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동영| 출판사 달(2007)

생선! 
최근에는 아이슬란드를 180여일 여행하고 쓴 일기를 또 책으로 냈더군. 그런데 이제서야 2007년도에 나온 책을 들고 이렇게 자네에게 인사를 하네.
당신을 알게 된 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직장에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는 직장동료를 통해서야. 모임을 가질 때면 생선 이야기에 들떠하다가 우리 직장 사람들에게 자네 이름이 꽤나 알려졌었지. 그 친구는 심지어 공연장에 가서 당신 뒤편에 앉아 말도 못 걸어보고 바라보기만 했다나 어쨌다나... ^^

아마도 이 책을 읽었던 건 2009년 여름 즈음이었던 것 같네. 책 표지에 나와 있는대로 당신이 중고 자동차를 렌트해서 230일 동안 미국대륙을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 풍경, 그리고 느낌들을 사진과 함께 담담하게 글로 담은 책이었지.

# 세상의 모든 시작
내가 없더라도 내가 떠나온 그곳에선 여전히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새 계절이 올 것이며, 모두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바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오직 나만 홀로 떨어져 나왔으니 내가 그곳을 생각하는 만큼 누군가도 날 기억해주길 바랄 뿐.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도 세상은 어제와 같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 조금, 아주 조금 변한 나 자신만 있을 뿐.

문득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답답하다고 느끼며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때, 어쩌면 생선 자네가 말한대로 나 자신의 공백이 이 세상에서 아무 의미가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가장 커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자리를 뭉게고 앉아있는건지도 모르겠네. 자네는 정녕 그런 스스로에 대한 위안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는가? 이미 또 다른 여행을 떠나고 온 생선 자네한테는 너무 때 지난 질문이겠군. 오히려 나 자신에게 다시 질문해야겠어. "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잠시나마 비겁하게 당신의 젊음을 핑계삼은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사실 내가 쳐 놓은 하나의 큼지막한 바리케이트에 불과하네. 그렇지 않은가? 생선!

# Route 66
결정적으로 그 도로에 대해 각인이 된 건, 지금은 폐간된 음악잡지 ...에 실린 내가 좋아했던 뮤지션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인터뷰에서 톰 웨이츠는, 자기 음악은 모두 그 도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 도로를 가보지 않고는 절대 자기 음악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사실 젊기도 하고, 다분한 끼도 있어보이는 자네의 여행 이야기를 진심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솔직히 뭤했다네. 하지만 이 구절이 자네에게 마음이 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 바로 Tom Waits 이 사람을 매개로 말야. 12년 전이었지? 이 사람의 『Swordfishtrombones』(1999) 앨범을 접하고 나서 그의 우수어린 목소리와 타악기를 이용한 독특한 음악이 가져다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 음악가가 말한 대목을 떠올리며 66번 도로를 달렸다는 말에 자네와 나 사이에도 동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운전하고 있는 자네의 차 옆좌석에 긴장을  풀고 몸을 깊숙이 파묻을 수 있었네. 한마디로... 드럽게 부러웠네 그려. ^^  

# 네가 날 믿지 못했을 때 / Sedona, Arizona
그 경험은 분명 쾌감이었다.
쏟아내는 기분 ……
내가 왜 그렇게 소리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 툭 터질 그 무엇인가가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희열과 그동안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Nina Simon의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네. 드러머이자 작사가이도 한 자네가 쓴 곡들은 내가 찾아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네. 방금 전 검색을 하여 자네의 음악을 들어보고 있네. 조용히 발코니에 앉아 떠 있는 달을 보며 떠나간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웅크린 모습의 자네는 왠지 쉽게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정말 자네... 그렇게 쏟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어줄텐가? 나도 오래 전 나 자신을 꽉 잡고 있던(또는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네. 그러나 그건 자네처럼 희열로 뒤범벅된, 큰 소리로 말하고 솟구쳐 오르는 어떤 기분이 아니었다네. 단지 나도 알 수 없는 울음이었네. 휜 어깨가 더 오그라든 채로, 모아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누군가 달려와 내 어깨를 감쌌을 때 고개를 들고 엉엉 울었다네. 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가? 동성이긴 하지만 나를 위해 함께 출발할 수 있도록 엔진을 켜 둘 수는 없겠나? 특별한 무언가를 원하는 건 아니네... 단지 질주하고 고함치는 자네에게 힘을 얻어 나도 꺼이 꺼이 소리를 쳐 볼 수 있으려나 해서 말일세. 근데 또 그 내지르는 소리에 짠내음이 물씬 풍기면 어쩌지?  

# 사랑하기보다는
보았다는 말보다는 느꼈다는 말이 더 낫다.
...
"네 말을 이해 못하겠어"라고 말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말해줄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낫다.
...
어둡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점차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작은 불빛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게 더 낫다.
많은 것을 보기보다는 많은 것을 다르게 보는 눈이 더 낫다.
...
많이 달라진 그를 탓하기보다는
전혀 변하지 않은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게 더 낫다.
...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는 편이 더 낫다.

얼마 전 나는 한국 비폭력센터라는 곳에서 하는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을 위한 비폭력대화'라는 교육을 수강했었네. 그리고 나서 다시 오래전 스크랩해둔 이 구절을 떠올리니... 세상에나 18시간 동안의 교육의 정수가 여기 담겨 있었을 줄이야. 그 교재에도 다양한 시와 노래 가사들이 적혀 있어 수강생들끼리 서로 큰 소리로 읽어내려가곤 했는데, 자네의 이 구절이 교재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걸세.
최근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거칠게 쏟아낸 적이 있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기에는 내 배설과 같은 냄새나는 말이 너무 구리고 날카로왔지. 쏟아버리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 이후 내가 그 사람을 볼 때 더 불편하고 힘든거야. 그 이후 시름시름 오랜 시간 앓고 기침에 시달린 것도 내 마음속에 스스로 만든 상처가 덧난 게 아닌가 싶어. 일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간 교육시간을 통해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던진 말들은 그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억눌린 욕구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차분히 내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고 느껴보고, 그 느낌의 그림자에 숨어있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지. 그리고 편지를 썼어. 물론 붙이지 못한 편지였지만 그 때 주고받았던 말들과 그 때 내 느낌과 그 때 당신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내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때 당신이 느꼈던 기분과 당신이 얻고자 했던 욕구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담담하게 써 내려갔지.

그리고 나서야 내 기침이 멎었던 것 같네.

근데, 생선! 자네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네만, 아마도 마지막 문장을 굳이 적어놓은 건... 글쎄... 생선 자네는 정말 사랑 받는 편이 더 나은가? 난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열정적으로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네의 의견에 나처럼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걸세. (근데, 자네... 진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긴 있는건가? 비난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것일세) 사랑은 상호 교환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기에 사랑 하는 거, 받는 거  나눠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나눠야 한다면 사랑을 하는 것은 내 의지의 표현이며 그 주체적인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 뿌듯함이 있다네. 이건 꼭 사랑이라는 범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네. 그렇지 않은가? 나중에 이별을 경험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행위 자체는 (물론, 때로는 후회 막급할 수도 있겠지만) 주체적으로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단 말을 하고 싶어 그러네. 하지만 사랑 받는다면... 이건 정말 고역일세... 받는 기쁨은 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일세. 마찬가지로 헤어지게 되면 사랑받은 사람은 후회하는 일 밖에는 남는 게 없질 않겠는가? 상처를 받고 떠난 사람에 대한 죄의식이 남을 수도 있겠고, 아님 그런 것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싫으면 중이 떠나지?'하는 유아 상태 그대로?  도대체 자네는 무슨 연유로 이런 생각을 한 겐가? 정말 궁금하네그려.  

# 어쩌면 그게 여행
무슨 요일인지 중요하지 않은 당신의 게으른 어느 일요일,
모처럼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
당신 옆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를 보며 포근함을 느낀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
서랍을 정리하다 영수증 뭉치에 가려진 여권을 찾았을 때의 설렘,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문득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다가 동시에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그 시선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딴 생각을 하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다시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실으며
한 번 웃게 된다면, 어쩌면 그게 더 여행다운 여행인지 모른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을 보며 고향에서 본 적이 있는
별과 달을 떠올리게 된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길을 걷다 마주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뒤돌아봤을 때, 거기에
아무도 없어 아쉽고 서늘한 마음이 든다면,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쩌면 여행인지 모른다.
붉게 물든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어쩌면 그게 여행인지 모른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동감한다면,
당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고마웠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서 위로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네. 멀리 훌훌 떠난 자가 떠나지 못하는 자를 다독여주는 동정의 표현이라고 해도, 내 일상에서 여행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수많은 풍경들을 떠올려볼 수 있게 해준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네.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안토니오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 쓰다듬어 볼 때, 조만간 갈 가족여행을 준비한다며 저녁 식사 후 거실에 앉아 여행관련 책을 열심히 보며 계획을 짜고 있는 눈큰이를 볼 때, , 정월 대보름을 맞아 서울 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을 퇴근하면서 보며 소싯적 쥐불놀이를 떠올리며 아련해지던 나를 마주할 때... 정말 여행인게지? 나도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것 맞는 거지? ^^ 

생선! 당신이 책 뒤 쪽에 여행하면서 들었다면 추천해 준 앨범 목록들을 죽 훑고 그 중 앨범마다 몇 곡씩 들어봤어.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나로서도 알고 있는 앨범은 고작 한 개밖에 안되더군. 세상에나... 정말 멋진 곡들이 많아 나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다네. 나와 함께 사는 눈큰이는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을 즈음 The Czars의 음반을 사왔더라구. 정말 우연치고 너무 놀라운 우연이었지. 당장 구입할 순 없지만 Camera Obscura, Koop (유일하게 알고 있던 이들), The Innocence Mission 등의 앨범들은 내 wish list에 담아놨다네. 언젠가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나도 66번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해 볼 수 있을걸세. 당신의 아이슬란드 방문기도 기대가 되는구려. 

생선! 아직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떠나봐야 알 수 있는건가?

함께 듣는 음악은 Pedro Almodovar의 영화 『La mala Educacion 나쁜 교육』사운드 트랙 앨범(2004) 중 13번 곡 'Moon River'다. 이 영화음악은  『그녀에게』와 마찬가지로  알모도바르의 단짝이라 할 만한 Alberto Iglesias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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