것이다. 끝이 어디냐고... 그럼 난 그 아이에게 무슨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나도 모른다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다른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랬죠. 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그런데 어디 있는 거예요?
숨어 있지.
뭘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서로를 피해서.
많은가요?
모르지.
하지만 있기는 있죠.
있기는 있지.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알았어요.
내 말을 안 믿는구나.
믿어요.
그럼 됐다.
언제나 믿어요.
안 그런 것 같은데.
믿어요. 믿어야 해요.

 

만물의 영장이라며 전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인간들이 지금 쌓아가고 있고, 향해가고 있는 곳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끝은 어디일까? 그를 위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기록하고 예측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기록한 지혜의 흔적들을 뒤적이며 '나는 누구이고 왜 존재하는가?' '나란 존재가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에 대한 고상한 대답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현재에 안주하며 누렸던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엄습해 오는 위기감을 잠시 잊게 해 주는 환각제였을지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남자는 까맣게 타버린 도서관 폐허에 서 있었다. 시커메진 책들이 물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책꽂이들은 넘어져 있었다. 줄줄이 수천 권으로 배치되어 있는 거짓말들에 대한 어떤 분노. 남자는 책 한 권을 집어들어 물을 먹은 묵직한 페이지를 넘겼다. 남자는 다가올 세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래서 놀랐다. 이것들이 차지하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기대라는 것.  (꿈)

 

아이에게 계속 걸어가야 할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없으면서 길을 재촉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아빠는 견뎌야만 했다.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그런 세상은 없다며 집을 뛰쳐나가 폭동의 정글 속으로 사라졌던, 사랑했던 아내를 생각하며 그는 이 아이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리고 이젠 모든 걸 놓고 싶어하는 아이를 다그쳐 깨운다.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 하지만 넌 포기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예정된 일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은 오고 만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순간이 올까봐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그런 갖은 고생의 끝에 웃음이 있고, 사람들간의 보살핌이 존재하는 공동체가 머무는 곳을 드디어 찾아서 사람들의 환대와 격려를 받기라도 했다면 아마 이 책은 기억속에서 금방 잊혀졌을 거다. 아빠는 아이를 남겨둔 채 눈을 감는다. 이 한 마디와 함께...  

 

넌 계속 가야 돼. 나는 같이 못 가. 하지만 넌 계속 가야 돼. 길을 따라가다보면 뭐가 나올지 몰라. 그렇지만 우리는 늘 운이 좋았어. 너도 운이 좋을 거야. 가보면 알아. 그냥 가. 괜찮을 거야.

 

물론 코맥 맥카시의 시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걸 결말에 살짝 보여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 뿐이다. 하지만, 아빠가 죽고 나서 그 아이에게 새롭게 전개되는 한페이지 분량도 채 안되는 짧은 묘사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두각시킨다. 스러져가는 비극적 상황에서 주제를 짧고 굵게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 마지막 페이지를 위해 이 소설은 아주 냉정하게, 집요하게 침착함을 유지한채 기술되었으리라.  

책을 읽은 후 함께 사는 눈큰이에게 권하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권했다. "정말 놀라운 작품이야"라고 하면서. 하지만 눈큰이는 '어휴~ 이런 책 힘들어 못읽겠어'하며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직장 동료 또한 '좀 지루했다'라고 평가했다. 

책을 덮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는 단문의 긴장감,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주는 놀라운 통찰력과 묘사! 이런 문학적인 걸 떠나서 이 책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다급한 경고문으로 읽혀져야 한다.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앞으로의 우리의 아이들에게 닥칠 미래는 결코 지금과 같지 않다는 걸...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 길에 이미 들어서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먼 훗날 누군가가 잿더미 속에 묻혀 있던 이 책을 집어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개새끼들!!!' 하며 부르르 떨지도 모른다.  

 

지구의 오랜 연대기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를 오늘 여기서 기린다. 네가 어떤 형식을 이야기했건 네가 옳았다.

 

함께 들을 음악은 영화 OST『Once』(2007) 중 2번 곡 "If you want 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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